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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64화 (164/199)

164화 또 다른 개혁(3)

164화 또 다른 개혁(3)

고정의의 대처는 상당히 유연했고 명쾌했다.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첨예한 대립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나 고요했다.

물론, 유생들은 핏대를 세우며 조세 거부 철회를 외쳤다. 고정의가 무시로 일관했는데도 그들은 기세를 꺾지 않고 지부상소를 이어간 것이다.

퇴로가 보이지 않는 대립은 힘과 힘의 대결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참으로 기가 막힌 방법이었소.”

고정의가 나를 찾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하하하! 공이 이렇게 감탄하니 참으로 뿌듯하오.”

다 알고 찾아온 사람에게 모르쇠로 일관할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고정의처럼 뛰어난 이가 칭찬해주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나의 가치 평가에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이거 숨기지도 않소?”

“그런다고 믿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그러오? 시간 낭비, 기력 낭비지요.”

“끌. 왕 막리지의 말이 옳소. 다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요.”

“그나저나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외다. 불필요한 말은 넣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러지요.”

가벼운 미소가 곁들어진 대화였다. 또한, 서로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도 없었다. 보편적으로 정략을 펼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주고받는 말은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말과 동시에 현실로 구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서, 굳이 그리할 이유가 없었다.

“지부상소를 멈추시오.”

“허. 고 막리지. 지부상소는 절대로 물러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외압으로 어찌할 수 있다는 발상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하오.”

“애초 왕 막리지가 집행한 일이외다. 그러니 물릴 방법도 염두에 두셨을 것이외다.”

“물론이오. 고 막리지가 조세 거부 방침을 철회하는 것이지요.”

“모든 건 타협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겠소?”

“타협이 있을 수가 있소?”

“북평의 토지를 귀족에게 배분하는 건 아직 공식화하지 않았소. 또한, 후에도 이를 철저하게 함구할 수 있소. 이 모든 건 차후 진행된 것이오. 어떻소?”

아직 공식화하지 않은 일이기에 수면 아래서 도장을 찍고, 자신은 대외적으로 지부상소를 진행하는 유생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자는 말이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리할 거면 이 판을 주도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정의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눈빛이 아주 이상했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불안함이 엄습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이 지부상소를 일궈낸 것도 이를 염두에 두신 거 아니오?”

이런.

아니나 다를까 고정의가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의식의 흐름이 발생하게 된 건지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내가 이번에 왕 막리지의 혜안에 진심으로 감탄했소.”

“······뭘 감탄까지 하오. 사람 불편하게.”

“내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소. 내가 강경책을 펼치면서 퇴로를 찾을 수 없는 대치 국면이 개막되었소. 하지만, 왕 막리지가 지부상소를 꺼내면서 모두 한발 물러날 수 있는 퇴로가 열린 것이니 내가 어찌 감탄하지 않겠소이까.”

대충 정리하면 조세 거부 방침에 대경실색한 내가 물러서지 않는 지부상소를 통해서 대외적으로는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하고자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아니다.

고정의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틀리셨소.”

“무슨 말이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소. 북평의 토지를 귀족들에게 분배시킬 생각도 전혀 없소.”

“······.”

“게다가 자긍심과 도끼 한 자루로 살아가는 유생들을 그런 정략에 동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고 막리지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렵소.”

한편으로는 고정의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엄밀하게 따질 때 유생에 대한 영향력은 나와 고정의를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굳이 예를 든다면 내가 태양이면, 고정의는 반딧불 수준이었다. 이러하니 내가 유생들을 철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내가 지부상소를 기획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지시를 내릴 수 없다. 이건 고양성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나는 유생들에게 이 상황을 전했을 뿐이오.”

“무슨 말이오?”

“아마 지금쯤이면 처라후에게 군량이 전달되어야 할 것이오.”

“그렇소만······.”

“중단시켰소.”

“이보시오! 어찌 정치의 일로 북방의 대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소이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빤히 쳐다봤다.

“조세를 징수하지 않으면 조정이 버틸 수 없소. 이는 북방만이 아니라 남방과 서토까지 모든 전선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 공이 모르오? 그런데도 기어이 감행한 건 실질적인 위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소?”

“그건······.”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시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공은 고구려의 대외정책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한 내가 물러서길 바란 게 아니었소?”

내가 너무 바른말을 하자 고정의의 말문은 막혀버렸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대략 이 정도 내용을 전달하니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지부상소를 감행한 것이오. 아. 물론, 안학궁으로 가려길래 약간의 지혜를 빌려준 건 사실이외다.”

“······.”

“애석하게도 타협을 위한 방책이라는 공의 말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 한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리다.”

“무엇이오······.”

“이번 사안의 본질이 유학자와 농학자 그리고 의원에게 지급할 수조권을 박탈하기 위한 귀족의 조직적인 저항이라는 사실이외다.”

“기어이 끝을 보자는 것이오?”

“그래야지요. 이번 일에 퇴로는 없소. 나아가는 사람과 물러나는 사람만 있을 뿐이외다.”

나의 단호함에 고정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타협에 대한 들뜬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나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 막리지. 유생들의 죽음을 방치할 것이오?”

“······.”

“나는 고 막리지가 그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이대로라면 언제라도 일이 생길 것이외다.”

“이거 내가 제대로 당했구려.”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리다. 오직 충심으로 일어난 지부상소에 감탄하여 조세 거부를 철회한다면 고 막리지를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오.”

“애석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소.”

“이런. 결국, 파국으로 가려는 것이오?”

“파국일지 아닐지는 지켜보면 알겠지요.”

아쉽게도 타협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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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는 심기가 불편했다. 왕고덕의 말마따나 유생을 죽게끔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물러섬은 곧 수조권 개혁의 단행이니 말이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끝을 보겠다는 것이지요.”

고식은 고개를 저으면서 쓰게 웃었다. 그 역시 왕고덕이 이렇게까지 강경책을 펼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입장이 궁색했다.

물론, 그는 고정의와 처음부터 함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왕고덕이 전혀 뜻을 굽힐 뜻을 보이지 않자 소수의 강경파 평양계 귀족을 이끌고 고정의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고 있었다.

“자네와 아무런 상의도 없었던 것이군.”

대돌궐 외교의 책임자인 고식 역시 북방 정책의 후퇴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왕고덕이 철저하게 배제한 것인데, 이는 현재 고구려의 대계를 누가 주도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정국에서 절차상 문제를 거론한들 해결되는 건 없겠지.”

“그렇습니다. 이번 결정에서 나를 배제했다는 건 타협을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난처하군. 참으로 난처해.”

왕고덕의 압박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물러서거나 정면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즉, 국내계의 사병을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위험한 것이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이면 대외정책을 완벽하게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방법은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외통수도 이런 외통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겠지.”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내전을 고려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내전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더불어 대외정책에 손을 대는 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네에게 묻지. 하면, 이대로 수조권 개혁에 동의할 것인가?”

“······.”

“왕 막리지는 이런 심리는 정확하게 이용하고 있는 걸세. 그러나 지금 물러나고 싶다면 그리하게. 만류하지 않을 것이니까.”

“듣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고정의는 고식을 지그시 바라봤다.

“왕 막리지가 만든 이 판을 무너뜨려야지.”

“무너뜨리다니요?”

“우리는 귀족의 권한을 지키고자 하지 않나? 두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는 걸세. 한데, 우리는 최근 만들어진 지부상소의 법도를 존중하느라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걸세.”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지부상소를 탄압할 수 없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법도가 생겼나? 이를 치워버리는 순간 왕 막리지가 우리에게 씌운 그물은 모조리 걷어질 것이네.”

“하지만, 여전히 북방 정책이 남아 있습니다.”

“이참에 귀족이 북방 정책을 주도하겠네.”

“예······?”

“조정에서 군량을 거두었네. 하면, 그 수량만큼 귀족이 곳간을 열어서 처라후에게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지부상소의 일은 귀족과 유생의 충돌로 제압할 수 있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는 때가 되면 정리될 것이니 말이다. 또한, 북방 정책은 오히려 귀족이 주도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네는 북방 정책의 책임자일세. 더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상황이 열린 것이니까.”

고정의의 말대로 진행한다면 고구려는 대외정책에서 한 걸음도 물러날 필요가 없다. 생각을 정리한 고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하면, 당장 군량을 모아내겠네.”

“5만 석은 되어야 할 겁니다.”

“물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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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는 싱긋 웃으면서 유생들을 바라봤다. 유생들 역시 피하지 않고 고정의를 빤히 쳐다봤다.

먼저 운을 띄운 건 고정의였다.

“북방의 일을 들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대인께서 귀족의 이권을 위하여 조세 거부를 했기에 발생한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즉각 철회해주십시오.”

“그 지원을 우리가 하기로 했네.”

“예······?”

“귀족이 처라후를 지원할 것이네. 하면, 북방 정책은 변화가 없지 않나? 혹시 자네들 생각은 다른가?”

“······.”

유생 중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고정의가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더불어 여러 대외정책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귀족이 십시일반 할 것이네.”

이로써 문제 제기는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지부상소에서 불필요한 피를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니 압박의 강도를 더 올렸다.

“지금부터 이뤄질 지부상소에는 대의가 없네.”

사실상 해산을 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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