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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93화 (193/199)

193화 고구려(2)

193화 고구려(2)

지근찰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됐다. 아파가한과 격전을 치르고 있는 이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대군을 출병했네. 그 수가 무려 5만에 이르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정하십시오. 아직 요동에 주둔했을 뿐입니다. 창끝이 수나라로 향할 것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듣고 있던 처라후가 격분하여 나섰다. 지근찰은 당황했다.

“고구려군에 수나라의 황태자가 있소. 그가 일군을 이끌고 있는데 수나라를 향한다는 게 말이 되오?”

“황태자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 수나라가 제대로 인질을 넘겼던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지금 그게 중요하오?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처라후의 일갈에 지근찰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의 책임을 내게로 돌리는 겁니까? 하. 그렇다면 가한께서 고구려와 아주 밀접한 관계이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담긴 뜻이 참으로 불순하오? 마치 내가 고구려와 내통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오?”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나는 가한께서 고구려에 원군을 보낸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군사 작전을 함께 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데 이번 일도 무언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여쭤본 것입니다. 한데, 왜 이리 역정을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보시오!”

“가한께서 소인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면 나 역시 가한의 행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처라후는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대카간 아사나 섭도가 이를 지켜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라니. 다만,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걸세.”

“하!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고구려와 가깝게 지낸 건 사실이지만 이번 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음. 하면, 고구려에 이번 일을 파악해줄 수 있겠나?”

“······.”

처라후는 수치스러웠다. 물론,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였기에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제대로 된 절차로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의심하다가 봐주듯 말을 꺼내는 건 그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처라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

“나를 감히 어찌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보게!”

아사나 섭도가 고함을 지르자 처라후는 실소를 머금었다.

‘내부의 위계가 이렇게 무너졌구나. 지근찰의 세 치 혀에 대카간께서 이렇게 흔들리다니.’

이계찰이 건재할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근찰이 독주하면서 상황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리된 것이 분명했다. 참담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좀 식혀야겠습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처라후를 아사나 섭도는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필시 화를 삭이고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아사나 섭도가 말했다.

“음. 이계찰을 부르는 게 어떻겠나?”

“허. 그를 말입니까?”

“고구려 외교는 그가 정통했네. 이 문제를 이계찰에게 맡기고 대라편과의 전투에 집중하는 게 옳지 않겠나?”

“음. 그가 그간의 처벌에 불만을 품고 괜한 짓을 하지는 않겠습니까?”

“이계찰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괜한 생각은 집어넣게.”

아사나 섭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는 오히려 기쁘게 이 일에 나설 것이네.”

하긴. 이계찰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지근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면,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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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처라후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도무지 노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하. 지근찰이 나를 이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위계가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는 없다. 심지어 대카간까지 거들고 있는 모습에서 좌절감마저 느꼈다.

“가한.”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한 이는 놀랍게도 이계찰이었다. 처라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고구려 외교를 맡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허. 그렇게 박대하다니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사람을 다시 찾은 것이오?”

“허허허.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지요.”

무언가에 초탈한 것만 같은 이계찰의 모습에 처라후는 괜히 마음이 안쓰러웠다.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막상 공이 어려움에 부닥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내가 매우 미안했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가한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해주니 참으로 고맙소. 음. 바로 떠날 생각이시오?”

“예. 한데, 그 전에 가한께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도움이라니요?”

처라후는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계찰은 쓰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정확하게는 의견을 묻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소만.”

“지근찰은 원래 대카간께 불순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보고 있소.”

“그런 게 아니라 속내가 그랬습니다. 늘 대카간과 여러 가한을 비교하며 폄훼했습니다. 사석의 은밀한 이야기인지라 대카간께 흘러가지 않았을 뿐입니다. 또, 일을 키워 좋을 게 없어서 모두 함구했지요.”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돌궐이 오늘의 사태에 이른 건 하나부터 열까지 지근찰의 판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서요?”

“한데, 대카간께서는 책임이 없습니까?”

“뭐요······?”

처라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계찰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미 대카간께서는 돌궐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지금껏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수나라 정벌을 했습니까. 외교에 성공했습니까. 지근찰이 아무리 간신이라고 할지라도 최종 결정은 대카간께서 하신 겁니다.”

“이보시오.”

“가한께서 물려받을 돌궐이 이렇게 누더기가 된 건 모두 대카간의 탓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가한께서는 아파가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부에서 가한도 제대로 다독이지 못하는 대카칸이 말입니다.”

“······.”

이계찰의 말은 불경했으나 처라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불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가한의 몫을 찾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소인은 이 말을 하고자 오늘 찾아온 겁니다.”

“······.”

“가한께서 결심이 서면 고구려와 협상하겠습니다. 만일, 아니라면 고구려의 동향만 파악할 겁니다.”

“······내 몫이라면 무엇이오.”

“돌궐의 절반이라도 가지셔야지요. 어차피 이미 전부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에 예속될 수도 있소.”

“아파가한에게 뺏기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

“이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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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뭘까.

왜 다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럴까?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이렇게 쳐다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네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하하하. 대인께서 여기까지 오시니 다들 즐거운 것 같습니다.”

을지문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장수들을 쳐다봤다.

“그게 아닌 거 같은데?”

“하하하. 전에는 고 막리지께서 오셨지요. 한데, 이제 왕 막리지께서 오셨습니다. 아마 뭐 다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팽창 정책 초기에는 확실하게 내가 고정의보다 우위에 있었다. 꼭 이것이 이유는 아니었으나 희한하게도 고정의가 전선을 누비며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대대로가 되었기에 왕도를 벗어나는 건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인데 이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위계에서 밀린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부릅뜨면서 손을 내저었다.

“다들 오해를 한 것 같군. 이건 그 문제와는 별개일세. 내가 입안한 북방 정책의 마지막을 직접 귀결시키고자 달려온 것이네.”

“물론입니다.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소장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게. 자네는 왜 아랫사람들을 잡아놓고 괜한 말을 하나?”

구석에서 듣고 있던 고흘이 핀잔을 줬다. 나는 억울하여 하소연했다.

“장군. 중상모략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해명이라도 해야지요.”

“중상모략은 무슨. 내가 볼 때는 정확한 내용이었네. 그리고 누가 봐도 자네가 대대로에게 밀려서 요동까지 왔다고 생각할 것이네.”

“아니, 장군까지 왜 이러십니까.”

“왜기는. 사실이니까 그러는 것이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으나 고흘에게 더 따지기도 어려워서 을지문덕을 쳐다봤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하늘 아래 내 편은 아무도 없다며 통곡할 때였다.

“대인. 돌궐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갑자기 돌궐에서 어찌 사신이? 누구인가.”

“이계찰입니다.”

이거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왔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격하게 환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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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찰의 얼굴은 많이 상했다. 그간 고생했다는 내용은 전해 들었기에 마음이 참 안 좋았다.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입지가 전과는 다를 것인데 나와 협상할 수 있겠소? 아. 협상이 아니라 아군의 동향을 파악하러 왔을 수도 있겠구려.”

“비슷하오.”

“비슷하다는 건 전자요? 아니면 후자요.”

“그 전에 청이 있소.”

“들어나 보지요.”

“고구려인이 되고 싶소.”

“······.”

“고구려에서 도와주면 가문의 세력을 통째로 옮길 생각이오.”

우연히 길 가다 주운 복권이 1등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정말 벼락 맞은 것보다 더 충격적이고 짜릿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

“흔한 이유요. 홀대에 지쳤고, 대카간은 희망이 없어 보일 뿐이오.”

“그 말은 아파가한에게 승기가 넘어갔다는 것이오?”

“아닐 수도 있었소. 그러나 그리될 것 같소. 어쩌면 내가 배신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나는 돌궐에서 마음이 떠났소. 어떻소? 나를 받아주실 것이오?”

“이런. 그리하면 돌궐과 심각한 외교 갈등이 발생할 것 같소만.”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소.”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은 없소.”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돌궐과 전면전을 각오해도 될 만큼 매력적인 일이라는 말이외다.”

“고맙소. 한데, 여기까지는 어찌 온 것이오?”

혹시라도 지금과 같은 일이 발생할까 봐 대군을 운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었으니 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귀인을 모시러 왔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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