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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65화 (165/199)

165화 또 다른 개혁(4)

165화 또 다른 개혁(4)

턱을 긁적였다.

볼도 긁적였다.

머리까지 긁적였다.

고정의의 대처가 너무나도 파격적이고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귀족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북방 정책을 책임지겠다는 패기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보게.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 바로 이런 일에 우리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일세.”

“대인······.”

“아니, 왜 그런 표정을 하면서 날 쳐다보나? 혹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한 것인가?”

의구심이 가득한 내 말에 이문진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왜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허. 이 사람아. 태평하다니? 나는 순수하게 좋은 건 좋다고 말한 것일세.”

“대인.”

“잘 보게. 고 막리지가 저열한 계책으로 상황을 복잡하게 꼬았다면 욕해야지. 한데, 고구려 귀족의 품격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정치를 펼치고 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

“내 말이 틀렸는가?”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부상소의 기세도 꺾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고 대인의 뜻대로 될 겁니다. 소생은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진심이라서 바로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문진의 눈을 쳐다봤다.

“우려할 필요 없네. 말 그대로 고 막리지의 수가 놀랍다는 말 그 자체였으니 말일세.”

“호,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농업 정책을 추진할 때 이문진은 가히 철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일 처리와 미래를 대비하는 혜안까지 깔끔했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이문진은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눈 껌뻑이면서 버벅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걸 왜 내게 묻나?”

“예?”

“자네는 아직도 이 싸움이 나와 고 막리지의 싸움으로 보고 있나?”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일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이는 신구의 싸움이라고. 굳이 따지면 나도 구세력에 속하지 않나?”

“······.”

“이런. 이번 싸움은 유생과 고 막리지의 싸움이라는 말을 하는 걸세. 그러니 내가 더 할 건 없네. 그저 지켜볼 뿐이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유생들도 밥그릇은 알아서 챙겨야지. 그리고 고 막리지의 기가 막힌 한 수는 궁극적으로 내게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일세. 그래서 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네.”

“······.”

“그저 하루라도 빨리 귀족들이 처라후에게 군량을 보내길 바랄 뿐이네. 아주 간절하게 말일세.”

나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안학궁을 다녀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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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상소가 휘둘렀던 대의와 명분은 모조리 박탈당했다. 하늘을 찌르던 도끼의 기세는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소생들의 요구는 조세 거부의 철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안을 제시했다고 하여 요구가 바뀔 수는 없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지부상소는 이어졌다. 오히려 더 격렬하고, 구호도 간결해졌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도끼를 휘두르는 그들의 모습에서 물러섬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고정의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여유로웠다. 물론, 표면상 그리 보일 뿐이었다. 곁 눈길로 그를 살피던 고식은 의아하여 물었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데 고민이 깊어 보입니다.”

“실은 대치가 길어지고 있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물론, 원하는 걸 얻으려면 시간을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도 조세 거부라는 강수까지 뒀는데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렇긴 합니다만 반응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생들의 지부상소가 아무리 힘을 발휘할지라도 왕고덕이 직접 나서는 경우와는 차이가 컸다. 그리고 지금껏 그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결과, 고구려의 조세 거부까지 선언되었는데도 첨예한 대립은 없었다.

“그래서 더 의문이지 않나? 왜 왕 막리지는 이토록 침착하고 조용한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나서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 그의 행보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걸세.”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식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대인!”

숨이 넘어갈 듯 황급히 달려오는 귀족이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큰 변고가 터졌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폐하께서 평양 도성과 한수의 도로 역사의 중단을 이르셨습니다.”

“뭐라······?”

“게다가 남쪽의 변고를 대비하여 배치한 병력의 철수도 감행하라고 하셨습니다.”

“······.”

이 두 가지 사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단지, 남쪽 전선을 포기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었다.

이는

“조세 거부로 발생한 공백은 대인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셨습니다!”

귀족에 대한 최고 수위의 압박이었다.

유생들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조세의 거부로 폐하께서는 남쪽 전선에서 퇴각을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일이 도모되었는데 대인께서 망치셨습니다.”

“이 일로 한수의 제후국이 통제에서 벗어나면 어찌하실 겁니까.”

한수의 제후로부터 군량을 받기로 했는데 이 또한 철회되는 거 아닙니까?

이 공백을 채우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재원이 필요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이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정의의 창백해진 안색으로 좌우를 돌아봤다. 격렬하게 따지는 유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쳐다만 보는 귀족들도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남쪽 전선을 책임진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수로 끝이 날 리가 없다.’

압박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니까

‘이 일을 수용하면 다음은 서토 전선의 철수 즉 북평의 철수가 단행이 선언될 것이다.’

대외 정책의 모든 비용을 귀족에게 떠넘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또한, 상황은 명확해졌다.

지금까지 관망하던 안학궁이 왕고덕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수조권에 대한 태왕의 의심스러운 시선은 이제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혹은 귀족의 힘을 제대로 제압할 기회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지금 상황은 최악 그 자체였다. 고정의는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인! 어찌하여 답변이 없으십니까?!”

“남쪽 전선을 책임지셔야지요!”

“혹시 포기하신 겁니까?”

“조세 거부를 포기하셔야지요!”

결의와 조롱이 동시에 담긴 유생들의 압박 역시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뜸 큰 외침이 들렸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는데 족히 100명이 됨직한 유생들이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다.

심지어

“유생의 지부상소는 누구도 탄압할 수 없습니다.”

다소 의아한 말을 하고 있었다.

더 특이한 건 따로 있었다.

필시 지부상소에 결합하는 것인데 도끼가 아니라 낫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있었다.

“자네들은 대체 그게 뭔가?”

“아. 급히 오느라 도끼를 챙기지 못했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유생이라면 응당 도끼 한 자루를 품고 다녀야 하거늘.”

“왕도에 있으면 그래야지. 한데, 여기저기 이동하며 농업을 지도하는데 도끼를 챙길 여유가 어디 있나? 소식 듣자마자 보이는 낫이나 들고 바로 달려왔네.”

낫을 든 유생이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고정의를 바라봤다.

“대인께서 지부상소를 탄압하신다기에 소생들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달려왔습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네.”

“원래 다 그렇게 말하는 법입니다. 어쨌거나 소생들은 지금부터 농업 지도를 멈출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1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그렇다면 왕도 일대의 모든 지역에서 업무를 내던지고 몰려왔다는 것이다. 즉, 농업 개혁이 멈췄다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귀족들도 조세를 거부하는데, 소생들이 업무를 거부할 수도 있지요!”

이들은 당당했다.

“소생들은 뜨거운 충정의 마음으로 작금의 사태를 아주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세를 거부한다는 건 고구려를 휘어잡는 것입니다. 어찌 이를 지켜만 볼 수 있겠습니까.”

“하여,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원래 지부상소를 진행하던 이들이 그들에게 상황의 전개를 빠르게 전달했다. 그간 진행되었던 사정을 모르는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하하! 대인의 의기에 감탄했습니다! 하면, 남쪽 전선의 일도 대인께서 책임지셔야지요!”

새로운 압박이 시작됐다.

지켜보던 귀족들의 불안함은 커졌다.

고정의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동의하는 순간 귀족의 이탈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절하는 순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고정의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움직였다. 돌아설 수 없는 배수진이 펼쳐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위기였기에 아직도 고민은 이어졌다.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으나 귀족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지지는 단호한 결단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손해를 볼지라도 귀족의 이권을 대변하는 게 옳았다.

“나는······.”

그때였다.

“모두 멈추시오!”

등장한 이는 바로 왕고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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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의 안색은 어두웠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시오? 내 덕에 큰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안도해야 하지 않소?”

“······.”

“내가 아니었다면 정치적으로 궁색해지거나 귀족의 신뢰를 잃었을 것이 아니오? 한데, 내가 때마침 등장해서 모든 문제를 해소했으니 어찌 은인이라고 하지 않겠소이까.”

“······.”

고정의는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대화를 더 끌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폐하께서는 작금의 상황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계시오.”

“······.”

“귀족이 단합하여 조세 납부를 거부했고, 유생은 업무를 중단하고 지부상소에 나섰소. 혹시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아시오?”

“······수조권이 왕명으로 집행된 적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바로 그것이오. 아직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귀족이 폐하를 압박한 것이외다. 조세 거부를 언급하였단 말이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

다시 말하지만, 수조권 개혁은 내 개인 의견에 불과했다. 하면, 나를 타격해야 하는데 고정의는 대대적인 조세 거부 투쟁을 펼쳤다. 틀린 행동은 아니었으나 완벽한 허점을 보인 것이다.

“처음부터 압박하지 않고 유생을 동원한 이유가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소?”

“명분이 아니라 분명한 문제를 직시하게 한 것이지요.”

“문제?”

“극단적인 상황의 가능성을 공과 귀족들에게 인지시켜준 것이지요. 지부상소가 더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사병을 동원했을 것이외다.”

“······.”

“친위대가 투입되어 도성을 피바다로 만들어도 될 사안이라는 것이지요. 애초 모든 일의 시작은 명분 없는 조세 거부였으니 말이외다.”

“······.”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 안 되더라도 공은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외다. 나는 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오.”

“······.”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이 대화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오. 어떻소? 여기서 타협하겠소? 나는 공과 상생할 준비가 되어 있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말이오.”

“하······.”

고정의는 길게 한숨을 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내가 졌소.”

“이기고 지는 일은 아니었소. 그저 상황이 이리되었을 뿐이니까.”

“한데, 폐하께서 공을 지지하셨소.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소?”

“그렇소. 수조권 집행은 철회하였소. 폐하께서도 절대 동의하지 않으셨으니 말이오.”

“하면, 어찌 되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우선 처라후에게 보내는 5만 석의 군량은 감사히 받겠소. 덕분에 5만 석의 여유가 생겼으니 관리와 의원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소. 차후에는 북평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해결할 것이외다.”

“고작 5만 석의 군량을 얻고 사안을 마무리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소.”

“말하지 않았소이까. 서로의 체면을 살리자고.”

수조권을 집행할 수 없다. 이러할 때 고구려의 관료제를 확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고양성도 만족하고, 고정의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타협점을 떠올렸다.

“토지를 분배하겠소.”

“정말이오?”

“물론, 생각한 만큼 거대하지는 않을 것이오. 조정의 곳간 사정도 중요하니 말이외다.”

“하면, 내가 무엇을 내주면 되오?”

“귀족의 관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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