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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58화 (158/199)

158화 비상하는 고구려(1)

158화 비상하는 고구려(1)

장손람을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3만의 선봉대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이연은 전사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패였다.

10만의 대군으로 북평성을 탈환해야 하는 막중한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게 됐다. 황명의 단 1할도 집행하지 못한 것이다.

상황이 어찌 이토록 지독하게 꼬이게 되었는지 파악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을지문덕······.’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아니,

‘왕고덕······.’

시작부터 아예 조롱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모든 걸 주장하고 입안한 건 바로 자신이었었다. 황도에서 소위와 대립하면서까지 황제를 설득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전장에서도 이연과 지속하여 다퉜다. 즉,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책임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걸 타개할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남은 7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북평에 똬리를 튼 가증스러운 고구려군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고구려 군이 기주 전역을 유린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수나라의 현실이었다.

“대, 대인. 이대로라면 고구려군이 어디까지 남하할지 가늠도 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오, 온달의 대군이 지척에 이르렀습니다.”

고구려군은 노골적으로 도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고자 하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이를 악물며 부관들에게 물었다.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말하라.”

“전처럼 약탈의 형식입니다. 북평 전투 이후 추가로 점령지를 확보하고자 한 움직임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약탈이라.”

장손람의 머릿속으로 살길이 한 가지 그려졌다.

그리고

“우리 백성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는 중입니다.”

고구려군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점령지를 늘리는 게 아니라 약탈로 국력을 팽창하려는 것이다. 늘 있었던 방식이야.’

대국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손람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꽉 깨물며 부관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래서 이연을 만류한 것이다. 기어이 무리하여 진군하더니 이 사달을 만든 것이 아닌가.”

“예······?”

부관들의 표정은 복잡했고, 행동은 어정쩡했다. 대뜸 선봉에 나섰다가 전사한 이연을 탓하는 장손람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간 나와 이연의 대립을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장손람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상황은 장손람이 재설정할 수 있었다.

“이번 대계는 고구려 평양계와 함께 진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북평의 내전에서 패배하였기에 진군을 미뤘다. 한데, 이연이 억지로 이를 감행했기에 이리된 것이다. 만일, 내가 전군의 출병을 막지 않았다면 어찌 피해가 3만으로 그쳤겠는가.”

그 말과 동시에 을지문덕에게 받은 서찰을 내밀었다. 분명하게 온달의 승리와 평양계의 패배가 적혀 있었다.

“또 내가 이래서 과거 을지문덕이 건재할 때 북진을 주장했으나 이연이 한사코 반대했다. 너희는 이를 모두 보았기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실체를 떠나서 장손람의 말은 객관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만큼 장손람의 화법은 교묘할 정도로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부관은 이 자리에 없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황명을 거역한 이연으로 고구려군이 북평을 점령하게 되었고, 아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입었다. 이런 화를 자초한 이연은 죽음이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황을 정리하여 전달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와 다른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손람은 무거운 표정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퇴각한다.”

이 또한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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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는 했다. 을지문덕과 온달을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나는 이 땅에서 특히 을지문덕을 가장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래서 무조건 믿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엄청난 일이 해낼 줄은 몰랐다.

기쁘기도 하고, 당황스럽게도 해서 헛웃음이 새어 나와버렸다.

“왕도의 지원을 받지 않고 수나라군을 격퇴했소.”

만에 하나 발생할 수도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대비해서 지원을 준비했다. 더욱이 이 방안에는 태자인 고대원이 한수 4국과 협상을 주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시화되기도 전에 적군 3만 명을 격퇴했고, 적장 이연을 죽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일이 이렇게 되니 왕도의 움직임은 괜한 호들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그런 감정 말이다.

내 표정에서 보였을까?

고정의은 엷게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왕 막리지. 꼭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외다. 지금 진행하는 추가적인 지원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외다. 또, 달리 본다면 덕분에 북평 전투 이후 우리가 선택할 방안이 많아지기도 했소. 준비 태세가 잘 갖춰졌다는 건 늘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오.”

고정의의 맞는 말은 우울한 나의 마음을 적절하게 위로해줬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동석한 연자유의 눈동자는 평화롭지 않았다. 슬쩍 쳐다봤다가 나까지 난세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북평을 확고히 점령한 쾌거에도 이처럼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는 건 필시 고구려 내정과 관련한 일이었다.

“꼭 지금 말해야 할 일인가?”

“형님. 아무리 감금되었다고 할지라도 보고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대로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만 말하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할지 옳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네. 그러니 자네가 이제는 날 도와주지 않겠나?”

연자유의 안색은 더 심각해졌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형님께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음. 귀족에게 비단으로 조세를 징수하는 제도로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째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인가?”

“신농법의 보급으로 농업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니 조세도 많아질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비단의 수량은 이보다 적습니다. 백성에게 비단의 생산을 하게 했으나 어찌 귀족의 조세를 감당할 수 있는 수량이 단번에 만들어지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공급은 적으나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이리될 때 물가는 폭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비단값이 폭등할 겁니다.”

연자유도 이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하면, 조정의 조세는 오히려 감소하게 될 겁니다.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음.”

“우리 조정은 비단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대 돌궐 외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지요. 즉,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복합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가 볼 때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보나?”

“2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촉박하긴 하군.”

“예. 지금 조세 제도를 바로 잡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겁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조세 제도를 바로 잡기로 했다.

“변경하지.”

“정말입니까?”

“왜 이리 좋아하나?”

“하하하. 솔직히 이토록 쉽게 설득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참으로 다행입니다.”

“사람을 대체 어찌 보는 것인가? 참으로 서운하군. 어쨌거나 면화도 가능하도록 변경하게.”

“예?”

연자유는 눈을 껌뻑이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실로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저으면서 히죽 웃었다.

“면화도 가능하게 변경하도록 하면 될 것이네.”

“예······?”

연자유는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아, 아니. 형님. 그게 더 어렵습니다. 그 많은 면화를 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북평을 우리가 점령하지 않았는가.”

“예?”

“그곳은 면화 재배에 적합한 곳이네. 가서일에게 전하여 우리가 상상한 이상의 물량을 확보할 것이니 자네는 걱정하지 말게.”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나를 믿게.”

“여차하면 고구려 내부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닌가. 나를 믿게. 무조건 확신할 수 있으니까. 아. 물론, 북평을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되겠지. 바로 그래서 추가로 지원해야 하는 걸세. 모든 건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 말일세.”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고정의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우리는 승리하고 있으니 말이외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본국이 수나라를 격퇴하고 북평의 점령을 공고히 했다는 사실을 백제가 하루라도 빨리 알아야 하지 않겠소?”

“이런. 내가 일부러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잡아 둔 걸 눈치채셨소?”

“북평 전투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들이 평양 도성에 있었다는 건 참으로 많은 사실을 시사하지 않소이까. 뭐.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지만, 고 막리지가 이를 의도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소. 특히, 폐하와 상의하여 남쪽의 경계를 강화한 건 결정적인 단서였소.”

얼마 전 이문진이 언급한 남쪽 경계를 강화하는 안건은 대백제 외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현재 우리의 남쪽에서 신경 쓸만한 세력은 백제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고정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만일, 본국이 수나라를 압도할 수 있다면 굳이 백제를 상대로 복잡한 계책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나왔소. 우리의 국력이 강성함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니 말이외다.”

“그렇긴 하지요. 한데, 백제라는 나라가 그렇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 같소만?”

백제는 원 역사에서도 그랬듯 나라가 결딴나기 전에는 끝까지 싸우는 세력이었다. 아니, 나라가 무너져도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한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워 이겼다는 소식에 덜덜 떨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다소 무리였다.

고양성과 고정의가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간 추진해온 계책을 폐기하고 힘의 외교를 도입한 이유가 궁금했다.

“아주 간단하오. 계책에 힘을 보태는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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