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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90화 (190/199)

190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2)

190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2)

사람마다 정치적 판단을 할 수는 있다. 칼로 등을 찌르지 않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눈을 부라릴 수는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눈으로 욕하는 것도 막으면 너무 퍽퍽한 법이다.

“아니, 자네 서운한 게 있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나. 어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나? 그러면서 여기서 밥 먹는 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문진은 나를 흘겨보더니 방긋 웃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소생이 어느덧 일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치적 생존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도성에서 대인의 밥이 가장 맛있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허. 그 관료제를 내가 물심양면 지원했네. 한데, 무르익었을 때 국내계로 가버리면 내가 잠을 잘 수는 있겠나?”

“대인께서 가장 큰 역할을 하셨다는 걸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평양계와 소생들의 노선이 명확하게 다른데 어찌 계속 한배를 탈 수 있습니까.”

이문진은 멋쩍은 듯 시선 처리를 하긴 했는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말했다.

막상 이리되자 나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서운함도 있고 괘씸함도 있지만 국내계로 가버렸다고 하여 욕한다거나 묶어서 팰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 고구려는 과거처럼 일단 칼을 들고 휘두르는 야만에서는 조금 벗어난 상태였으니 말이다.

뭐. 다른 평양계 귀족들은 분기탱천하긴 했는데 내가 칼 들고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대인께서도 평양계와 국내계의 대립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유례없는 팽창 정책으로 대립이 수면 아래로 들어갔을 뿐이지요.”

고구려의 팽창 정책은 전에 없는 수준이었다. 이걸 달리 말하면 전쟁의 과실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부의 갈등은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 적어도 팽창 정책이 마무리될 때는 잠재적 휴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북평 점령의 과실을 두고 한차례 격돌이 있었으나 이 또한 내 기준으로 심각한 갈등은 아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한 건 바로, 이 문진을 위시한 관료제 집단이었다.

이문진과 아이들이 이 와중에 정치적인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세울지는 전혀 몰랐다. 이들의 온건주의 노선이 지금 당장 엄청난 파급이 낼 수는 없지만, 차츰 고구려 정계에서 힘을 내게 될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와 평양계 귀족의 오판은 이문진의 노선이 국내계의 길과는 본질적으로는 다르기에 융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내계 귀족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할 줄 알았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착각은 자유라는 것이었다.

“그래. 알겠네. 자네의 선택은 존중하지. 물론, 이렇다고 하여 내가 갑자기 관료제를 탄압하지는 않을 것일세. 이건 믿게.”

“감사합니다. 실은 아예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습니다. 아무리 대인께서 고구려의 단합을 중시한다고 할지라도 수백 년간 이어진 양측의 뿌리 깊은 갈등은 개인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배를 갈아탄 자네가 대단하다고 생각될 뿐일세.”

“나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고 하지요.”

“아. 한 가지만 더 묻겠네. 가서일이나 을지문덕의 입장은 어떤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말은 해주게.”

“소생이 두 사람과 가까운 사이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노선을 어찌 권하거나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 적은 없습니다.”

이문진이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두 사람도 국내계로 전향할 가능성은 충분히 컸다. 가서일은 고정의와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였고, 을지문덕은 애초 과한 팽창 정책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이 또한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자. 그러면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지. 자네의 요구 조건이 무엇인가?”

“소생의 의견을 수용하실 겁니까?”

“물론 무시해도 그만이지. 지금 상황에서 관료 집단이 국내계와 손을 잡는다고 해서 대세를 바꿀 수는 없네. 이건 고 막리지 역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네. 물론, 북방 정책을 축소하자는 말로 애써 돌리긴 하더군. 한데, 이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래서 묻는 것일세. 정확하게 말하게. 무의미한 충돌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꼭 새기게나.”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으나 내 말에 담긴 뜻은 참으로 정치적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정책에 불필요한 반대를 하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확실하게 담겨 있으니 말이다.

“대인. 현재 고구려의 위력은 지금껏 없던 수준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과유불급이라는 거로군. 잘 알겠네. 이만 가보게.”

“대인.”

“아. 곡해하지 말게. 나 역시 생각이라는 걸 해봐야 하니 말일세.”

딱 잘라서 말하는 나를 본 이문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하지만, 분명한 축객령이 내려졌기에 더 나서서 말을 보태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쪼록 대인의 전향적인 입장을 기대하겠습니다.”

“큭. 국내계로 전향한 자네의 요구가 전보다 더 과하거늘 내게 과유불급을 말하지 않나? 한데, 내게 전향적인 태도를 기대한다라. 이거야말로 겁박이지. 안 그런가?”

“······.”

“불필요한 말이 길어지는군. 물러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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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처럼 간단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국내계가 현재의 성세에 충분히 만족한다는 건 조짐이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인 외교론에 의지했기에 상황을 타개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때 이문진과 관료 집단이 결합하면서 전쟁 불가의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주도권은 아직 우리에게 있었기에 당장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속할수록 상황이 어찌 될지는 예상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형은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

돌궐 전문가 고식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네. 다만, 이문진의 경고가 사실이라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 여기에 국내계가 본격적으로 결합하면 팽창은 중단될 수밖에 없네.”

“음. 다른 건 쉽사리 예측할 수 없으나 국내계가 반대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누수가 발생합니다. 그들의 사병과 군량은 고구려의 절반이 아닙니까.”

고식의 말대로 국내계와 이문진의 결합은 현실적인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돌궐의 분열을 관망하며 틈을 보는 수준이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대로라면 그때가 오더라도 어떤 행보를 취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건 곤란하지요. 몇 년에 걸친 대계가 끝을 보지 못하다니요.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돌궐 정책을 주도한 고식이었기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이대로 더 관망만 한다면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될 겁니다. 다소 무리가 될지라도 강행해야 합니다.”

연자유도 고식의 말에 동조하며 나섰다. 두 사람의 의견이 모처럼 일치한다는 건 평양계 귀족의 반발이 생각 이상으로 거세다는 걸 의미했다.

고민의 시간을 더 길게 가져간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순간이었다.

“고식.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하지. 지금 아군이 출병하면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없습니다. 명확한 전면전입니다.”

“음.”

“물론,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열된 돌궐도 어찌할 수 없다면 북방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한 고구려가 무모했던 겁니다.”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 그건 아니지.”

나는 손을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의 의견은 충분히 이해했네. 하면, 폐하께 이를 고하고 최종적인 안건을 수립하겠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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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 역시 노선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국내계와 관료 집단이 결합하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구려. 칼을 들고 싸우는 내전보다 더 난처할 줄은 몰랐소.”

“폐하. 원래 말싸움이 칼싸움보다 격렬하옵니다. 그리고 노선 갈등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본격적으로 조정을 흔들기 전에 빠른 판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지금 당장 대군을 출병하여 돌궐의 내전에 개입하자는 것이 평양계의 중론이라고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고양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숨을 내쉬었다. 입술까지 잘게 깨물며 고민을 이어갔다.

“결정을 하기 전에 확실하게 해야 할 부분이 있소. 전격적인 개입을 고려하거나 준비한 적이 있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없사옵니다. 이번에 제기된 방법이옵니다.”

“어쩌면 국운을 걸어야 할 수도 있소. 혹은 지금껏 힘겹게 쌓아온 성세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소. 한데, 이토록 쉽사리 결정하여 집행하자고 한다면 내가 어찌 동의할 수 있겠소?”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일궈낸 작금의 성세는 분명 놀라운 것이었다. 고양성 역시 현재에 안주하고 싶을 수도 있었다.

아니, 냉정하게 분석하여 평양계의 움직임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파 간의 갈등으로 튀어나온 즉흥적인 정책으로 여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늘 체계적인 계획으로만 발생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폐하. 전쟁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발생할 수 있사옵니다. 승패는 계획이 아니라 그간 축적한 국력을 바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옵니까.”

“막리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외다. 다만, 내 생각이 다를 뿐이오. 그렇다고 국내계나 관료 집단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하오시면 기존의 방침을 그대로 유지하길 바라시옵니까.”

“그게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어찌 고수할 수 있겠소이까. 내가 그렇게 무모하지는 않소.”

그렇다면 새로운 방법이 있다는 의미였다.

“폐하의 뜻이 무엇이옵니까.”

“대군을 출병하리다. 한데, 개입하지는 마시오.”

“폐하. 원안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옵니다.”

“대카간과 수나라가 동맹을 체결했소이다. 그러니 이번에 출병할 대군에 양광을 함께 보내시오. 하면, 색다른 반응이 보여주지 않겠소?”

“예······?”

고양성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큰 틀은 원안으로 유지하며 세부적인 계책을 변경하여 적을 흔들어야 하오.”

“적이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

“물론이오. 혹은 돌궐의 내전이 빠르게 끝날 수도 있소. 하면, 아군은 물러나면 되오. 막리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구려가 돌궐과 대놓고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왜? 지금은 수나라가 물러섰으나 그들의 내재한 국력은 우리나 돌궐보다 분명히 강하기 때문이오. 괜히 다툼으로 그들에게 어부지리를 줄 수는 없소.”

“······.”

고양성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틈이 보이지 않을 때는 보이는 위치까지 다가가야 하는 법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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