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전선의 구축(1)
167화 전선의 구축(1)
우스갯소리로 중국을 용광로라고 불렀다. 접근만 해도 휩싸여 동화가 되고 종국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강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중국을 점령했던 많은 세력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 사실을 떠올려 보면 무조건 맞는 말이었다.
고구려가 점령한 곳은 중국 문명의 역량이 집결된 북평이었다. 대륙을 사분오열 낸 세력과 비교할 때 극히 좁은 영토라고 하여 방심할 수는 없다. 언제 용광로로 잡혀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중국의 한족은 정말 불사조처럼 부활해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찰나의 강성함을 믿고 방심하면 상당히 좋지 않은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 북평 점령을 단지 군사 점령으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당대의 안정적인 통치를 기반으로 영원히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만들 뜻을 품었다.
아니다.
내가 실언했다.
고구려가 아니라 ‘우리’였다.
고구려라고 하여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오늘의 찬란함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며, 이 땅을 통치하는 국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도 한반도는 물론이거니와 요동과 북평까지 ‘우리’의 세력권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정말 신중하게 접근했고, 결과는 흡족할 정도였다. 물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표본이라고 하기에는 사례가 많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장 집행되어야 할 통치였기에 가능성을 도출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했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점령지의 백성을 차별하거나 박해했을 때 성공적인 결론을 도출한 사례는 거의 없다. 물론, 이는 정교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지만,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간단한 문제군요. 출생에 무관하게 과거 시험을 치러 관리를 선출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연자유는 심드렁했다.
아니, 이러면 그동안 내가 한 고민이 뭐가 되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고의 권위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왕명을 내리셨네.”
“당연히 윤허하셨겠지요.”
“······.”
연자유의 말대로 고양성도 상당히 심드렁하긴 했다. 지금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함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딱 정색하면서 말했다.
“단지 출사만 보장해서 될 일이 아닐세. 고구려의 부유함이 한족의 세상을 뒤덮어야만 오롯이 통합할 수 있을 것이네. 나는 이 대목을 가장 집중하고 있다네.”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본토에서 그럴 여력이 있겠습니까.”
“그런 물음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내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세. 문진.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듣고 있던 이문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자유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전형적인 실무 관료로서 외압을 거부하는 이문진은 굴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땅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북평의 농지는 고구려 본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옥합니다. 소생은 이 부분을 매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매의 눈이 뭐 그렇게 별로인지 모르겠군. 가끔 자네와 대화하면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다는 말이네.”
“연 대인께서 크게 오해하신 겁니다. 소생이 어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우직하기만 하던 이문진도 어느새 처세라는 걸 배웠는지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어갔다. 그래서인지 연자유의 눈동자가 점차 가늘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농법을 총동원하여 북평을 개간해야 합니다. 제대로만 해낸다면 고구려 본토를 뛰어넘는 놀라운 성과를 일궈낼 수 있습니다. 아니, 기존의 생산력만 해도 고구려 본토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문진의 말대로 북평의 비옥함은 감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괜히 중국 역사를 관통한 중심지가 아니다.
“같은 땅이었으나 고구려가 통치하니 몇 배의 효과가 나온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움이 북평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꼭 본토에서 물자가 옮겨지며 점령지를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 점령지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전과 다른 놀라운 결과를 도출하면 되는 것이다.
이문진은 거침없이 생각을 피력했다. 그럴수록 연자유의 눈은 더 가늘어졌다. 볼도 마구마구 씰룩거렸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리의 방편에 큰 충격을 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태듯이 말했다.
“나의 결론은 한 가지일세. 그들의 풍속을 존중해주며, 고구려가 집행하는 통치는 풍요로움과 직결한다는 걸 확실하게 각인시킨다면 어려움은 없을 것이네. 어떤가? 이해했는가?”
“······.”
“허. 어째서 말이 없는가? 다시 말해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군요.”
“설마 동의하지 않는 것인가?”
“하. 다 아는 내용을 새로운 정책으로 포장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화법입니까?”
연자유는 손을 거칠게 내저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는데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지.”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는 모든 귀족이 관료제를 그냥 동의한다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놓고 말을 하지 않을 뿐 불만은 엄청날 겁니다. 한데, 갑자기 관료제가 왜 언급되는 겁니까.”
“나는 말일세. 북평에 해당 정책을 집행할 때 귀족이 전폭적으로 동참하길 바란다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연자유가 멈칫했다. 한 두 번 눈을 껌뻑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귀족에게 북평 통치의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그곳에서 그들이 사사롭게 땅의 소유권을 거래하는 걸 어찌 막을 수 있겠나?”
“허. 귀족이라면 북평의 풍요로움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겁니다. 종국에는 북평을 너머 고구려 본토에도 전해질 것이고요.”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통치가 아니겠는가?”
“좋습니다. 바로 시작하지요.”
“아마 지금쯤 고 막리지가 나섰을 것이네. 그 역시 귀족에게 북평 농지를 우회하여 차지할 방법을 알려야 할 상황이지 않은가.”
여기에 기만책을 한 가지 더 보태면 북평 통치는 더 효율적일 것이다. 생각하면 뿌듯해서 빙그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를 제대로 낚을 생각이 벌써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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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야박할지라도 이럴 수는 없었다. 속이 무거워 숨도 제대로 내뱉기 어려웠고, 물도 목을 넘기기 힘들었다.
양견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당한 시일이 지났는데도 그의 시간은 북평 전투 패배의 날에 멈춰 있었다.
퀭한 눈가와 거칠어진 얼굴은 이연의 상태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폐하.”
“······.”
소위는 안타까움과 걱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견을 다독이고자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신하로서 물러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소위 역시 속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과정을 떠나서 결과가 너무나도 참혹했기에 쉽게 말을 보태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황제가 정신을 제대로 잡고 있어야만 나라가 움직인다.
“폐하. 비록 아군이 패하였으나 본국의 국세가 흔들린 건 아니옵니다. 다시 반격의 기회를 찾으면 되는 것이옵니다. 부디 어심을 굳건히 하시옵소서.”
“······.”
“폐하. 천하의 정세가 요동치는 난세가 아니옵니까. 이러한데 어찌 늘 승리할 수 있겠사옵니까. 고작 한두 번의 패배에 불과하옵니다.”
“나는 말이오······.”
양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생기를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소.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말이외다.”
“폐하.”
“장손람의 말에 의하면 이연이 황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했소. 부관들의 말도 모두 일치하오.”
“······장손람을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
“그게 아니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토록 지독하게 꼬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오.”
“폐하. 신은 처음부터 일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옵니다.”
“······.”
“장손람의 말대로라면 이미 고구려는 내전이 발생했어야 하옵니다. 최소한 그에 준하는 일이 있어야 하옵니다. 하온데, 아무런 일도 없지 않사옵니까.”
소위의 말은 일리가 있었으나 무조건 동의할 수도 없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장손람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하는 건 패배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화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소위는 생각이 달랐으나 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아니, 어떤 방향이라도 좋으니 양견이 다시 의욕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았고,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다.
“폐하. 고구려가 변방을 어지럽히고 있으나 성세가 오래 이어질 수는 없사옵니다. 대 돌궐 외교에서 성과가 나오고 있사옵니다. 머지않아 돌궐이 고구려의 배후를 타격할 것이옵니다.”
“다시 고구려 정벌군을 꾸릴까 하오.”
“폐하. 때가 아니옵니다. 남쪽의 진을 도모하는 게 우선이옵니다. 그리만 한다면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어 고구려를 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아니외다. 그렇지 않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양견의 목소리에는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무기력함은 사라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다른 세력처럼 몰아치지 않을 뿐, 가장 위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영토를 탐하고 있소. 지금은 북평에 그쳤으나 우리가 틈을 보이면 언제라도 기주 전역을 도모하고자 할 것이외다. 이를 어찌 모르시오?”
“폐하. 고구려는 그럴 의지가 없사옵니다. 대승을 거두고도 북평의 수성에만 그쳤사옵니다. 이는 자신들의 역량을 넘어선 점령지 확보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밖에 볼 수가 없사옵니다.”
“공의 말이 옳다고 할지라도 어렵소.”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본국이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도모하는 걸 고구려가 지켜만 보지 않을 것이외다. 어떻게든 배후를 공격할 것이오. 그것이 그들의 국익과 맞으니 말이오. 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으나 장성 이남에 고구려의 깃발을 꽂으면서 이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오.”
양견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고구려를 장성 이북으로 몰아내지 못한다면 본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소.”
“하오나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진나라를 도모하는 대업은 기약 없이 미뤄질 것이옵니다. 폐하. 본국은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구축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작금의 정세가 실로 난세이옵니다.”
어떻게든 양견이 의욕을 되찾기만 하면 반가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방향은 절대 아니었다. 소위는 다급함에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 고구려의 남진은 방비에 집중하되, 남쪽의 진나라를 먼저 도모해야 하옵니다. 하옵고, 고구려는 돌궐 정책의 성과로 제압할 수 있사옵니다. 부디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그러나
“북평은 되찾아야 하오.”
양견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