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북평전투(2)
153화 북평전투(2)
참으로 희한했다.
분명 눈을 껌뻑였는데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는 가느다란 눈이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티도 나지 않는 행동을 구태여 할 수 있을까 싶었으나 가서일은 세상의 보편적인 평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신념의 강자였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군.”
그의 목소리에 의구심을 잔뜩 담아내게 한 사람은 바로 을지문덕이었다.
“대체 서찰은 왜 보내는 건가? 어떤가? 나를 이해시켜줄 생각이 있는가?”
“어차피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네. 그러니 그냥 있게.”
“허. 어찌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인가. 참으로 모난 성격이군.”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이 일로 자네를 왜 무시하나? 있는 사실만 말해도 충분한데 말일세.”
“······.”
늘 청산유수였던 가서일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물론, 을지문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부지런히 붓을 움직였다.
“이연이라는 사람이 있네.”
“알지. 적장이 아닌가?”
“그렇지. 이번에 만났더니 오만하더군.”
“음. 오만함은 천하에서 우리 고구려가 제일일세. 한데도 고구려인에게 오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는 건 증상이 보통은 아니라는 걸 의미하지.”
“그렇지. 특히, 내가 볼 때 그는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네. 자신의 위치가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지.”
“그건 오만한 게 아니라 한심한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나는 오만하다고 느껴졌네.”
“음. 자네가 그렇게 여겼다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네. 한데, 그는 갑자기 왜 언급하나?”
을지문덕은 붓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가서일의 눈동자는 더 작아졌다.
“혼자 즐거워할 생각은 그만하게. 나도 듣고 웃을 것이니 말일세. 그러니 당장 말하게.”
“이연은 장손람은 상당히 무시하더군.”
“그게 가능한가? 아니, 애초 장손람은 황명을 수행하고 있네. 그를 배제하고 이연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황명은 존중하겠지. 하지만, 장손람은 전혀 존중하지 않았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으나 너무나도 세밀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가서일은 한 치의 의문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벗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계속 말해보게.”
“반면, 장손람은 황명을 앞세워 이연을 압박할 것이네.”
“이런. 적의 혼란을 유도하는 것인가?”
“고작 그 정도를 바라보고자 내가 붓을 잡고 있겠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아니,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참으로 놀랍군.”
을지문덕은 피식 웃으면서 일어났다.
“자네는 솎아내기나 잘하게. 이것이야말로 통치의 척도가 아니겠는가?”
“끙.”
가서일이 앓는 소리를 내자 을지문덕은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북평을 점령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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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방문에 장손람은 크게 환대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북평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을지문덕이 자신을 따로 찾아온 사실 자체가 기쁜 것이었다.
이는 바꿔 말해서 다소 불안한 그의 입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인.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을지문덕이 무언가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며 말하자 장손람은 모종의 사유가 존재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대인.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복잡하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부마께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뭐, 뭐라? 이보게. 자세 말하게.”
수천의 기병으로 수만의 대군을 격멸한 고구려의 부마 온달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온달을 적으로 맞이하는 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폐하께 감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과거에······.”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장손람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들어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을 만 한 일이었다.
“하면,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아니, 그 전에 자네의 행보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
“부마는 소인이 사정을 눈치챈 걸 전혀 모릅니다. 또, 오히려 소인이 대인을 만나는 걸 권유할 겁니다.”
“우리의 계책을 역이용하려 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부마와 국내계는 북평을 무조건 사수하고자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명분이자 가장 중요한 일이니 말입니다.”
“일이 참으로 복잡하게 됐군. 어떤가? 이대로 진행해도 어려움이 없겠는가?”
“몰랐으면 큰일이지만, 이미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한데,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을지문덕은 자신감이 대단했다.
황명까지 받아온 장손람으로서도 이 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인. 수나라에 부마와 내통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알아야 합니다.”
“내통이라고 했나? 있을 수 없는 일일세. 북평을 점령하려는 고구려 부마와 내통할 우리 관리라니. 애초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소인 역시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최근 묘한 움직임을 확인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을지문덕은 서찰을 내밀었다.
장손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근 발견한 서찰입니다.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유인한다는 내용입니다.”
“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정확한 건 더 파악해봐야겠지만, 부마가 주도하는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뭐?”
“조금 전 언급된 대로 소인의 움직임을 알고 있기에 이를 역이용하거나 수나라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고요. 뭐가 됐든 명확한 건 없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일이 복잡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를 배제할 수는 없는 건가?”
“왕명이 따로 내려오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안학궁을 국내계가 장악한 상황에서 기대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런데 문뜩 떠오르는 점이 있었다.
“한데, 그 서찰은 대체 누구에게로 보내던 것인가. 파악했나?”
“송구합니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서찰을 쓴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저 제법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유추할 뿐입니다.”
을지문덕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대인께서만 알고 계십시오.”
“응당 그리할 것이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이 대인을 만날 생각입니다.”
“그는 무슨 일로?”
“군사 작전을 따로 논의해야 할 성격으로 보였습니다. 소인이 적절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무조건 탈이 생길 겁니다.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휴. 그가 참으로 모난 사람일세. 고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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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을 보자마자 을지문덕은 말을 꺼냈다.
“대인. 소인이 보낸 서찰은 받으셨습니까.”
“뭐?”
이연은 멈칫하며 을지문덕을 쳐다봤다.
눈동자에는 의심과 의구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 을지문덕은 챙겨온 서찰을 내밀었다.
“필체를 확인해보십시오. 소인의 서찰이 맞습니다.”
“음.”
이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서찰을 받더니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내용을 따로 보낸 이유가 궁금하군.”
“은밀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마가 알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할 것이네.”
“부마는 평양계 귀족입니다. 하지만, 소인은 국내계 귀족이지요.”
“뭐······?”
이연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 대인은 평양계 막리지 왕고덕과 협상을 한 사람입니다. 소인으로서는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게. 아니, 국내계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할 것이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일세.”
“우리 국내계는 이참에 평양계를 모두 도륙을 낼 생각입니다. 이번 북평 전투가 그 시발점이겠지요.”
고구려 내전이 오랜 세월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건 누구도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그들은 외부 세력까지 동원하여 확실한 승기를 잡고자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내전에 본국을 장기판의 말처럼 활용할 줄이야. 참으로 대범하군.”
“부디 대인께서 너그럽게 사정을 봐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 중요한 건 아니지. 그나저나 국내계는 북평 점령에 사활을 걸었다고 들었네. 이 또한 자네가 해명해야 할 것일세.”
“여러 오해가 있습니다. 우선 북평 점령은 왕고덕이 주도한 겁니다. 그가 위기에 봉착하자 이 모든 일을 국내계의 탓으로 돌린 겁니다.”
“······.”
“국내계가 주도했다면 부마가 군권을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는 평양계 귀족이니 말입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국내계가 미치지 않고서 자신들이 주도한 전쟁의 지휘관을 평양계 귀족인 온달로 삼을 리가 없었다.
“하면, 국내계가 거병한 건 북평 점령을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전면전을 원하지 않지 않습니다. 북평 점령은 곧 수나라와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인데 어찌 반길 수 있겠습니까. 소인 역시 평양계 귀족이었으나 그들의 무모한 행동이 치가 떨렸기에 국내계로 전향하게 된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말한 내용에는 억지가 없었다. 능히 가능한 일들이었기에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왕고덕의 뜻대로 진군하신다면 큰 화를 당하게 되실 겁니다. 부마는 대승을 거둔 뒤 국내계를 도륙낼 생각인 겁니다.”
“음.”
“북평 전투에서 승리하면 고정의가 태왕 폐하를 폐위할 명분이 아예 없어지는 겁니다. 무력으로 찬탈하기에는 북평의 대군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태왕이 건재하면 언제든 상황은 바뀔 수 있겠지. 이를 노렸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북평을 내주려는 게 국내계의 방침이라는 건가?”
“더 나아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또 무엇인가.”
“요동에는 고흘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고구려 최고의 무장이지요.”
“그렇군. 이참에 그도 제거하겠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을지문덕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인께서 요하의 경계만 지켜주신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나 역시 무리하여 요동을 범할 필요는 없네. 한데, 차후가 문제겠지. 고구려는 언제든 위험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잊으셨습니까. 국내계는 외교를 중시합니다.”
이연은 괴이할 정도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을지문덕은 멋쩍게 웃으면서 눈치를 살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실은 장 대인도 속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마의 귀에 이 내용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음. 그래도 황명을 받은 자인데 마냥 둘 수는 없지.”
“물론입니다. 한데, 장 대인이 지금처럼 평양계와 따로 연락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부마의 속내를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겠습니까.”
“현명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