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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88화 (188/199)
  • 188화 다가오는 패권(3)

    188화 다가오는 패권(3)

    소위는 퇴로를 두지 않았다. 어그러질 만큼 어그러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자면 적아를 분명하게 나눠야 했다.

    물론, 양견의 불편함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하고 직언했다.

    “폐하. 내키지 않으실 수도 있사옵니다. 하오나, 다시 돌궐에 세폐를 바친다면 난처함과 어려움은 불 보듯 뻔하옵니다. 만에 하나 아파가한이 승리를 거두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미뤄뒀던 원정을 감행할 것이옵니다.”

    “······.”

    “우리는 이를 대비하여 힘을 비축해야 하옵니다. 그렇게 천천히 진나라를 도모해야 하옵니다. 부디 신의 충언을 가볍게 넘기지 말아주시옵소서.”

    “고구려는 어찌 하는 게 좋겠소?”

    반대가 아니라 물음이 나왔다. 이는 호의적인 반응이었기에 소위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구려는 이대로 둬야 하옵니다.”

    “······.”

    “돌궐을 견제하고 진나라를 도모한 뒤 고구려를 정벌해야 하옵니다. 그 전에 그들을 싸우는 건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옵니다.”

    소위의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견은 감정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작금의 위기에 가장 큰 역할은 한 건 분명히 고구려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2황자 양광까지 인질로 보냈기에 조금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소위가 이토록 간곡하게 청한다는 건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폐하. 신이 어찌 고충을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이 방법이 유일하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관망만 한다고 자신할 수 있소? 이미 그들은 전과 달라졌소. 만리장성 이남에 깃발을 꽂았다는 말이외다. 지금껏 만리장성 이남의 풍요로움을 맛본 세력 중 더 많은 땅을 탐하지 않은 나라가 있소? 없었소.”

    “신이 고구려를 다녀오겠사옵니다.”

    “뭐요······?”

    양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위의 행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대체 고구려를 만나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오? 본국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에 2황자를 인질로 보내야 했소. 이번에는 무엇을 내밀어 그들에게 구걸할 생각이오?”

    “폐하. 신이 설득할 수 있사옵니다.”

    “어불성설이오. 그만하시오. 더는 국격을 훼손할 수 없소.”

    이미 큰 좌절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혹은 섣부른 판단으로 최악과 만나봤기 때문일까? 양견은 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백 번을 생각해야 하오. 천 번을 고려해야 하오. 그 뒤에 결정해야 하오. 서두르지 마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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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긁으면서 문서를 쳐다봤다. 복잡한 글자가 가득 적혀 있었기에 세세하게 살피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문진. 자네가 간결하게 핵심만 요약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네.”

    “대인. 최근 군사 활동이 과했습니다.”

    “음?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고구려가 군사 활동을 하지 않으면 신라가 하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집약적으로 엄청난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를 충당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고구려 역량 밖이었다는 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오죽하면 제후국에 이자를 대가로 빌려오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동안 묵묵하게 이 악물고 일을 수행한 이문진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상황이 어렵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분간 전쟁은 없을 것이네. 물론 적이 공격해오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선제공격을 감행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네.”

    “휴. 대인. 북방에서 일이 터지면 출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수만의 대군이 움직일 것인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문진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다른 사안도 아니고 농업부의 일이었기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단지 하소연이나 하려고 날 찾아온 건 아닐 것이네. 내가 어떤 수를 내어주면 되겠는가.”

    “진심입니다. 적이 공격해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공세를 감행하는 건 너무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

    “허. 정말 팽창을 반대하러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소생과 농업부는 고구려의 팽창 정책이 위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땅이 더 넓어지더라도 감당하는 건 어렵습니다. 고구려 본토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 말입니다.”

    현재 고구려에서 팽창을 반대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각오였다. 이문진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는지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러나 자네 말대로 북방 진출은 이미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네. 그 외 팽창은 자제하도록 하겠네.”

    지금 와서 북방 진출을 취소하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수백 개의 창칼이 날아올 것이니 목숨이 아깝다면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면 이제 희망적인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간 농업부의 성과가 너무 듣고 싶다네.”

    “아시겠지만 농업이라는 분야는 빠르거나 놀라운 일이 잘 없습니다. 하나의 신농법을 도입해도 1년을 기다려야 결과가 나오니 말입니다. 더불어 실패하는 사례도 많지요. 가령 이앙법과 같은 경우 말입니다.”

    “음. 이앙법이 크게 실패했나?”

    “고구려 본토에서는 어렵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왕도 인근에서는 소기의 성과가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다른 지역은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자면 제후국은 상당한 성과를 봤습니다. 특히 북조 신라가 놀라울 정도로 잘 보급했습니다. 이앙법의 종주국이 북조 신라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겠더군요.”

    “음.”

    이앙법처럼 놀라운 신기술이 우리보다 제후국에 이롭다는 사실에 이문진은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늘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는가.

    “정말 아쉽긴 합니다. 이앙법이야말로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영토를 2배로 늘릴 수 있는 위대한 농법인데 말입니다.”

    “아쉬운 건 됐네. 대안을 수립하기도 어렵겠나?”

    “음. 대인. 1년 농사를 망친 지역이 상당히 많습니다. 다시 1년을 더 강행한다는 건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손해를 본 지역을 챙기느라 상당한 재원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거름도 전폭적으로 지원해줘야 할 상황입니다.”

    평소 경험하지 못한 단호함이었다. 나도 더는 이앙법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아는 한 좋은 소식을 꺼내기로 했다.

    “농법서는 이미 보급되었다고 들었네. 귀족들의 협조가 컸다지?”

    “그렇습니다. 전폭적인 협조로 필사나 인쇄까지 무탈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진행한 신농업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과거 진행한 투자 설명회는 귀족들에게 새로운 이익 창출의 길이 되었기에 능동적으로 운영되었다. 차츰 고구려 농업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었다.

    “잘됐군.”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문진이 눈치를 쓱 보더니 말을 꺼냈다.

    “대인. 소생의 계산이 틀리지 않다면 이대로 5년 정도 큰 전쟁이 없을 경우 고구려는 국고가 넘쳐날 것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아.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나? 아무리 우리가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 달려 나가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대인께서 다른 분들을 잘 설득해주셔야지요. 이제 팽창은 멈추고 내실을 다져야 할 때가 됐습니다. 소생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 부분은 내가 다시 고려해보겠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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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진의 말을 단지 농업의 영역으로만 여길 수는 없었다. 아니, 확실하게 온건파의 노선을 피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농업 생산력이 입증되면서 무리하게 팽창할 필요가 없다는 노선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건 과거 외교 노선을 중시한 국내계와는 아예 결이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의 자체 생산력만으로도 국력을 강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강론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턱을 긁적이며 연자유를 쳐다봤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음. 예상된 수순이긴 하지만 이토록 빠르게 정립될 줄은 몰랐군요.”

    “정립이라고 부를 정도의 수준으로 보나?”

    “형님. 이문진은 뛰어난 학자입니다. 그가 농업부의 일까지 통제하고 있으니 온건 노선이 정립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어쨌거나 기존의 팽창 정책이 아직 결과를 도출하지 않았는데 고개를 들었다니 난처한 건 사실입니다.”

    내 생각대로 연자유는 이번 사안을 상당히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온건파의 등장 자체가 아니라 시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주된 논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이문진의 근거가 아예 틀린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의 주장을 가볍게 치부하거나 팽창 정책의 당위성으로만 짓누른다면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문진이 제시한 문서에 의하면 분명 고구려는 더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하니 말일세. 이를 무시할 수는 없지.”

    “형님께 의사를 전달한 건 최대한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그러나 수용되지 않는다면 파급이 쉽사리 끝나지는 않겠지요. 이 또한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이보게. 걱정만 하지 말고 어찌할지 논의하는 게 좋지 않겠나?”

    “휴. 쉽게 방안을 모색하기 어려우니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연자유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난처함을 피력했다. 나도 입맛을 다시면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문진의 노선은 단지 팽창을 멈춘다고 하여 수그러들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즉, 앞으로 고구려는 팽창을 중시하는 귀족과 자강을 주장하는 관료들의 대립이 첨예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일국의 노선이기에 늘 같은 목소리만 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가 경험하지 못한 논쟁이었기에 근심이 깊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공론화하는 건 어떤가?”

    “터트리자는 겁니까?”

    “그렇지.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닐세. 그러니 이 일을 귀족들에게도 전하여 고민을 던져주는 걸세.”

    “음. 귀족들이 눈을 부라리며 이문진을 죽이려고 할 겁니다. 형님. 그의 노선이 단지 전쟁만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약탈까지 무산시킬 것이니 말입니다.”

    “알지. 그러니 귀족도 제대로 고민해야 한다는 말일세. 무엇이 고구려의 내일에 도움이 되는지.”

    뛰어난 정객인 연자유조차도 쉽사리 답할 수 없을 정도로 이문진의 노선은 논리적으로 탄탄했다.

    이 문제를 단지 위계로 짓누르는 건 절대로 좋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가. 내 말대로 해보겠는가?”

    “음. 그러지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곧장 폐하께 고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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