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다가오는 패권(1)
186화 다가오는 패권(1)
중국 전선의 대승은 고구려를 열광시켰다. 단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영토를 확보한 수준이 아니라 수나라 황태자를 인질로 삼을 정도의 대승이었기에 관민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평양 도성에서 먹물을 먹은 사람 중 인질이 진짜 황태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와 수나라 모두 서로 대충 발연기하면서 넘어간 것이다. 우리도 알고, 수나라 애들도 우리가 안다는 걸 알고.
아예 가짜를 데려왔으면 판이 엎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일단,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기도 했다.
아니, 황태자보다 더 좋은 조건의 인질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정체가 아주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이황자라고 하셨소?”
“그렇소.”
발연기가 하기 싫었는지 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질은 나를 보자마자 시원하게 진실을 말했다. 그래서 놀라운 정체를 들은 나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역사에 무지할지라도 양광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수양제의 이름이 바로 양광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하늘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고구려에 쏠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작정하고 일부러 몰아준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어떻게 하늘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고구려에 쏠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몰아준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황태자가 아니라는 걸 밝힐 줄은 몰랐소.”
“어차피 고구려에서도 다 알고 있는데 이게 편하지 않겠소? 물론, 그 또한 절차적인 부분이기에 고수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영 불편하오.”
“음. 그렇지요. 절차적인 부분이지요. 왜냐면 우리가 수나라에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으니 말이외다.”
“압니다. 한데, 그게 가능하기는 하겠소? 본국에서 나를 인질로 보냈다는 건 황태자가 아니라서 죽어도 된다는 뜻이외다.”
양광은 여유까지 부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를 이용한 압박은 내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만일, 공식적으로 항의했다가 본국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고구려만 손해가 아닙니까. 사용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을 아예 상실하는 것이니 말이외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봤나.
사실 황태자를 죽이겠다고 압박하는 것과 ‘우리를 속였다고?!’라며 따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자의 경우 수나라가 아예 무시할 수도 있었다.
이번 결과가 우리의 압도적인 국력으로 일궈낸 게 아니라 정세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순간 수나라는 언제라도 눈을 부라리면서 우리를 노려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공께서는 오히려 더 반기는 것 같소만.”
“아.”
내가 표정 관리를 못 했구나.
하긴 꿈틀거리는 입술이 너무 티 났을 것 같기는 했다.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그래요. 하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특별하게 바라는 게 있소?”
“오면서 그냥 그런 생각을 해봤소. 내가 살아서 돌아간들 사는 게 사는 건 아닐 것 같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많은 이의 눈동자에 담긴 의심을 견뎌야 할 것이니 평생 눈치를 보고 숨어 살아야 하지 않겠소? 나는 싫소. 그런 삶은.”
역시 백만 대군으로 지옥을 향해 돌격했던 폭군답게 패기가 넘쳤다. 야심만만한 양광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대륙의 운명이 바뀐다는 걸 알기에 차분하게 생각을 다시 정리해봤다.
그냥 죽일까?
사실 이대로 양광을 아예 보내버리는 게 가장 베스트이긴 했다. 이리하면 원 역사에서 보인 압도적인 위협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내가 그런 호의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소만.”
“당연히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오. 설마 도움을 받고도 모르쇠로 일관하겠소?”
“모르시오? 수나라가 얼마나 신뢰를 잃었는지 말이외다. 내가 공을 어찌 믿소이까.”
“그건 대인의 선택이 아니겠소?”
정말 패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의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지요.”
급할 건 없었다.
그러니 오늘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지도가 펼쳐졌다. 엄밀히 따질 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양광을 어떻게 요리할까가 아니라 미친놈처럼 급변하는 북방의 정세였다.
나는 지도 위를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상황이 어떤가.”
고식은 손가락을 멈추며 나를 쳐다봤다.
“대카간이 대군을 일으켜 아파가한을 공격했습니다.”
“수나라 황도를 압박하던 대군이 퇴각했겠군.”
“애석하게도 그리되었습니다. 정말 애석한 일이지요.”
동맹군을 형성한 아파가한의 공격은 수나라의 국운을 위협할 정도였다. 돌궐이 모조리 동원된 것도 아닌 일개 가한의 공세가 이 정도 위력을 발휘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상황이 묘하게 되었습니다. 돌궐의 가한 중 가장 강성한 달두가한이 아파가한을 지원했습니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건 정말 복잡하고 위대한 일이었다. 현재 돌궐이 아파가한과 달두가한을 중심으로 한 서돌궐, 대카간을 중심으로 한 동돌궐로 첨예한 대립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토록 기다리던 돌궐의 대분열이 도래한 것이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서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는지 모르겠다.
“하면,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필히 있어야 할 것이네.”
“음.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동과 서로 분열되었는데 개입할 수 없다니?”
“휴. 생각보다 돌궐 내부의 전선이 단조롭습니다. 이합집산이 아니라 동과 서의 대립으로 구축되었으니 말입니다.”
“하면, 돌궐이 분열했는데 그냥 쳐다만 봐야 한다는 건가?”
“표현하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돌궐을 동과 서로 분열시킨 것도 그간 우리의 외교와 노력의 결실이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인데 왜 그렇게 아쉬워합니까?”
“아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대번에 개입해서 북방을 집어삼켰다면 더 좋은 것이니 말일세.”
우리의 원대한 꿈은 북방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진 상황은 애석하게도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원 역사와는 다른 세계대전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설령 억지로 개입한들 얻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고작 두 개의 세력으로 분열된 것이니 우리가 힘써 보태더라도 승리한 세력이 북방을 도모하게 될 상황이니 말입니다.”
“허. 최악이로군.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는 건가?”
“거. 말씀을 왜 계속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단조롭게 개입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충분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분열의 종식을 막아야지요. 잊으셨습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도 명분이 충분한 상황입니다.”
고식의 말대로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을 했다. 단적으로 아파가한이 승기를 잡아서 대카간을 집어삼키면 서둘러 출병하여 처라후를 지원하면 된다. 반대로 대카간이 아파가한을 이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떻게든 아파가한과도 동맹을 체결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대카간 아사나 섭도와는 확실한 적대 세력이었기에 행보는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결과적으로 고식은 두 개로 분열된 돌궐의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개입할 방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아예 사분오열된 게 아니라서 너무나도 아쉽지만, 현재 결과가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충분히 성공적이었고, 어쩌면 초안이 너무 거대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 그런데 양광은 어찌하실 겁니까?”
듣고 있던 연자유가 쓱 끼어들더니 대뜸 수나라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답했다.
“금의환향을 도와달라고 하더군.”
“제정신이 아니군요.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없긴 한데 양광이 수나라를 자중지란에 빠지게 할 수도 있을까 싶어서 고개는 끄덕여줬네. 북방의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수나라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나?”
나의 태연한 답변에 연자유는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다소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형님. 양광은 귀국하더라도 수나라 조정을 어찌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휴. 결과를 예단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설령 양광이 황위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어찌할지는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배신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간의 수나라가 보여준 행보를 고려할 때 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 겁니다.”
“음.”
“더욱이 우리가 수나라의 황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국세를 가진 건 아닙니다. 천하에 타국을 향해서 이리할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아. 아닐세. 자네의 말이 옳아.”
“한데, 양광의 말에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연자유의 말은 아프지만 너무 옳은 내용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고민한 이유는 양광이 수양제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잘 활용하면 수나라를 내부에서 흔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애초 수양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기만 해도 고구려의 변방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양제가 미친놈인 건 맞다. 그러나 중국이 수양제가 없다고 하여 고구려를 탐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양광을 활용할 방안을 고민할 필요도 있었다.
물론, 견적이 나오지 않을 때 그를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연자유와 대립할 이유도 없었다. 양광이 내일 뭔가를 할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네의 말대로 하지. 그냥 두겠네.”
“속내는 아닌 거 같지만 지금은 그냥 둔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자네 갈수록 내 속을 자세히 아는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네.”
“됐습니다.”
-----
의연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설마 했던 전쟁이 발생했는데 심지어 백중세였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파가한이 이겨도 나를 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의 희망에 왕고덕은 없었다. 이미 신뢰가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왕도로 돌아가는 날 왕 대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말 엄중하게 따질 생각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입에 담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오늘이라도 탈출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지근찰이 나를 의심할 것이니 거동을 함부로 할 수가 없구나.’
부담감과 책임감이 천근만근이었다. 나오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