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또 다른 개혁(2)
163화 또 다른 개혁(2)
나와 고정의만 아는 게 아니다. 고구려에 똬리를 튼 귀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작금의 상황에서 누구라도 선을 넘으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이는 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미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했기에 귀족의 힘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러한데 내전이 발생한다는 건 수만 명의 사병이 동원될 것이라는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북평 점령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수나라가 그냥 지켜만 볼 리가 없다. 그들은 북평만이 아니라 요동까지 진군할 것이며, 내전에 휩싸인 고구려는 절대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한강 유역의 제후국도 기민하게 움직일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들이 고구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무궁한 영광을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한가를 향해서 달려가는 고구려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것이다. 어쩌면 평양 도성이 그들의 심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안정화한 남쪽 전선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대 북방 정책은 더 추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말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내전은 고구려의 처참한 몰락과 직결하기에 모두가 피해야 할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금도를 지켜가며 작금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안의 충돌이 해결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펼쳐진 정국만 볼 때 고정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많은 이가 이번 갈등은 고정의의 요구가 수용되며 마무리될 것으로 관측했다.
이는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
수조권 정국이 열이면서 적지 않은 수의 평양계 귀족이 고정의의 뒤에 섰다. 직접적으로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심리적으로 고정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가히 고구려 귀족의 대단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인.”
며칠간 이문진의 몰골은 아주 수척해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밥이나 먹게.”
“대인.”
“먹어야 힘을 내지.”
“어찌하여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왜기는? 자네가 일을 잘 처리했으니 태평하지.”
“대인께서 이르시어 집행하긴 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 잘하고 와서 왜 이러나?”
“대인.”
이러다가 이문진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구해주기로 했다. 누군가의 생명의 은인이 된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문진. 귀족이 왜 귀족인지 아는가?”
“······이르십시오.”
“혈통으로 막리지가 될 수 있기에 귀족인 걸세.”
“······.”
“그 세상은 역모가 아닌 이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귀족의 조세 거부도 같은 맥락일세. 하지만, 관리는 아니지. 그들은 피가 고귀하지 않기에 무궁한 영광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세상은 법도가 참으로 엄격하고 중시될 수밖에 없지. 저항이 절대로 피의 흐름을 막지 않는다는 걸세.”
이문진의 표정은 참으로 오묘해졌다. 아무리 뛰어난 그라고 할지라도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갈등의 본질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난 다른 이들의 의견은 관심이 없네. 나는 달리 설정했기 때문일세.”
“무엇입니까.”
“신구 세력의 대립.”
“예······?”
“나와 고정의의 대립, 평양계와 국내계의 대립, 근왕파와 귀족파의 대립······오랜 세월 고구려를 지배한 낡은 대립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구조로 규정할 것이라는 걸세.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한 신구의 대립이지.”
이 과정에서 내가 집행하고자 한 수조권이 다르게 변할 수도 있었다.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까지 도출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구의 대립이다.
나는 깍지를 끼며 목을 가볍게 풀었다. 이문진은 심각한 표정을 하며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처음부터 이를 예상하셨습니까.”
“아닐세. 그런데 포기할 수 없는 걸 내놓으라고 떼를 쓰니 어쩌겠는가. 조세를 징수하지 않으면 당장 북방 정책부터 철회해야 하는데 말일세.”
“폐하께서도 반응하지 않으시기에 우려됩니다.”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나? 지금은 폐하도 나를 지지하지 않으시네.”
“······.”
“물론 화룡점정은 폐하의 몫이겠지만 말일세.”
마무리를 지었다.
“기다리게. 지금은 그게 옳은 걸세.”
이문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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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계를 흔들며 힘을 과시하던 고정의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내면에는 엄청난 수치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또한, 목울대로 넘어가는 무언가에는 노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몇 번이나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뒤틀었다. 천천히 한 마디씩 꺼냈다.
“지금 이게······.”
고구려 최고의 귀족으로서 지금껏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대체 무슨 짓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노기라는 감정을 아득히 넘어서 살기까지 진하게 담겨 있었다.
고구려 최고의 귀족인 그를 이토록 노엽게 한 원인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보다시피 소생들은 지부상소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랬다.
지금 수십 명의 유학자가 고정의의 사가 앞에서 도끼를 들고 지부상소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막리지인 고정의의 앞에서도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과연 주변국의 위정자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호평까지 받은 고구려의 유학자들다운 의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정의에게 이 사실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불쾌함을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누가 지부상소를 몰라서 묻나?”
“대인. 소생들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허.”
“소생들은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
고정의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 순간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최고의 귀족으로서 누군가가 사가를 봉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구려의 태왕이라고 할지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데 유생들이 그냥 몰려온 것도 아니라 도끼를 들고 압박하니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늘 침착하고 여유로웠던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지부상소라는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말에 똑바로 답하게. 막리지인 나의 사가를 봉쇄한 이유를 묻는 걸세.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네. 아니지.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합당함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물러가도록 하라.”
고정의가 경고를 이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쾅!
-쾅!
-쾅!
······
-쾅!
-쾅!
수십 명의 유학자가 일제히 도끼를 휘둘러 바닥을 찍었다. 그 기세가 참으로 대단하고 묵직했다.
그리고
“소생들은 죽을지언정 물러나지 않습니다!”
유생들의 외침이 시작됐다.
“지부상소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감히!”
대로한 고정의가 일갈했으나
-쾅!
-쾅!
-쾅!
······
-쾅!
-쾅!
돌아오는 건 도끼의 압박이었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됐다.
“아무리 막리지 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지부상소를 탄압하실 수 없습니다!”
“썩 물러가라고 했다!”
“소생들의 도끼는 고구려의 긍지입니다!”
“감히!”
“지부상소를 물릴 수 있는 건 오직 두 가지입니다!”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소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시거나 죽이셔야 할 겁니다.”
“뭐라······?”
그리고
-쾅!
-쾅!
-쾅!
······
-쾅!
-쾅!
다시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고구려의 혈관을 막은 조세 거부 방침을 철회하십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실 거면 소생들을 모두 죽여야 할 겁니다!”
“지부상소는 절대 물러나지 않습니다!”
“소생들의 뜻은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꺾이지 않습니다!”
유생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노기로 범벅이 되었던 고정의는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부상소를 감행하는 유생들의 기개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데, 이들의 언행이 전과는 달랐다.
‘안학궁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도 여기에 왔다.’
아직도 이어지는 유생들의 외침은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흔들었다.
‘만일, 안학궁이었다면 이들이 지금과 같은 말을 했을까?’
같은 사안이다.
하지만, 청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일, 유생들이 안학궁에 진을 치고 폐하께 내 목을 치라고 청하였다면 정국이 험악해졌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강행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부상소는 정치적 타협할 수 없다. 그러니 조세 거부를 규탄하며 책임자를 벌하라는 지부상소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겠는가.
태왕이 수용하는 순간 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절대적이며, 거절하면 유생들이 모두 죽을 것이니 말이다.
‘한데, 내게 방침을 철회하라는 건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
조세 거부를 철회하거나 유생들의 죽음을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강력하게 정치적 압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방법이었다.
이는 고도의 정치력이 없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생들이 이런 짜임새 있는 설계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왕고덕이 뒤에 있구나.’
고정의는 감탄했다. 이런 방법으로 압박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일, 이들이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한다면 표면상 모든 정치적 책임은 자신에게 쏠리게 된다. 기층의 관리와 농학자로 활약하는 유생이야말로 고구려 개혁의 상징적인 존재로 성장하고 있기에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맥없이 물러날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일은 고구려 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두고 겨루는 건곤일척의 승부였으니 말이다.
또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하는 게 고구려의 전통이 아니겠는가.
유생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정의는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이미 상황을 모두 파악했기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든 정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방침을 정하는 과정에서 유생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는 모르겠군.”
“소생들은 응당 자격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전통은 아니지. 그러나 늘 그렇듯 그 어떤 전통이라도 시작은 있는 걸세. 나 역시 자네들의 의기에 크게 감복하기에 탓할 생각은 없네.”
“······.”
“무엇보다 정치에 이견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 나는 자네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행동을 반대하지는 않겠네.”
고정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내가 막리지로서 약조하겠네. 자네들의 지부상소가 탄압하거나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걸세.”
심지어 양팔을 펼치며 유화적으로 행동했다. 순식간에 발생한 태세 전환에 기세등등하던 유생들이 멈칫했다.
오직 고정의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