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3)
191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3)
어떻게든 반발이 생기리라는 건 예상하던 일이었다. 다만, 어떤 형식을 취하고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럴 때는 강행군이 정답이었다. 왕명이라는 절대적인 권위를 앞세우는 것이야말로 현재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이문진이 아무리 관료 집단을 안고 있다고 할지라도 관료제의 기본은 ‘충’이었다. 백 보 양보하여 왕명에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을지라도 방향을 아예 틀어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우리의 관료제는 그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고정의를 위시한 국내계 귀족이었다. 이들이 이문진의 사상을 탑재하여 실력 행사에 나선다면 왕명을 틀어버리는 건 명백하게 현실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만났는지 모르겠소.”
“뭐. 칼을 들고 만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소?”
고정의는 싱그럽게 웃었다. 상황이 절대로 불리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이리 나오는 게 분명했다.
반면, 나는 쓰게 웃었다. 이미 출병을 언급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집행해야 했다. 느려지면 느려질수록 왕명의 권위는 떨어지고 평양계 귀족은 수세에 몰린다. 만에 하나라도 출병이 취소되기라도 한다면 정치권 주도권은 송두리째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아니, 애써 외면했던 양분된 고구려를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고 막리지.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이 다 끝난 뒤에 나서는 게 옳지 않소? 북방의 대계는 우리가 사이좋게 진행했던 일이었던 것 같소만.”
“음. 무슨 말인지 내가 너무 잘 아오. 한데, 그런 말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공께서도 알 것이외다. 구태여 과거의 일은 왜 언급하는지 모르겠소. 공의 그런 논리대로라면 그 전에 우리가 창칼을 겨눴던 사이라는 건 왜 잊어버리셨소?”
“과거사는 언급하지 않는 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현명한 자세가 아니겠소?”
“역시 명쾌하시오.”
과거사 청산은 다음에 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한시가 바쁜데 옥신각신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출병을 막아설 것이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일이오. 게다가 나는 일전에 분명 북방 정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자고 제안했소. 이는 틈이 생길 때까지 관망하는 초안이었소. 한데, 갑자기 방향을 뒤틀어버린 건 왕 막리지가 아니겠소? 인제 와서 내 탓을 하는 건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음. 이번에는 내가 확실하게 하지요. 내가 하는 말이 그런 현상만이 아니라는 걸 귀공께서도 잘 알 것이외다. 어떻소? 계속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오? 나로서는 내키지 않소만.”
“하긴. 이 바쁜 세상에서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만큼 무의미한 건 없겠지요. 좋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고정의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탄력적인 논의를 약조했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국내계의 지지가 필요하오. 음. 물론, 이번 작전에서 변경되는 내용은 없을 것이오. 돌궐이 빠르게 내분을 마무리한다면 바로 퇴각할 것이외다. 전면전은 우리 역시 바라지 않으니 말이오.”
“하면, 무엇을 내주실 것이오?”
“폐하께서 이르셨소.”
나는 고정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대로를 내어주겠다고 하셨소.”
“······.”
“어째서 답이 없소?”
“허.”
복잡한 표정을 짓던 고정의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당혹감이 잔뜩 담긴 한 음절이었다. 헛웃음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대대로를 언제부터 태왕의 왕명으로 정했는지 잘 모르겠구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오?”
“제대로 이해하시오. 나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소? 하면, 귀공이 대대로요.”
“······.”
“왜 답이 없으시오? 양보해주면 귀공이 대대로가 되오. 어떻소? 솔직히 나는 공이 망설이는 이유를 모르겠소.”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오. 한데, 왕명을 앞세운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외다. 이런 형식을 거치게 된다면 차후 고구려의 대대로를 결정하는 일에 왕권이 개입할 것이니 귀족의 대표인 내가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정치에서 원론만큼 무의미한 건 없지만, 원론보다 강한 것도 없었다. 지금 고정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정말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형식으로 대대로가 결정된다면 왕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바로 간파하는 고정의는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대화가 끝나지 않는 건 그만큼 대대로는 누구나 탐을 내는 최고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정치력만 가지고 있어도 대대로는 태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권한과 위상이 있었으니 고정의가 머뭇거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거절해야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취하고 싶을 것이니 말이다.
“왕명을 빼면 내가 동의하겠소.”
“참 고집이 있으시오.”
“왕 막리지. 평양계가 근왕파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태왕은 아니외다. 평양계와 귀족의 대립도 결국은 누가 고구려의 실권을 차지하는지를 두고 겨루는 것이었소. 태왕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외다. 다툴 때 다투더라도 금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좋소.”
“정말이오?”
“물론이오.”
고정의는 쉽사리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실 가장 좋은 건 왕명으로 대대로를 임명하는 것이었다. 과거 고양성에게 이런 세상을 안겨주겠노라 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건 때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금의 정세에서 왕권에 집착하는 건 무의미했다.
대대로가 된 고정의가 어떤 행보를 취할지 지켜봐야 하겠으나 북방 정책의 성공은 분명 고구려를 새로운 길로 안내할 것이었다.
나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고양성도 수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북방 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해주길 바랍니다. 대대로 대인.”
“허.”
고정의는 헛웃음을 지었으나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좋소. 내가 수정안을 확실하게 지지해주리다.”
“거는 기대가 큽니다. 대대로.”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손님이 방문했다. 바로 진나라의 사신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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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친구를 만났다. 바로 진나라 사신단의 정사 위정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격하게 그를 반겼다.
“왜 이제 오셨소!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하하하! 내가 참으로 죄스럽소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왔으니 노여움은 버려주시오.”
“하하하! 응당 그래야지요! 내가 어찌 벗을 미워하겠소이까!”
역시나 나의 격한 환대에 위정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한데, 연회가 어찌 이토록 성대하오? 내가 너무 감격하여 말을 할 수가 없소.”
“내가 어젯밤 꿈에 산신령이 나와서 크게 호통치길래 혹시나 하고 성대한 연회를 마련했었소. 한데, 공이 오늘 딱 나타났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무엇이 하늘의 뜻이겠소? 한데, 말을 참으로 잘하는데 어찌할 수 없다고 농을 하오?”
“이런! 이토록 진한 인연의 끈이라니 내가 실로 감동했소이다. 하하하. 그리고 벗을 두고 말을 아끼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특히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이라면 더 그렇소.”
나와 위정은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죽이 맞았다. 분위기가 좋았고 웃음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하하하. 한데, 좋은 소식이라도 있소?”
“벗을 찾아왔는데 어찌 빈손으로 왔겠소이까.”
“오! 무엇이오?”
“본국이 후량을 도모하여 수나라의 급소를 노리게 되었소!”
“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맞춰주는 건 사회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서로 발연기하면서 서로 맞춰주기도 해야 하는 법이다.
“하면, 진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겠군요. 진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이거 왜 이러시오? 귀국은 수나라의 대군을 격퇴하여 북평을 도모하지 않았소이까. 천하가 흔들려서 내가 자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소.”
“하하하! 양국의 앞날이 이토록 밟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소.”
“해서, 내가 긴히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소.”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본국은 차후 북진을 대대적으로 도모할 것이오. 한데, 수나라를 어찌 가볍게만 여길 수 있겠소?”
“우리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그렇소. 고구려의 강군이 수나라의 기주를 압박한다면 어찌 천하가 흔들리지 않겠소이까.”
피의 동맹을 체결하여 수나라를 씹어 먹자는 아주 간단하고 아름다운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계획만 좋았다.
만일, 진나라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봤을 부분이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제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비정상적인 나라였다. 이번 사신단의 목적도 수명 연장을 위한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고구려가 후방을 압박하면 수나라가 감히 남진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런 얕은수에 넘어갈 정도로 우리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걸 대놓고 표현하여 분위기를 경색시킬 필요는 없었다. 적은 줄이고 아군을 늘려야 하는 정세가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에둘러 난처함을 보였다.
“한데, 본국은 북방으로 진군하게 되었소.”
“북방이라니요? 설마 돌궐을 이르시오?”
“그렇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으나 그리되었소.”
“하, 하면 북방의 패권을 취하게 된다는 뜻이오?”
“하하하. 천하의 정세를 어찌 예단할 수 있겠소이까. 그저 출병만 해본 것이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앞서가지는 마시오. 너무 부끄러우니 말이외다.”
내가 겸손함을 보였으나 이미 위정의 눈동자는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머릿속도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호, 혹시 수나라와는 이대로 평화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오?”
“적어도 지금은 그렇소. 물론, 세상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요. 아. 수나라의 황태자가 본국에 와 있는데 이번 원정에 함께 가기로 했소.”
“······.”
비보가 연이어 전해졌기 때문인지 위정의 표정은 썩어버리고 있었다. 벗의 곤혹스러움이 참으로 안타까웠으나 원래 거짓말이 더 나쁜 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본국과 귀국의 관계가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생각하오.”
“무, 물론이오. 막리지.”
죽어가던 위정은 대뜸 내 손을 확 잡았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설픈 자존심을 앞세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겠소.”
“허. 왜 그러시오?”
“본국은 수나라를 감당할 수 없소. 이때 고구려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소. 어려운 청이라는 걸 내가 모르지 않으나 부디 함께 이 난세를 극복하길 바라오.”
그러니까 제발 살려달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