195화 고구려(4)
195화 고구려(4)
지근찰은 긴장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 협상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내일이 결정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마른침이 따가웠다.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곳으로 오기 전의 일을 되새겼다.
*****
지근찰은 손을 덜덜 떨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전선이었는데 처라후가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가, 가한을 다시 설득해야 합니다.”
“······.”
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멍한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지근찰은 속이 새카맣게 탔다. 처라후가 대놓고 반기를 들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사나 섭도의 모습에 지근찰은 절망했다.
‘애초 대카간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어이 돌궐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야.’
속으로 모든 욕을 하면서 말했다.
“차라리 아파가한과 협상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뭐······?”
“어차피 지금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협상하여 세력이라도 보존하는 게 옳습니다.”
“나더러 아파가한의 수하가 되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 동서로 분할하여 통치하는 겁니다. 차후 힘을 키워 설욕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아사나 섭도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감돌았으나 달리 말하지도 않았다.
사실 처라후가 물러나면서 이미 상황은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군을 이끌고 그와 싸운다면 피해가 더 커질 수밖에 없기에 아사나 섭도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상황인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떤가.”
“그들이 도와주겠습니까? 수나라도 자기 코가 석 자입니다.”
“······.”
“아파가한을 만나보겠습니다.”
“하. 그러게.”
지근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도 끝이다. 나도 살길을 찾아야 해.’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파가한 대라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
상념을 끝낸 지근찰은 대라편에게 빌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하하하! 살려달라?”
“소인이 충성을 다할 겁니다.”
“어차피 이긴 전쟁인데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대라편의 이죽거림을 본 지근찰은 불안함이 커졌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오지도 않았다.
“고구려의 첩자가 이곳에 있습니다.”
“뭐?”
“의연이 고구려의 첩자였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가 고구려의 사신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말이야.”
“예?”
지근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대라편은 비웃으면서 말했다.
“어이가 없군. 설마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그, 그게 아닙니다. 의연은 여태껏 가한을 속였습니다.”
“뭘 속이나?”
“의연은 처음부터 가한을 속이고자 소인과 합의했······아, 아닙니다.”
다급하게 말을 돌리는 지근찰의 꼴을 본 대라편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의연은 처음부터 나와 손을 잡고 너희를 농락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정보라고 내미는 것이냐?”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리석군. 처음부터 나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여기까지 왔거늘.”
“······.”
지근찰은 절망했다. 대라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애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홀로 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쩌다가 천하를 호령하던 돌궐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처음부터 내가 고구려와 손을 잡았어야 한다.’
이계찰만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이계찰이 먼저 고구려와 손을 잡아서 수나라를 선택했다. 멍청한 수나라 황제가 약조를 지키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내 탓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지근찰은 절망하면서 실성한 듯 웃었다.
‘내가 고구려와 손을 잡았다면 이미 수나라를 도모했을 것이야. 이게 다 이계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은 생존을 위해서 합리화를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친놈.”
육체적인 생명은 이미 경각에 이르렀다.
“당장 참형에 처하라. 더 말을 섞는 것도 수치스럽다.”
“가, 가한. 소인의 말을 더 들어주십시오. 기가 막힌 계책이 있습니다. 가한을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 끌고 가라!”
“가한!”
지근찰은 절규했으나 개처럼 끌려갔다. 대라편은 고개를 저으면서 좌우를 바라봤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네. 오래 끌지 않고 마무리를 하는 게 좋겠지.”
중요한 말이 한 가지 빠졌다.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우호를 더 돈독하게 가져야겠지.”
어차피 주적은 수나라였다.
-----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사나 섭도는 힘없이 웃었다. 그나마 믿었던 이계찰은 일가를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했다. 동생이자 차기 지존인 처라후는 자신을 버렸다.
천하를 호령하던 돌궐의 대카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현실이었다.
“적의 총공세가 시작됐습니다.”
지근찰이 협상에 실패한 게 분명했다. 아니면, 배신했거나. 막상 이 지경이 되니 누가 어찌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와신상담할 생각이었다.
지근찰과 이계찰이라는 두 팔이 없으니 오히려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쩌면 처음으로 생각부터 판단까지 홀로 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사나 섭도는 생존을 위한 최선을 수를 선택하기로 했다.
“전군을 이끌고 퇴각한다.”
“예?”
“그리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원군을 요청하라.”
“무,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움직여라!”
“그, 그리하겠습니다.”
지금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구려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라편의 기세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와 정면충돌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돌궐의 절반이라도 지킬 수 있다.
‘일단 세력을 보존해야 한다. 나를 배신한 무리는 그 뒤에 처단해도 늦지 않다.’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켰다.
-----
이게 무슨 일일까?
모두 달려오면 좋기는 한데 우리도 입장이라는 게 있었다. 아니, 돌격하듯 사신을 보내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하루가 모든 걸 좌지우지할 긴박한 정세입니다.”
을지문덕의 목소리에는 즐거운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정말 그럴 만도 한 것이 대카간 아사나 섭도까지 사신을 보내서 목숨을 구걸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비명을 지를 정도로 행복한 고민이었다. 물론, 을지문덕의 말대로 시일을 길게 끌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대라편의 대군이 모두 삼켜버릴 것이니 말이다.
“이걸 왜 고민하나?”
고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최고의 무장다운 패기가 아닐 수 없다.
“장군께서 묘안이 있습니까.”
“뭐가 되더라도 일단 병력의 출병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이런. 그렇군요.”
“그렇지. 일단 대군을 출병해서 돌궐의 분열을 확정해야지. 그런 뒤 아사나 섭도와 처라후를 조율하면 되는 것이네.”
“큭. 무척이나 사이가 안 좋을 겁니다.”
“그건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
옳은 말이었다. 이번 작전을 잘 수립하면 우리는 돌궐의 절반을 간접 통치하는 게 가능해진다. 여기에 점차 국력을 키워나가면 돌궐을 말갈화시킬 수도 있었다.
어차피 원 역사에서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돌궐이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장군. 직접 나서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돌궐 전선이 구축되었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가나? 자네는 당연한 말을 해서 나를 웃게 만드는군.”
“하하하!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하면, 즉각적으로 출병하지요.”
“당장 가도록 하지.”
-----
나를 찾아온 이계찰의 표정은 불편했다. 이해는 했다. 아사나 섭도를 배신하고 왔는데 우리가 손을 잡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나는 충분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말했다.
“만날 일은 없을 것이오. 공은 왕도로 가면 되니까.”
“그게 그런 문제는 아니외다. 나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한은 어찌할 것이오? 돌궐의 절반을 취하기로 했는데 일이 지저분하게 되었소. 잊으셨소? 수나라의 외교가 왜 무너졌는지 말이외다. 상대를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다면 신뢰는 이처럼 중요한 것이오.”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명언이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소. 사실 우리 고구려는 대카간에게 당하기만 했던 것 같으니 말이외다.”
사실 따지자면 이계찰도 우리만큼이나 아사나 섭도에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경고하고 다그쳤는데도 지근찰의 말만 신뢰하며 고구려와 동맹을 파기했으니 말이다.
“가끔 생각하오. 그때 동맹을 유지하여 수나라를 공격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말이오.”
“싸워봐서 알지요. 무조건 우리가 이겼소. 장담하리다.”
“참으로 부질없는 말이지만 보지 못해서 아쉽소.”
이계찰은 쓰게 웃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소? 하면, 본국에서 중책을 맡아볼 생각이 있소?”
“무슨 말이오?”
“대 돌궐 협상의 책임자로 공이 나서보겠냐는 말이오.”
“······.”
“아. 오해하지 마시오. 불쾌함을 주려는 게 아니라 공도 어떤 응어리를 풀어야 필요가 있을 수도 있을까 물어본 것이오. 당연히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오.”
이계찰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좋소. 물론, 전권을 줄 수는 없소.”
“필요 없소. 그저 내려다보는 걸로 만족할 것이오.”
이래서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보다. 참으로 적절했다.
-----
양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구려의 행동을 종잡을 수는 없었지만 이건 대체 무슨 경우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막상 돌궐 전선으로 보내지 않는 이유는 뭐요?”
“실제로 군권을 줄 것도 아니외다. 그런데 가서 뭐 하오?”
“하지만······.”
“아. 멈추시오.”
왕고덕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양광은 멈칫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소? 대우를 해주는 것이지 권한이 있는 게 아니오.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냥 아닌 것이오. 왜 두 번, 세 번 말하게 하오?”
“······.”
“종종 자신의 처지를 까먹는 것 같아서 이번에 다시 말해주는 것이외다. 절대로 잊지 마시오. 전하는 말입니다. 인질입니다. 인질.”
양광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올라왔다. 그러나 왕고덕의 말에 반박할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 말이다.
“내가 실언했소.”
“그래요. 자중하세요. 그러면 좋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소.”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요. 하지만, 오늘은 적당하지 않으니 다음에 말해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