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고구려(1)
192화 고구려(1)
개인이든 집단이든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생존이었다. 불우한 미래가 보이는 위정이었기에 내 앞에서 진솔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위정을 어찌 살려줄 수 있을지가 좀 난처한 상황이기는 했다.
며칠만 더 빨리 왔다면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지라도 선택의 여지는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모든 것이 집행된 상황이었다.
정말 아쉬워서 말했다.
“이번만큼은 벗의 어려움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아쉽소.”
“허. 그러지 말고 우리 좋은 방안을 찾아보는 게 어떻소?”
“아니, 돌궐 공략을 철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내 입장을 좀 고려해주시길 바라오. 벗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막리지이니 말이외다.”
“내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본국의 운명이 참으로 안쓰러우니 이러는 게 아니겠소이까.”
다시 느낀다. 국력이 뒤를 보태지 않을 때 외교는 참으로 처량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위정을 볼 때마다 심장에 새기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론적인 말이라도 꺼내서 위로해줘야지.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마시오. 우리 역시 수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남진을 시도하는 걸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 그렇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었소. 하지만 무언가 더 실질적인 내용이 있으면 좋지 않겠소?”
“묘안이 있소?”
“정말 고구려가 기주를 흔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오?”
아니, 이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 진상이 된 걸까? 진나라 사정이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나?
분명 돌궐과 일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이러니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였다.
“왜 이러시오? 그리고 그런 청을 하려면 무언가 내어줄 거라도 말해야 하는 게 아니오? 무작정 수나라를 견제해야 하며 진나라는 살아야 하니 본국의 대군을 출병하여 기주를 흔들어 달라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이오?”
“우리가 무엇을 내어주면 되겠소?”
“허.”
진상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냉정하게 말할 때 진나라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다. 만일, 티끌만큼의 능력이라는 게 존재했다면 고구려와 돌궐이 수나라를 압박했던 천재일우의 기회에 먼 산이나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사신단의 정사라는 위정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이 안쓰러워 보여서 화도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위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이미 너무 여러 가지를 내게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마디만 더 보탰다.
“양국의 우호는 변치 않을 것이오. 이것만은 확실하오.”
이는 내가 비루함의 끝을 보여주는 진나라 사신단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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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은 쓴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이 아파가한을 만나게 되었으나 상황이 복잡하다는 건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평생 대사처럼 교활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잘 알고 있구려? 한데, 다시 나를 찾아온 건 대체 무슨 일이오?”
일찍이 고구려와 함께 군사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약조되었다. 수나라를 압박한 건 좋았으나 이후가 문제였다. 고구려는 먼저 퇴각했고, 아파가한은 대카간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었다. 만일, 고구려가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물론, 현재 정세가 마냥 불리한 건 아니었지만 여차하면 세력이 송두리째 흔들릴 뻔했으니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다.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소.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소? 들어나 보리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소승은 현재 고구려와 연락이 막힌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뭐요? 하면, 나를 왜 찾아온 것이오? 아니군. 여기까지 온 이유가 따로 있겠군.”
“가한. 소승을 도와주십시오. 지근찰이 소승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줄타기를 하던 의연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처를 확실하게 옮기는 것이었다. 더는 아파가한을 교란할 방법도 없었기에 지근찰로부터 토사구팽 당할 건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아파가한과 손을 잡는 게 현명했다.
“내가 대사의 목숨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니오. 아마도 함께 온 자들은 지근찰의 수하들이니 감시하는 인원이 아니겠소? 그들만 제압하면 되는 것이니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소. 그간 대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도와줘야지요. 그런데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소?”
“가한. 고구려가 대체 무슨 사유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소승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장의 일을 어찌 적아로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필시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의연은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어떤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말이 자연스러웠다. 지금 하는 말은 무조건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소승이 지금은 아무것도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훗날 가한께 도움이 아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긴. 뭐. 좋소. 대사를 도와주겠소.”
“감사합니다. 가한.”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아파가한의 승리에 일조하는 게 옳았다. 이제 의연 역시 고구려의 영광보다는 살고 봐야 한다는 걸 확실하게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야만 왕 대인의 멱살을 잡을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나도 확실한 생존 의지였다.
‘지근찰의 전횡이 심각하다. 하지만 이를 언급했다가는 나를 다시 대카간에게 보내서 교란을 시킬 것이다. 이건 곤란하다.’
의연은 마음을 다잡고 말을 꺼냈다.
“가한. 대카간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근거가 있소?”
“결국, 수나라의 세폐에 의존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반면, 가한께서는 수나라 원정을 통해서 막대한 물자를 확보하셨습니다. 가한께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아. 그건 이미 알고 있소. 그러나 내전을 지속할 수는 없소. 언제 외부의 도전이 발생할지 모를 일이오. 하지만, 외부에서 우리를 도와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외다.”
“하면, 가한께서 소승을 고구려로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큭. 말이 이렇게 잘 통하니 내가 어찌 대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어차피 의연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만에 하나 교란을 위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고구려로 보내는 일이 내게 타격을 줄 수는 없다. 그냥 죽여도 얻는 건 없으니 고구려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파가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래 끌 일은 아니지요. 바로 채비하시오. 귀국을 도와주리다.”
“감사합니다. 가한.”
고구려가 지척에 다가왔다.
의연은 울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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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나 속내는 복잡했다. 아니, 애초 인질인 자신을 정벌군의 자리를 내어준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고구려의 정예군을 지척에서 살피니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군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 명이 강하고 전체는 강군이다.’
훗날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퉈야 할 나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부지런히 살폈고 결과, 근심은 커져만 갔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강군이지요?”
“아.”
다가와서 은근슬쩍 말을 거는 사람은 을지문덕이었다. 젊은 장수였으나 최근 고구려군의 실세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특히 수나라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양광은 적당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강군이오. 진심으로 감탄했소. 적으로 마주한다면 참으로 두려울 것이오.”
“하하하. 전하. 그렇다고 보기에는 아군을 너무 유심히 살피시더군요. 두려움이 아니라 허점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보셨소.”
“그렇습니까?”
을지문덕이 볼 때 양광의 배포는 보통이 넘었다. 가볍게 여길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한데, 돌궐과 싸우러 가는데 나를 굳이 데려가는 이유가 무엇이오? 참으로 궁금하오.”
“짐작하는 게 있다면 아마도 맞을 겁니다.”
“본국이 대카간에게 세폐를 보내기로 했는데 내가 등장하면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오?”
“명쾌하군요. 정확합니다. 그래서 전하의 깃발도 잘 준비했습니다. 돌궐이 보면 깜짝 놀랄 수 있게 말입니다.”
“음. 돌궐이 얼마나 속을지 모르지만 나쁜 방법은 아니군요.”
양광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한 내용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실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고구려는 나를 치워버릴 생각이오?”
“그건 전하께서 결정하셔야지요. 최선을 다하면 살 수 있을 겁니다. 귀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요.”
“일전에 왕 막리지에게 제안한 게 있는데 조정에서 동의하지 못했나 보오?”
“하하하. 수나라와 전면전을 감행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한데, 그 이유가 전하의 금의환향이 될 수는 없지요. 왜? 전하를 믿을 근거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오.”
양광은 내심 아쉬웠으나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본 을지문덕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전하. 살길은 천천히 모색하지요.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만에 하나 돌궐과 협상할 일이 있으면 나도 데려가시오.”
“이런. 벌써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살길을 찾을 기회를 주리라 믿겠소.”
“하하하! 좋습니다.”
양광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등을 돌렸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의 표정은 참으로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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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없이 귀국길에 오르게 된 위정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 일국의 재상으로서 천하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압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수나라는 남진할 것이다. 10만의 대군만 움직여도 본국의 운명은 위태로울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구걸에 가까운 외교를 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주라후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고구려의 군사적 행동을 유도해달라고 했다. 해서 위정은 자존심 따위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진나라의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은 아쉬움이 많았소. 그러나 우리는 벗이니 어찌 마음에 담아두겠소이까.”
배웅이라도 하러 온 건지 대뜸 찾아온 왕고덕이 아쉬움을 보이면서 말했다.
위정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외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했소. 다음에 기회가 있길 바라오.”
“어찌 기회가 없겠소이까.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오.”
“그래야지요. 그리고 보아하니 정벌군이 출병한 것 같더군요.”
“그렇소.”
위정은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고구려보다 몇 배나 큰 진나라는 1만의 대군도 쉽사리 운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수시로 수만의 대군을 운용하고 있으니 부러움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 고구려는 원래 이런 나라였다.’
위정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막리지. 내가 긴히 청할 일이 있소.”
“음. 무엇이오?”
“국서를 새로 내어주실 수 있소?”
“무슨 말씀이시오?”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한다는 국서요. 실제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고구려 태왕 폐하의 국서가 있다면 어찌 두려움이 있겠소이까.”
만일, 고구려의 대군이 기주를 공격한다는 국서가 있다면 진나라 조정을 설득할 길이 열리게 된다. 진실은 관계가 없었다. 전쟁은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수시로 수만의 대군을 출병하고 거두는 나라다. 상황만 잘 맞추면 기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위정의 의도를 깨달은 왕고덕의 입꼬리를 살짝 꿈틀거렸다.
“좋은 생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