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다가오는 패권(2)
187화 다가오는 패권(2)
가시방석을 들고 다니는 의연은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퀭한 눈가는 심리적으로 얼마나 불안하고 위축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어찌 내게 이리도 야박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설마 내가 유학을 익혀서 마음이 상하셨단 말인가?! 아니, 내가 원래 유학자였는데 어찌 이렇게 옹졸하게 하신다는 말인가!’
절대로 평온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초월적인 존재를 소환하여 원망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 보이시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지근찰이었다. 어차피 감정이 들킨 의연은 오히려 티를 내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소승이 간이 작아서 그렇습니다.”
“허. 설마 우리가 패배할까 봐 그러오?”
“아닙니다. 응당 대승을 거두겠지요. 그런데 그냥 소승의 간이 콩알만 한 겁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평소라면 의연의 앓는 소리에 너털웃음을 터트렸을 지근찰이었으나 되려 표정이 굳어졌다. 말처럼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사.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소.”
“소승이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응당 아군이 대승을 거두겠지만 시일이 길어질수록 좋을 수는 없소. 그래서 대사가 해줄 일이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지난날 대사가 아파가한을 완벽하게 속이지 않으셨소? 이번에 그를 교란할 방법은 없겠소?”
아파가한 대라편은 돌궐의 내전이 발생했을 때 고구려가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뒤를 공격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연의 계책에 불과했다.
‘지금 아파가한을 교란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거절할 방법도 없다. 수용하지 않으면 지근찰이 어떻게 돌변할지 가늠도 할 수 없다.’
진퇴양난의 순간이었으나 한편으로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돌궐의 내전은 시작됐다. 그렇다면 내 역할은 다한 것이다.’
그렇다면 달리면 말 위로 일단 몸을 던지면 될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의연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묘안이 없겠습니까. 소승이 기필코 찾아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떠올린 게 있소.”
“무엇입니까.”
“대카간께서 고구려와 손을 잡았다고 하면 아파가한도 당혹스럽지 않겠소?”
이미 수나라와 동맹을 체결했는데 고구려까지 손을 잡았다고 한다면 아파가한 대라편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외교적 우위로서 압박을 가하자는 말이었다.
정말 아무런 효과도 볼 없는 하책이었다. 의연은 정말 힘겹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있겠지만 당장은 어떤 힘을 낼 수는 없을 겁니다.”
“하하하! 과연 대사께서는 확실한 아군이셨소.”
“대인······?”
“아. 불쾌했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정세가 워낙에 어지러우니 대사를 다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소.”
그러니까 일부러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언급해서 반응을 살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건 심계가 얕은 사람이라면 지근찰의 말에 일단 동의하는 척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정말 묘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상황상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인 것도 분명하니 말이다.
천만다행으로 의연은 덫을 피해 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네놈은 필시 망할 것이다. 왕 대인보다 흉악한 놈.’
속으로 지근찰을 대차게 욕한 의연은 겨우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소승을 의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돌궐에 있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너그럽게 이해해주니 참으로 고맙소. 그래. 곧장 아파가한에게 가야겠지요?”
“휴. 그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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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소식을 전해 들은 주라후는 탄식했다. 되새길수록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거늘······.”
고구려와 돌궐 아파가한의 공격으로 수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노출되었다. 만일, 이때 수만의 대군으로 북진했다면 수나라의 숨통을 끊기 어려웠을지라도 엄청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진은커녕 한 치의 땅도 확보하지 못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부족하여 폐하를 설득하지 못했소.”
소마가의 자책에 주라후는 고개를 저었다. 탓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공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폐하께서 간신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시니 참담할 뿐이오.”
물론 황제가 무능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으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주라후는 답답한 속을 이길 수 없었는지 쉬지 않고 한숨을 내뱉었다.
소마가 역시 보조를 맞추듯 한숨을 쉬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위기에서 벗어난 수나라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소?”
“수나라 황제는 북방과 동방이라는 두 개의 전선을 경험했소. 결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외다. 하지만, 이대로 굴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오. 그러니 어쩌겠소? 힘을 더 키워야겠지요. 그의 말발굽은 필시 우리 진나라로 향할 것이오.”
“휴. 그렇겠지요?”
소마가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수나라 황제 양견이 이대로 굴복하고 머리를 숙이고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주라후가 다른 의견을 내주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품었을 뿐이었다.
“수나라 황제는 힘이 있다면 두 개가 아니라 더 많은 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무조건 본국을 공격할 것이오. 그런 뒤에는 돌궐과 고구려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니 말이외다.”
주라후의 말에 소마가는 고개만 끄덕였다. 실제로 가능한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수나라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막을 수 있겠소······?”
“······.”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나라가 대대적으로 남진한다면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꾸준하게 북진을 주장한 것이었다. 아니, 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수나라의 발목을 잡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엉망이 되었지만 말이다.
소마가는 냉정하게 정세를 분석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돌궐은 내전에 휩싸였고 고구려는 북평의 점령에 만족하고 있소. 돌궐은 다투느라 수나라의 행보에 제동을 가할 수가 없고, 고구려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이외다. 결국, 우리가 독자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쉽지 않소.”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지 않겠소?”
“공께서 묘안이 있으시오?”
“어차피 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소. 하면, 수나라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동맹을 확실하게 세워야지요. 안 그렇소?”
“고구려를 뜻하시오?”
“그렇소. 지금이라도 사신을 보내서 다시 의기투합해야 하오.”
주라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설득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간 진나라의 공세가 미진했기에 고구려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고구려에 기대는 방법이 유일했기에 소마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동의하실 것이오. 물론, 본국이 고구려 태왕을 책봉하는 식의 위계를 보여주는 외교라고 해야겠지만 말이외다.”
“사신단만 잘 설득하면 순탄하게 해결할 수 있소. 고구려의 왕도에서 발생하는 일을 우리 황도에서 세세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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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푸석해진 양견의 입에서는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며칠째 물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잠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천하의 주인이 되겠노라고 세상을 향해 포효했건만 지금 꼴이 너무 비루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천운으로 황도의 함락이라는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황제의 좌절을 지켜보던 소위는 몇 번이나 입을 들썩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폐하. 아직 끝이 아니옵니다. 여전히 폐하의 위력은 천하의 중심이옵니다. 와신상담하셔야 하옵니다.”
“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돌궐에는 세폐를 바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오. 한데, 나의 위력이 천하의 중심이라. 하하하. 공은 어찌하여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오? 참으로 민망하오.”
“폐하. 결과만 보시옵소서.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돌궐의 분열이 시작되었사옵니다. 북방이 혼란스럽습니다. 더불어 고구려는 승리에 취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어찌 틈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소위의 분석은 냉정했다. 하지만, 양견은 쉽사리 좌절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기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폐하.”
“그만하시오. 나는 좀 쉬고 싶소.”
양견이 축객령을 내렸으나 소위는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만일,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수나라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돌궐의 내분이 끝나고 하나의 세력으로 다시 공고하게 뭉친다면 위세가 하늘을 찌를 것이옵니다. 여기에 고구려까지 위협을 가할 것이니 본국의 앞날이 어둡사옵니다. 만에 하나 진나라까지 감히 경거망동한다면 대체 어찌해야 하옵니까. 폐하.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부디 굳건하게 일어서시옵소서.”
“······.”
“폐하.”
“그러면 내가 묻겠소. 지금 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 대군을 일으켜서 진나라 정벌이라도 단행하자는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우리가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건 진나라 정벌이 유일하옵니다.”
“돌궐과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결과 수만의 장병이 죽거나 다쳤소. 한데, 무슨 여력으로 다시 정벌을 감행하오?”
양견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진나라가 허약한 건 사실이오. 그러나 대국인 것도 사실이오. 고작 수만의 병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외다. 오랜 세월 분열이 끝나지 않은 건 절대 우연이 아니오.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진나라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힘을 비축해야 하는 것이었소.”
“······.”
“하지만, 우리는 진나라를 도모할 힘을 모두 상실했소. 내 말의 뜻을 알겠소?”
그간 돌궐로 보내던 세폐를 주저한 건 절대 괜한 짓이 아니었다. 세폐를 바치면 변방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으나 국력의 팽창을 포기해야 했다. 남쪽을 정벌할 힘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견은 위험할지라도 세폐를 보내지 않고 힘을 비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완벽하게 틀렸고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외교의 실패가 국력의 약세를 가져왔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양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그의 의지를 모조리 꺾어버린 것이다.
“폐하.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또 무슨 말이오?”
“돌궐과 손을 끊어내시옵소서.”
“······.”
이미 몇 번이나 약조를 어겼기에 조롱이 된 수나라였다. 이번에도 세폐를 보내지 않으면 수나라는 누구도 대화하지 않으려고 할 게 뻔했다.
지금도 이미 대화가 통하지 않는 나라로 규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소위가 다시 이 길을 가자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