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66화 (166/199)

166화 고구려, 고려를 입다

166화 고구려, 고려를 입다

귀족의 관료화라는 게 말은 거창한데 실상은 별 내용이 없었다. 그냥 귀족도 관복을 입으려면 과거 시험을 치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전보다 불편할지라도 반대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발의자가 나라는 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와 공은 고구려 최고의 귀족이오. 우리가 합의하여 동시에 발의 추진한다고 한다면 누가 반대하겠소?”

만일, 차세대 대표주자인 이문진이 같은 내용을 발의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동시에 유생은 모두 죽을 수도 있었다.

이건 정말 나라서 멀쩡할 수 있는 희대의 개혁 입법인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로 우리 후대가 가장 큰 손해를 볼 것인데 말이외다.”

내가 한 말이지만, 정말 청산유수였다. 심지어 완벽한 논리 구조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물론, 고정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기에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쉽지는 않았으나 해낼 수 있었다.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소.”

“오. 무엇이오?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소.”

“평양계가 대대로 근왕파로서 존재한 건 태왕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는 게 아니었소. 태왕을 보필하여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하는 게 목표였소.”

“음. 부정하지 않겠소.”

“하여, 평양계가 말하는 왕권 강화는 태왕의 권한 자체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태왕을 보필하는 평양계의 힘을 키워 왕권이 거대하게 보이게끔 하는 것이었소.”

사실 고구려 왕권은 늘 비슷한 수준이었다. 강대한 왕권이 구축되는 건 평양계 귀족이 얼마나 힘을 키우고 갖추느냐로 귀결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국내계 귀족과 성향 자체가 다른 건 아니었다. 그저 노선의 차이가 발생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해서 누구라도 태왕이 되어 국내계와 화합하고, 평양계와 적대한다면 근왕파라고 불리는 세력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토록 도박성 짙은 통치 행위를 할 태왕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체 공의 길은 무엇이란 말이오? 어째서 귀족의 힘을 약화하고 왕권을 구조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이오?”

관료제만 해도 왕권이 강해진다. 여태껏 낮은 수위의 관료제를 귀족들이 묵인한 건 왕권의 팽창 수준만큼 귀족의 힘도 강대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순수한 왕의 힘과 귀족의 가진 힘은 전체 파이가 커질 뿐 비율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내가 말한 것처럼 귀족의 관료제를 꾀하는 건 사정이 아예 달랐다. 귀족이 가진 힘을 왕이 흡수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왕권 강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정의의 의문은 당연했다.

나 역시 귀족 of 귀족에 속하는데 권력을 태왕에게 송두리째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고정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공이 왕은 아니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달리 묻겠소. 공은 고구려의 내전을 종식할 방안이 있소?”

“내전의 발발로 인한 국력의 소모를 우려하여 왕권이 귀족을 억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오? 왕 막리지. 이번만 해도 우리는 피를 보지 않았소.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했을 뿐이오.”

“그게 더 문제요. 차라리 내전이 낫소.”

“무슨 말이오?”

고정의가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시절 고구려인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사고방식이 나와는 아예 다른 것이다.

“귀족을 규합하여 조세를 거부했소.”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조세를 거부하는 건 우리의 온당한 권한이었소. 한데, 내전보다 과하다는 건 대체 어찌 된 영문이오?”

“그게 문제라는 말이오. 거병한다면 화끈하면 창칼을 휘두르며 승패를 가르면 되오. 한데, 조세 거부는 대체 무엇이오? 합당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나라를 통째로 흔들었소. 만일, 공이 아니라 고약한 인사가 수장이었다면 어찌했을 것 같소? 뜻을 이루기 전에는 고구려의 대외 정책을 모두 중단시켰을 것이오. 내치도 당연할 것이외다. 왜? 자신의 이권 혹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오.”

조세 거부의 칼날이 휘둘러질 동안 태왕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예 존재감이 상실된 것이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귀족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사상 초유의 파업을 감행했는데도 싫은 말조차 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번 사태가 말하는 건 아주 간단하오. 귀족의 고유 권한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오. 이 과정에서 태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입증되었소. 사안이 이토록 심각한데 공은 피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자평하고 있소.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번 대립은 고구려의 문제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새로운 길로 가는 흐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고구려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공이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귀족이 고구려를 흔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의 시초가 되었소.”

고정의는 귀족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선구자가 된 것이다. 뛰어난 정치력이 고구려의 수명을 단축하는 괴물을 세상에 꺼낸 것이다.

“이토록 엄중한 사태를 마냥 바라볼 수는 없소. 필히 경계해야 마땅하오. 나라고 하여 귀족의 권한을 내려놓고 싶겠소? 한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이외다.”

“뭐요······?”

“아니, 말이야 바른말로 수조권 막으려다가 관료제를 하게 된 것이오. 이 일을 어찌해야 하오?”

고정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했다.

“혹시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타당하면 따르리다. 아. 물론, 귀족의 양심과 전통의 준엄함에 모든 걸 맡기자는 말은 사양하겠소.”

“······.”

“문이 열렸는데 양심에 따라서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은 의미가 없소. 무조건 문을 못질해서 닫아야 하오. 고구려에 필요한 건 바로 이것이오. 그러니 어서 제안해보시오.”

“······.”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하오. 서두르시오.”

고정의의 볼이 씰룩거렸다.

기분이 별로일 것이며, 내 말은 더 별로일 것이다. 게다가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할 것이니 아주 짜증이 난 상태일 것이다.

“어떻소? 제안을 수용하겠소?”

“애초 반대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구려.”

“그렇소.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오. 한데, 가능하겠소?”

“됐소. 지금 내전을 일으키는 건 수나라에 고구려를 헌납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내가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하지는 않소.”

“외부의 위협은 내정 개혁에 큰 도움이 되는 법이오. 다른 나라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고구려는 분명 그렇소.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이 아닐 수 없소이다.”

정말 고정의로서는 방법이 없다. 이를 거절하면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쁜 말을 투척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물리력을 동원한 뒤 다시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며 관료제를 강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정의는 한숨을 크게 쉬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대로 대화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정의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 귀족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을 수는 없소.”

“나 역시 그렇소. 나 역시 귀족인데 어찌 손에 든 과실을 섣불리 내리는 개혁을 하겠소?”

“시끄럽소. 어쨌거나 조정에 출사하는 방법이 과거제도만 있는 건 곤란하오. 이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합의를 보더라도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 분명하오.”

“그래서 생각해둔 것이 있소. 이름도 정했소.”

“어떤 것이며, 무엇이오?”

내가 고구려에 와서 조선 수준의 관료제를 바란다면 정말 미친놈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늘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가진 지식의 수준에서 조선의 대안은 역시 고려였다.

“5관등 이상의 고위 귀족은 승계가 가능하오. 이를 음서라고 하오.”

고려는 분명 귀족의 나라였다. 하지만, 과거로 출사하는 사대부도 존재했다. 작금의 고구려가 가야 할 방향은 딱 이 정도였다.

명분만 있으면 조세 거부가 합법적인 나라에서 고려 수준의 관료제는 세상이 바뀌는 수준이라는 건 분명하다. 즉, 이 시절 고구려가 고려의 옷을 입는 건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나는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소. 내가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

“어떻소?”

“하······.”

고정의는 긴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의 대화와 타협이 고구려를 새로운 길로 이끈 것이오. 나는 너무 자랑스럽소.”

나의 설레발에 고정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최고 통치자에게 보고했다. 예상대로 고양성의 표정은 고정의 만큼이나 오묘했다.

이유도 알고 있지만 길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태왕에게 유리한데 구태여 내가 구구절절 말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폐하. 신의 의도를 고려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펼쳐진 현상만 바라봐주시옵소서. 고구려의 왕권이 귀족의 힘을 취하게 된 것이옵니다. 이는 고구려의 천년에 없었던 쾌거가 분명하옵니다.”

“하나만 묻겠소.”

“이르시옵소서.”

“수조권도 이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제도였소?”

“기본 방향은 그렇다고 생각하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탈은 발생했을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작금의 고구려에는 꼭 필요한 방책이었사옵니다.”

“음.”

“아쉬워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이미 시행할 수 없는 방책이옵니다.”

“아.”

고양성은 포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해하셨소. 아쉬운 게 아니었소. 그저 내가 놓친 강점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한 것이오. 어쨌거나 막리지의 말대로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생각하지 않겠소.”

“황공하옵니다. 하옵고 폐하.”

“다른 일이 있소?”

“일전에 서토인의 거주지에 우리 백성이 들어간 일이 있었사옵니다.”

“그랬지요. 혹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소?”

“그러하옵니다.”

일전에 중국인의 거주지에 우리 백성을 보내어 정착시켰다. 이는 그들을 고구려로 동화시키기 위한 저돌적인 테스트였다. 그리고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됐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동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게 입증되었사옵니다. 이는 서토인들이 점차 고구려식 가옥을 지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사옵니다.”

고구려와 중국의 민가 건축술 중 무엇이 더 뛰어난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고구려든 중국이든 환경에 따라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폐하. 고구려식으로 동화는 가능하옵니다.”

“한데, 달리 말하면 북평은 동화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소?”

“아니옵니다. 그들의 기술을 배우는 우리 백성은 서토의 말을 익혔사옵니다. 반면, 우리의 농법을 배우는 서토인은 고구려 말을 익혔사옵니다.”

가볍게 들으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자세를 낮추고 경청하는 게 세상의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였다.

“본국의 풍요로움이 북평의 백성을 고구려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유력한 단서이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