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북평 전투(6)
157화 북평 전투(6)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선봉에 선 이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을지문덕의 서찰만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을지문덕이 온달을 생포했다. 이는 난전을 펼칠 때 그를 내게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북평을 되찾는 것만 해도 엄청난 공이었다. 여기에 고구려 부마 온달까지 생포한다면 더 말할 나위 없는 큰 공이었다. 그래서 선봉에 나선 것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존재했다. 만일, 10만 대군을 모두 동원하여 진군할 수 있었다면 기세를 몰아서 단번에 요하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명을 수행하는 장손람을 아예 무시하면서 일을 진행할 수 없었기에 차선으로 선봉을 선택한 것이었다.
‘됐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상황을 살피며 을지문덕을 제압하면 요서까지는 어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해도 충분했다.
황제로부터 책망받으면 장손람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어쩔 수 없다고 답하면 그만이었다. 이를 지켜본 부관과 장수도 한두 명이 아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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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온달 역시 싱긋 웃으며 힐끗 쳐다봤다.
“선봉이 3만이라. 매번 느끼지만 서토의 병력은 끝을 알 수 없군.”
“새삼스레 왜 그러십니까. 30만 명을 선봉으로 세울 수도 있는 세력이 서토가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 그래도 3만이라는 숫자는 몰살시키기 딱 좋은 건 사실이지.”
“큭. 그렇습니다. 딱 좋은 규모지요.”
수나라군의 총병력은 10만의 대군이었다. 이 정도의 규모는 아무리 작전을 짜임새 있게 수립할지라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유인과 매복을 잘 준비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3만이라는 규모는 상황이 아예 달랐다.
“대형. 이제 판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어디가 됐든 상관은 없지. 하지만, 더 많은 적을 도륙할 곳을 찾아야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온달은 잠시 고민하더니 을지문덕을 슬쩍 쳐다봤다. 눈도 몇 번이나 껌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계책을 수립하는데 왜 내게 계속 묻나?”
“대형.”
“자네가 잘 결정하게. 나는 어디가 됐든 적을 모조리 도륙할 수 있으니 말일세.”
그러면서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을지문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소제가 잘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야지.”
그때 부관이 황급히 들어왔다.
“적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을지문덕은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철저하게 경계하라.”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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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의 선봉대는 휴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저돌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진군을 이어갔다.
부관들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이연은 개의치 않고 강행군을 명할 뿐이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하루 전날 고구려 사신과 나눈 대화가 모든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한 상황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고구려 사신은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눈동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가 시선을 피한 건 아니었다. 그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가서일이라고 했다.
-야밤에 성문을 열겠습니다. 진입하시면 약간의 전투와 동시에 아군은 물러나게 될 겁니다.
밥을 떠 먹여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간단명료한 작전이었다. 이연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한 가지를 물었다.
-아군의 진군이 꼭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소?
-확실한 패배를 일궈야만 태왕을 폐위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폐위라.
-그렇습니다. 폐위를 도모하지 못한다면 고구려는 끝없는 혼란이 이뤄질 겁니다. 그래서 대인과 협조하게 된 겁니다.
-장손람이 아니라 나를 선택한 이유도 있을 것이오.
-어떻게든 결과만 같으면 되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유도 간단합니다. 애초 왕고덕과 손을 잡았던 사람입니다. 외교에서 이런 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이왕이면 군권을 가진 대인과 소통하는 게 우리로서도 나은 법이지요.
가서일은 자세를 고쳐잡으면서 말했다.
-양국의 국경은 무조건 요하가 되어야 합니다. 본국이 그와 손을 잡았다가 군권을 가진 대인께서 요동을 공격하면 낭패가 아닙니까.
-내가 요동을 범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래서 부마 온달을 산 채로 넘기는 겁니다.
기승전결 타당한 말이었기에 모순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최후의 협상은 이렇게 성공적이었다.
이를 계속 상기하는 이연이었기에 굳이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진군하여 북평을 되찾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만 그 뒤도 도모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대인. 이제 반나절이면 당도합니다.”
부관의 말에 이연은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은 해가 중천이었다.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도 즉시 휴식을 취할 것이다.”
“예. 대인.”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휴식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만큼 치열한 강행군이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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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땀이 가득했다. 수일째 제대로 쉬지도 않는 강행군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몸과 마음 모두 지치게 했다.
게다가 짧은 휴식 이후 곧장 공성전을 펼칠 것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지금껏 강도 높은 훈련을 버티며 어떠한 적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사기도 높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작전도 없는 이런 강행군은 경험하지 못했기에 병사들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일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병장기의 무게도 평소보다 몇 배나 무거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입 밖으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앞과 좌우를 살피며 대열을 맞춰서 나아갔다. 그 와중에 다른 병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더불어 시선이 마주친 모든 병사와 생각을 공유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작 이런 정도를 위안 삼으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
“······.”
“······.”
가장 선봉에 선 병사들은 무언가 이상했다.
세상은 저들을 개마 무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그들의 좌우에서 달려오는 경기병이 쏜 화살이 맹렬한 기세를 보이며 날아왔다.
전투가 시작됐다.
어처구니가 없는 고구려군의 돌격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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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이었다.
아니,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제대로 된 회전이었다면 철저한 방비로 기병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조차 하지 못한 백주의 저돌적인 돌격은 가장 선두의 병력을 완벽하게 붕괴시켰다.
게다가 돌격해온 고구려의 병력은 1만여 명의 개마 무사와 2만여 명의 경기병이었다. 즉, 3만 기병의 저돌적인 기습 아닌 기습적인 돌격은 전열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오직 광기만 느껴지는 고구려군의 웃음이었다. 피 칠갑한 모습으로 창칼을 휘두르며 웃어대는 그들의 모습은 광인, 그 자체였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우리 땅을 어지럽히는 수나라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창칼을 휘두르면서 어찌 이토록 말이 많은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틈나는 대로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니 마주한 병사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 모두를 압도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그의 돌격은 누구의 저항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고구려 기병이 그의 움직임을 지탱했다.
그의 창이 휘둘러질 때 모든 기병의 그를 엄호했고, 그의 개마가 나아갈 때 모든 개마가 함께 움직였다.
그는 바로 고구려 최고의 무장, 부마 온달이었다.
-부아아아아앙!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우직하게 창을 휘둘렀다. 또한, 특별하게 진군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창이 휘둘러지고, 개마가 나아가는 만큼 수나라의 병사들은 죽었기에 진군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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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짧았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정신을 온전히 부여잡기도 전에 아비규환이 펼쳐진 것이다.
이연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전장을 살폈다. 말도 안 되는 고구려군의 돌격을 감당할 상황이 아니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무혈입성만을 생각했기에 적의 급습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병법상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했고, 이는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물러나야 한다.’
어쩌면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외쳤다.
“절대로 물러나서는 아니 된다! 적을 막아라!”
물러나기 위해서는 물러나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래야만 퇴각할 수 있었다. 말고삐를 꽉 쥐고 고함을 지를 때였다.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사방을 옥죄우는 진법처럼 고구려 기병의 화살이 날아왔다. 부관, 병사 가릴 것 없이 죽어 나갔기에 이연의 행보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엄청난 수의 화살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목숨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적들이 일부러 피해서 화살을 쏘는 건 아닐 것이니 말이다.
“대, 대인. 경기병을 제압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개마가 다가오기도 전에 대열이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부관들의 다급한 외침에 이연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고구려 경기병은 무시하라!”
어차피 경기병은 쫓고자 하면 물러나면서 화살을 쏘아댈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개마를 막아야 한다!”
점차 패색이 짙었으나 이연의 판단력은 제법 냉철했다. 어떻게든 돌격해오는 개마를 막아야만 퇴각을 할 수 있었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되새길수록 화가 났다.
만일, 장손람만 아니었다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을 것이다. 하면, 선봉이 흔들려도 반격할 여력이 되었을 것이니 어찌 퇴각을 고려하겠는가.
치가 떨렸다.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다시 쏟아지는 화살비는 이연의 이성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가 보였다.
그러니까 경기병을 지휘하는 적장, 을지문덕이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껏 새파랗게 젊은 을지문덕의 계책에 철저하게 조롱당한 것이었다.
이연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죽이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연이 잠시 한눈을 팔 때였다.
“대, 대인! 개마가 다가옵니다!”
순식간이었다.
이연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절망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담아낸 마지막 모습은 악귀처럼 웃는 온달이었다.
그리고
“죽어라.”
그의 귀가 담아낸 소리도 이 석 자가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