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85화 (185/199)

185화 고수전쟁(4)

185화 고수전쟁(4)

장손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경은 우격다짐으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황명이라는 최고의 권위조차도 작전상 판단이라는 명분으로 넘기니 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선에서 퇴각을 감행하는 병력을 보며 홀로 분을 삼켰다. 하지만, 이리하는 게 사치가 되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공세라는 건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라는 걸 말이다.

공격할지 물러날지는 수나라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고구려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현재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수나라군은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몇 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진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이어 패배했다.

물론, 그 역시 많은 전투를 거치며 승전을 일궈낸 장수였기에 불필요한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당면한 난제의 극복을 위해서 최대한 지혜를 쥐어짜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구려군을 만나겠소.”

그가 꺼낸 건 협상이었다. 고경은 한숨을 쉬며 장손람을 쳐다봤다.

“가능하겠소? 고구려군이 수용할 리가 없을 것이외다.”

“패색이 짙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이외다. 하지만, 고구려군도 총력전을 펼치기에는 부담스러우니 시간을 끄는 게 아니겠소? 물론, 승기를 잡았기에 협상에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오. 그런데도 해야지요. 이대로 패배를 기다릴 수는 없으니 말이외다.”

“······.”

“다른 건 다 필요 없소. 이길 수 없다면 전력을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소?”

“그들을 설득할 묘안이 있소?”

“······원하는 걸 다 내어주는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구려가 우리를 얼마나 신뢰할지가 아니겠소?”

“······.”

이미 수나라는 대외 정책에 있어서 너무도 많은 신뢰를 잃었다. 이러한데 고구려가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요구를 수용한다고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고구려를 설득해야 했다. 방법은 이것 외에는 없었다.

장손람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남은 수는 배수진이겠지요.”

“공을 믿고 기다리겠소.”

“끌.”

-----

고정의는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정말 놀라워서 감탄사도 나오지 않았다. 휘둥그레진 그의 눈동자에 현 상황에 대한 불신이 가득 담겨 있기도 했다.

“허허허. 설마 다시 협상하러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소. 보이시오?”

“······.”

고정의의 말대로 고흘을 비롯한 무장들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장손람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협상에 응했다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게 아니겠소?”

“이거 오해하셨구려. 정말 놀라서 응한 것이오. 다른 의도는 없소. 아. 설마 아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포위에 그친 일로 오해한 것이오? 그러면 내가 허심탄회하게 설명해주리다. 우리는 이 전쟁을 일찍 끝낼 생각이 전혀 없소.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유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외다. 왜? 그래야만 돌궐이 귀국을 곤경에 빠트리니 그렇소.”

고정의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돌궐이 맹위를 떨치면 좋은 일이지만, 고구려 역시 보급선이 길게 형성된 현 전선을 장기간 유지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두 가지의 가치 판단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수나라군을 붙잡아 두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건 사실이었다. 여기에 빈틈이 보이면 공격을 감행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손람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협상의 여지가 좁아진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속을 다스리며 말을 꺼냈다.

“무슨 조건일지라도 수용하겠소.”

“그러니까 우리가 왜 신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귀국에게 조건을 제시해야 하오? 반면, 아파가한은 다르지요. 본국이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는 자명하지 않소?”

“이번은 다르오.”

“하하하. 이보시오. 처음 돌궐과 약조를 어겼을 때는 수나라의 뜻대로 천하가 움직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오. 하지만, 아니었지요. 결과 아파가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소. 본국과의 약조를 어겼을 때도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이오. 하지만 아니었소. 내 말의 뜻을 알겠소? 아무리 창칼을 겨누고 싸우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외교의 협상으로 결정된 건 무조건 지켜야 하오. 한데, 수나라는 이런 기본도 갖추지 못한 나라요. 하늘 아래 수나라의 말을 신뢰하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을 것이오. 이건 귀국의 선택이 만든 결과요.”

고정의의 신랄한 말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그러나 장손람 역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구려 역시 간계를 펼쳤소. 어찌 그리 말하는 것이오?”

“알겠소. 그런데 이 대화를 더 해야 할 이유가 있소?”

“······.”

“이만 가보시오.”

“어찌하면 내 말을 믿을 것이오?”

절박함이 가득한 말이었다. 고정의는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북평은 고구려의 영토이며 수나라는 주기적으로 세폐를 바쳐야 하오. 세폐가 내키는 건 아니지만, 일국의 국력을 갉아먹는 방법으로는 참으로 적절하다는 걸 깨달았소.”

“다 수용하겠소.”

“그런데 다시 원점이외다. 나는 귀국을 믿을 수 없소. 그러니 어찌하겠소이까. 믿음을 주셔야겠소.”

“어찌하면 되오?”

“수나라의 황태자를 인질로 보내시오.”

“이, 이보시오! 어찌 그런 조건을 수용하라고 할 수가 있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외다.”

“수용할 수 없다면 가보시오. 나의 조건은 바뀌지 않을 것이니까. 아. 아군이 철수하는 건 황태자가 왔을 때요. 설마 말만 믿고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지는 마시오.”

고정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면 배수진을 준비하셔야 할 것이외다. 아시겠소?”

“······.”

-----

담대한 양견이었으나 최근에는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선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

“결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

소위는 애가 탔다.

현재 수나라의 국운이 위태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고구려 전선이라도 승기를 잡았다면 어떻게든 버텨보기라도 할 것인데 이 또한 아니었다.

남은 유일한 희망은 대카간의 병력이 아파가한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시일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대카간이 막상 움직이지 않으면 수나라는 황도가 짓밟힐지도 몰랐다.

“폐하.”

“하. 그렇다고 하여 어찌 황태자를 인질로 보낼 수 있소이까.”

소위 역시 고구려의 요구가 너무나도 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용하지 않으면 돌궐을 방비할 수가 없었다.

“어찌 폐하께서 옥쇄를 각오하시옵니까. 이는 장수의 일이옵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

“모든 책임을 신이 가져갈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황명만 내려주시옵소서.”

“······.”

양견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이미 마음은 기울었으나 차마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소위는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했다.

“폐하. 다른 황자를 보내면 어떻사옵니까.”

“고구려가 속겠소?”

“그들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만에 하나 누군가를 인질로 보내야 한다면 차기 지존인 황태자가 아니라 황자여야 한다. 양견 역시 이를 계속 생각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다른 이를 보내는 건 어떻겠소?”

“폐하. 고구려가 그런 수에는 속지 않을 것이옵니다. 필시 여러 질문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할 것인데 속였다는 게 들킨다면 상황은 최악을 번질 수도 있사옵니다. 혹여라도 고구려가 황도로 공세를 펼치면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그들이라고 하여 어찌 돌궐처럼 맹위를 떨치지 못하겠사옵니까.”

소위의 완강한 반대에 양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황자 중 누구를 보낼지를 결정하면 논의는 마무리가 되는 것이었다.

소위는 양견의 고민이 길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말했다.

“2황자가 적합하옵니다.”

“허.”

“2황자는 총명하기에 황태자로 위장하기에 가장 적합하옵니다. 폐하. 시간이 없사옵니다.”

“······그리하겠소.”

양견은 고통스러운 침음성을 내뱉었으나 끝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에도 2황자 양광이 아니고서는 황태자의 역할을 대신할 황자는 없었다.

-----

양광은 부드럽게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도 평온했고 자세는 참으로 공손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에 소위조차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적국에 포로로 가는 일이며, 언제 귀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이토록 태연할 수가 있는가.’

의연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본국의 운명이 벼랑 끝에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께서는 황태자로서 황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 어찌 고구려에 가실 수 있겠습니까. 응당 내가 대신하는 게 맞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음. 한시가 급하니 시일을 끌지 말고 당장 채비하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인이 보필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폐하께서는 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황도에 남아서 폐하를 보필하세요. 그게 맞습니다.”

소위는 다시 감탄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2황자가 황태자였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준비는 마무리하겠습니다. 그전까지 편히 쉬고 계십시오.”

“예. 황도에서 누리는 마지막 호사이니 마음껏 즐기겠습니다.”

소위는 재차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양광 역시 웃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

소위가 나간 뒤 양광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그의 눈빛 역시 차가웠다. 아니, 독기까지 품어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모습은 아예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 나를 인질로 보낸다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처음 소식을 접해 들었을 때 욕이 치밀어 올랐다. 만에 하나 악을 써서라도 상황이 바뀐다면 백 번이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남이라는 이유로 황태자가 아닌 것도 한스러운데 대신하여 인질이나 하라니.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아니, 화가 났다. 할수만 있다면 칼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 한 번 두고 봐라.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며 금의환향할 것이다. 나를 고구려로 보낸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복수의 다짐으로 승화시킨 양광은 다시 웃었다.

절대로 다수의 앞에서 표정을 굳히거나 누가 볼 수도 있을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은 지금도 고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