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북평 전투(1)
152화 북평 전투(1)
을지문덕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서일을 쳐다봤다. 평생 함께한 벗이며, 신뢰도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 깊이 흠모한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을 다하여 밀어 넣고 있었으나 용솟음치는 언짢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목울대를 간지럽히는 욕설을 겨우 짓누르며 이를 딱 악물고 말했다.
“자네는 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라도 알 수 있겠나?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다네. 사실 죽기 전에만 알고 싶은 것일세.”
“허. 문덕. 자네는 정말로 엉망일세.”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가?”
을지문덕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반면, 가서일은 가느다란 눈으로 을지문덕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까지 쉬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은가. 자네는 생각이 없다고.”
“서일······.”
“아니, 자네가 주체적으로 생각이라는 걸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찌 이를 하지 못하는 건가?”
“방금 칼을 꺼낼 뻔했네.”
“이런.”
가서일은 눈을 부릅떴다. 물론, 가느다란 눈동자가 어찌 되는 건 아니었다.
“문덕. 생각해보게.”
“말하라고 했네.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길 바랄 뿐일세.”
“휴.”
“······.”
“잘 보게. 지금 우리는 일 년의 통치가 도모하는 게 아닐세. 10년, 100년을 기약하고 있지 않은가.”
“묻지 말고 계속 말하게. 잘 듣고 있으니 말일세.”
“왕 대인께서 수나라 사신을 철저하게 기만하셨네. 설마 이를 모르나?”
“시끄럽네. 하던 말이나 하게. 제발.”
대 수나라 기만 외교의 진행 과정은 최전선인 북평으로 빠르게 전달됐다. 이를 어찌 수행할지는 오직 이들의 역량에 달린 것이었으니 어찌 어깨가 무겁지 않겠는가.
“문덕. 적장 이연의 10만 대군이 지척에 이르렀네. 하면, 항복한 수나라 관리들의 동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래서 하는 말일세. 전운이 감돌고 있는데 그들을 이대로 중용하면 큰 화가 미치지 않겠는가. 한데, 자네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있네. 통치를 위함이라고 하였으나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인데 어찌 우선할 수 있는가?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 감행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일세. 그러니 생각해보게. 대체 언제 해야 적합하다는 건가?”
“무슨 말인가.”
“이곳 북평은 늘 적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네. 안정적인 통치라는 건 평화와 함께 이뤄지는 게 아닐세. 전쟁과 함께 통치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
“······.”
“수나라 출신 관리들을 내칠지라도 바뀌는 건 없다는 걸세. 관복을 벗더라도 지척에 10만 대군이 있는데 간절히 쳐다보지 않겠나? 그렇다고 그들을 모두 죽일 수도 없는데 대체 어찌해야 하나? 하여, 우리는 과감해져야 하는 것일세.”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반론을 찾지 못했을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을지문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서일의 단호한 말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이참에 우리는 확실하게 솎아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통치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일세. 외부의 위협에도 고구려인이 될 사람들로 말일세. 자고로 백성은 선정을 베풀면 민심을 가질 수 있지만, 글자를 익힌 이들은 신념이라는 게 존재하기에 늘 다가가기 어려운 법이니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지만, 그리했다가 우리의 정보가 누설될까 두려운 것일세.”
“이보게. 그건 자네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가서일은 빙그레 웃었다.
“정보의 흐름을 가늠하여 군략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을지문덕의 일이지. 안 그런가?”
“이런.”
“고구려에서 자네보다 이를 잘 해낼 사람은 없지. 참으로 애석하게도 말일세.”
“자네 대체 내게 무슨 말을 듣고 싶나?”
“하하하!”
대뜸 웃으면 말을 돌리는 가서일을 바라보며 을지문덕은 한숨이나 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말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벗이었다.
“내가 알아서 하겠네.”
“이런. 미리 말해줄 생각은 아예 없는가?”
“자네가 전혀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방침일세. 그러니 통치에나 전념하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론을 펼치기도 어렵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정확한 가서일이었다. 을지문덕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그나저나 대형께서는 요즘 뭐 하시나? 도통 보이지 않으신다네.”
“아. 북평의 백성들과 씨름하고 계시네.”
“······.”
“참으로 많은 백성의 환호를 받고 계신다네.”
“······.”
을지문덕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하면, 나도 나의 일을 해야겠네.”
“큭. 적진을 다녀오는 건 고구려에서 자네가 제일일 것이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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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참을 수가 없는 장손람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박장대소라도 하고 싶었다.
바로
“을지문덕이라고 합니다.”
기다리던 고구려의 밀사가 왔기 때문이었다.
“자네에 대해서는 왕 막리지에게 들었네.”
“부끄럽습니다.”
“아닐세. 고구려군의 군략이 모두 자네에게 나온다고 하더군.”
“분에 넘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장 대인께서 잘 일러주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이토록 겸손하니 대사를 맡은 것이겠지. 참으로 좋군.”
장손람의 입장으로서는 을지문덕에게 호의를 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고구려군의 상황은 어떤가?”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변수라니? 갑자기 무슨 말인가?”
“무려성의 고승이 조만간 북평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내계의 좌장이지요.”
“설마 그가 군권을 가지게 되는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병력이 국내계의 영향력에 있다는 걸 고려할 때 그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장손람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애초 무혈입성을 꾀하고 있었는데 난전이 예상되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인께서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실 때 성문을 열겠습니다. 이는 약조할 수 있습니다.”
“음.”
“성문만 열린다면 아무리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병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겁니다.”
“음. 그때 고승을 제압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퇴각하겠습니다.”
무혈입성까지는 아니었으나 꼭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최소한 차선은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쉬움을 다 밀어낼 수 없었기에 장손람은 입맛을 다셨다.
“하면, 우리가 언제 진군하면 되겠나?”
“모든 준비가 끝나면 소장이 다시 오겠습니다.”
“알겠네.”
대화가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을지문덕 역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기에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객이 있었군요.”
대뜸 군막 안으로 모습을 보인 이가 있었다.
바로 이연이었다.
그를 본 장손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오셨소?”
“나 역시 직접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와봤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내가 잘 전해줄 것인데 말이오.”
“그렇긴 하오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긴 한 것 같소만.”
이연은 자연스레 의자에 앉았다.
장손람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참으로 음흉하구나. 군공을 독차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이리할 이유가 없다.’
불편한 감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을지문덕을 쳐다봤다.
“이연이라고 하네.”
“을지문덕입니다.”
을지문덕은 이연과 눈이 마주쳤다.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군.’
그리고
‘하지만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이연에 대한 첫인상은 딱 이 정도였다.
“한데, 고구려의 군권은 부마에게 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마께서 직접 오실 수는 없지요. 물론, 소장이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자네를 어찌 믿나?”
“허. 이보시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장손람이 끼어들며 이연을 타박했다.
그러나
“나는 정확하게 하려는 것이오. 이 자는 내용을 전달할지라도 결정권이 없소. 한데, 무슨 논의를 깊게 할 수 있소?”
이연은 정공법으로 내쳤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을지문덕은 흥미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승전이 확실하니 벌써 군공을 두고 다투는 것이구나.’
이는 참으로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역학관계를 빠르게 파악한 을지문덕은 이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면 이 내용을 부마께 전하겠습니다.”
“하면, 다음에는 부마가 직접 올 수 있는가?”
“당장 어떤 답변을 드리는 건 어렵습니다.”
“허. 그러니 이런 게 문제일세. 자네는 이토록 간단한 문제도 결정하지 못하지 않은가. 한데, 어찌 대계를 논의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네.”
“대인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을지문덕이라고 했나?”
“예. 대인.”
“경험이 적어서 잘 모르는 듯하여 내가 일러주겠네. 자고로 이런 회담은 격을 맞춰야 하는 것일세. 이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지. 알겠는가?”
“송구합니다.”
을지문덕이 고개를 숙이며 자세를 낮추자 이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흡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참에 확실한 위계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잘 듣게. 다음 회담에 부마가 오지 않으면 협상은 결렬일세. 이는 곧 본국의 대군이 곧장 북평으로 진군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네. 내 말의 뜻을 알겠는가?”
“소장이 이를 꼭 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난처함을 담아서 장손람을 슬쩍 쳐다봤다.
그러자
“일단 돌아가게. 내가 따로 기별하겠네.”
지금껏 존재감이 상실되었던 장손람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장손람의 다급함을 본 이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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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물러난 직후 이연은 상당히 흥미로운 보고를 들었다.
“북평에 있는 우리 관리들로부터 기별이 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부관은 서찰을 내밀며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고구려군이 수작을 부린다고 하였나?”
“예. 고구려군이 아군을 유인하여 몰살시킬 작전을 수립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내용이었다.
어느새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만일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북진을 처음부터 다시 수립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치열한 혈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진짜 전투가 펼쳐지는 것이다.
“한데, 사람이 직접 오지는 않았나?”
“현재 관리는 북평성을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생계를 이어가야 할 농민이나 상인만이 그나마 자유롭기에 그들을 통하여 서찰로 대신 전한다고 했습니다.”
장고가 시작되었다. 아니,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 내용을 함구하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