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북평 전투(3)
154화 북평 전투(3)
북평을 둘러싼 전운은 빠르게 평양 도성으로 전해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희롱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곱씹을수록 감탄사만 터져 나왔다.
역시 을지문덕은 을지문덕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적을 조롱하는 그는 진정으로 영웅이었다.
흡족함을 온몸으로 분출하며 이문진을 바라봤다.
“자네도 내용은 전해 들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하하하! 과연 문덕과 서일입니다. 소생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을지문덕과 가서일의 활약에 기뻐했다. 세 사람의 우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이었기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우리가 더 지원해야만 확실한 승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네.”
“현재 본국은 공식적으로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한데, 섣불리 움직이면 탈이 나지 않겠습니까?”
“누가 알겠나. 게다가 누구라도 도성은 장악하고 있을 것이네. 그러니 당연하게도 북평을 지원하지 않겠나?”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자 이문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더니 낮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인 섣불리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허. 이보게. 고구려의 쌀을 총괄하는 게 바로 자네일세. 한데, 그리 답변하면 나는 어디 가서 이 억울함을 토로하겠나. 참으로 당황스럽군.”
“실은 여러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문진은 멋쩍게 웃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인. 작금의 고구려는 전과 다릅니다. 달라도 아예 다릅니다.”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인가.”
“고구려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복수의 전선을 구축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현재 고구려는 수나라와 겨루는 북평 전선과 대돌궐 요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 동시에 운영한다는 건 엄청난 국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당장 급한 건 남부 전선입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남부 전선에 우리의 역량이 크게 필요할 일이 발생하다니? 괜히 제후국을 수립한 게 아니지 않은가.”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즉, 대비하여 병력과 군량을 비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후국 수립을 주도한 나로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안건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누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냔 말일세. 당장 말하게.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네.”
“폐하이십니다.”
“합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자고로 빠른 태세 전환은 무명 장수에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그나저나 고양성은 갑자기 왜 이런 방침을 수립했을까? 물어보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아직 감금 상태라서 안학궁으로 갈 수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문진을 바라봤다.
“송구합니다. 소생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그렇긴 했다.
대외 정책을 수립할 때 이문진은 개입할 위치가 아니었다. 더욱이 고양성이 그에게 하나씩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왕명을 내리면 집행될 일이니까. 결국, 요청이라고 표현되었으나 무조건 집행해야 할 일인 것이다.
다만, 의아한 건 나도 모르게 이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딱 한 가지 경우였다.
“혹시 내가 감금된 이후 이르셨나?”
“어제 왕명을 내리셨습니다.”
“음.”
그렇다면 고정의와는 상의를 했다는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입술이나 잘게 깨물었다.
“그리고 대인.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이번에 이뤄질 2차 지원까지 포함하여 돌궐로 넘어갈 군량이 10만 석을 웃돌게 되었습니다.”
“음.”
“그리고 북방의 정세가 일촉즉발입니다. 이를 대비하여 수십 만석의 군량을 비축해야 한다는 요구도 강력합니다.”
분명 농업 개혁은 성공적이었다.
흔히 고구려의 병력을 30만 대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온 힘을 다한 총력전 심지어 방어전에서나 가능한 수치였다. 대외 원정에서 이런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는 건 고구려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현재 고구려군은 장기전을 감내할 6만의 대군이 북평과 요동에 분산되어 배치된 상태였다.
더불어 언제든 북방으로 진군할 10만의 대군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즉, 20만의 대군이 원정 중이거나 원정을 준비하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전과 비교할 때 엄청난 성과를 이룬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또한, 친위대의 규모도 전보다 갑절가량 늘었습니다.”
상비군의 형식을 취한 친위대는 어느새 5천의 규모에 육박했다. 물론, 이들은 토지 생산까지 함께 도맡아 하고 있기에 다소 결이 다른 부류였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생계의 영역에 불과했다. 친위대가 원정을 도모하는 순간 조정에서 군량을 책임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 고구려는 숨만 쉬어도 한 달에 20만 석의 군량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문진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대인. 이러한데 북평 전선에 역량을 더 투입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하지만 고민이 깊어졌다. 찰나 묘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이문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빌리면 안 되겠나?”
“예?”
“제후들에게 빌리면 참 좋을 것 같네.”
“대, 대인.”
“나중에 1할의 이자까지 보태서 돌려준다고 하면 반응이 있을 것 같네만.”
나의 엄청난 발상에 이문진은 그냥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꺼냈으니 확실한 논리 구조를 완성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야만 정책이 관철될 수 있었다.
“그들이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건 사실일세. 하지만 4개국이 힘을 보태면 의미 있는 규모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네.”
“······.”
“물론, 초안대로 무역으로 진행하면 더 좋긴 하지만, 당장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기승전결 완벽한 나의 논리에 이문진은 결국 설복되었다.
“대인께서는 어느 정도의 수량을 고려하십니까.”
“문진. 나는 북평 전선으로 5만의 대군을 더 출병하고자 하네.”
“······5만 대군의 1달 군량은 최소한 4만 석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10만 석은 필요하지 않겠나?”
나의 당찬 포부를 들은 이문진의 한숨은 참으로 깊고 길었다.
물론, 특별한 반론은 없었기에 동의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는 무조건 성사해야 할 일일세.”
“그들의 요구 조건이 있을 겁니다.”
“다 들어주게. 우리는 이번에 무조건 이겨야 하네.”
현재 모든 상황이 좋았다. 그러나, 변수라는 건 언제라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요서의 무려성 일대에 추가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때였다.
“대형. 처라후가 박고와 동흘라를 진압했습니다.”
고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왜 감금에서 열외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허. 대형. 내가 구금되면 대돌궐 외교는 누가 진행하겠습니까.”
“음. 꼭 그렇다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무게가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본질적인 의문이 머릿속으로 스치고 있네.”
“됐습니다. 대형의 실없는 농이나 들을 때가 아닙니다.”
“이런. 재미없군.”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처라후가 빠르게 움직였군.”
“그만큼 대카간의 압박이 거세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때 우리가 2차 지원까지 보탠다면 상황은 더 흥미롭게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그런데 이리되면······.”
나는 지도를 쳐다봤다.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이른 시일 안으로 피를 볼 두 개의 전선이 구축될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지금처럼 애매한 대치 국면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는 전선이 구축되는 것이다. 심지어 당대 최강이라고 불리는 돌궐과 수나라를 동시에 상대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나는 고식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지?”
“대형. 천하에서 돌궐과 수나라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한데, 상황이 그리 흐르고 있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러자고 농업 혁명을 도모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의 생산력 발전과 천하의 정세가 발맞춰 진행되었다면 참으로 좋았겠으나 애석하게도 전혀 그러지 않아서 빠듯할 뿐이었다.
“이보게. 우선 돌궐 전선의 구축을 최대한 미뤄보겠나?”
“허.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기어이 일궈내는 것이야말로 자네의 능력이지. 안 그런가?”
“허.”
“해내야 하네.”
“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고식의 동의를 얻은 뒤 이문진을 바라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농업 생산력 확대에 집중하게.”
“대인. 올해 농사에서 전년도보다 더 큰 풍년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후들과 협상도 잘 부탁하네.”
“한데, 이문제는 소생이 아니라 다른 분이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건 또 맞는 말이긴 했다.
제후국의 왕과 협상해야 하는데 이문진은 중량감이 부족했다. 우리 측에서도 중진급 이상이 움직여야 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
“물론입니다.”
“누군가?”
“태자 전하십니다.”
“······.”
미친놈이구나.
그러나
“현재 전하가 아니면 제후를 설득할 분이 없습니다. 모두 감금 상태가 아닙니까.”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고 막리지는 백제인들을 언제 색출한단 말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고대원이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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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은 불쾌하다는 듯 장손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허. 이대로 진군하자는 말을 한 것이외다.”
“어림도 없소. 아직 준비가 안 됐소.”
“준비라고 하셨소? 대체 무슨 준비를 말하오?”
장손람이 추궁하듯 말하자 이연의 불쾌감은 더 커졌다. 미간을 와락 찌푸리면서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오?”
“무례라고 하셨소? 나는 황명을 가져온 사람이오. 설마 항명하겠다는 것이오?”
“황명은 분명 고구려의 내분을 적절하게 활용하라는 것이었소. 한데, 공은 지금 내게 무작정 진군하라고 말하오.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하오?”
이연의 단호한 반대에 장손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먹에 힘을 쥐면서 다시 말했다.
“을지문덕은 내가 따로 접선할 것이오. 공은 진군 준비를 하시오.”
“어림도 없소.”
“이보시오!”
이연은 싸늘하게 장손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군권은 나에게 있소.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