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제국의 길 >
78화 제국의 길
돌지계는 참으로 호탕한 사람이었다.
“하하하! 내 평생 고구려를 갈망하며 살아오지 않았겠소? 그런데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소이다!”
그의 웃음은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귀는 아플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하오! 내가 참으로 배우고 싶은 게 많소이다.”
“······.”
“아. 왕 막리지의 명성은 귀에 아프게 들었소. 내가 너무나도 흠모하고 있소. 이건 꼭 알아주시오.”
“······.”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응수할 뿐이었다.
왜?
고구려가 왜 고구려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내부의 일은 정말 제대로 단속하는 나라였다. 특히, 말갈의 동향은 귀신처럼 알아보고 다녔다. 결과, 돌지계는 수나라의 등장 이후 꾸준하게 중국의 간을 보고자 했다. 언제라도 말을 갈아탈 수 있게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북방의 정세가 상당히 임팩트 있게 움직이고, 옥토도 주고, 건국도 도와준다고 하니 냉큼 이쪽으로 온 것이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천하를 거머쥐면 어찌할 생각이겠는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때쯤이면 풍요로운 한수에 터를 잡았을 것이니 수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신라는 말갈 따위에게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내가 그 나라와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아니라서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기에 흐린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역시 돌 막리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그렇지 않아도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서 보게 되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하하하! 그렇소?”
“물론이외다. 또한, 이주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공께서 선뜻 나섰으니 진심으로 경외를 표하오.”
“이런! 나 역시 이주를 입안한 공의 경천동지할 계책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선다오!”
“나 역시 공이 온다는 소식에 계속 자다가 일어나오!”
“하하하! 우리의 뜻이 이토록 잘 통하니 너무나도 기분이 좋소이다.”
“바로 그것이외다. 나와 공이 손을 굳게 맞잡으면 무엇이 두렵겠소!”
의기투합은 아주 쉬웠다.
그러나 돌지계가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 끝에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꼼꼼하겠는가.
“농법을 일러준다고 하였소.”
이는 시작이었다.
“고구려가 전통을 부활시켰다고 들었소. 하면, 우리도 함께 결합하는 것이오?”
“······.”
“혹시 한수로는 언제 남진할 계획이오?”
“······.”
“우리의 처우에 특별한 내용이 있소?”
“······.”
“폐하께서는······.”
상의해야 할 내용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 의기투합하는 자리에서 굳이 상의할 내용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물어보고 답변을 듣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끝없는 질문만 이어졌다.
심지어
“아니, 왕 막리지. 어째서 답해주지 않으시는 것이오?”
이런다.
답할 시간도 주지 않았거늘.
이것만이 아니다.
“설마 변동이라도 있소?”
안 해도 될 걱정도 이미 태산이었다.
게다가
“설마······실은 나를 반기지 않는 것이었소?”
예민하고 소심하다.
“서운하오.”
첫 만남부터 앞날이 걱정됐다.
“좋소.”
“갑자기 좋다니요?”
“왕 막리지께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내가 어찌 그냥 넘기겠소이까.”
“아. 꼭 그런 건 아니외다. 차분하게 답하려고 했소.”
“지나친 장고는 상대를 서운하게 하는 법이외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
좋은 게 좋다고 대충 넘기면 남은 인생이 피곤해지는 법이니까. 특히나 돌지계처럼 예민하고 성격 급한 상대라면 더 정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장고를 거듭한 게 아니라 귀공이 틈을 주지 않은 것이외다. 그러니 괜한 오해 마시오.”
“그래요. 바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 내가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오.”
“확실하게 하다니요?”
“왕 막리지가 아직은 불안한 듯 보이니 내가 어찌 그냥 넘기겠소이까?”
도돌이표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1분 전으로 회귀한 걸까?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인데 다시 들리니 참으로 기괴했다.
어쨌거나 이런 건 받아주면 버릇만 나빠지는 법이다.
그런데
“내일 당장 출병하겠소.”
이런 급발진은 각본에 없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전통과 비교할 때 부족한 점은 많을 것이외다. 그러나 우리 말갈의 약탈도 제법 쓸만하다는 걸 보여주겠소.”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니까 아주 잠시만 생각했다.
“나라마다 세력마다 가문마다 고유한 풍습이 있소. 어찌 위계를 정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나 귀공이 이토록 적극적이니 부푼 마음을 감출 수가 없소.”
“하하하! 기대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태왕 폐하께 우리 실력을 보여드리고 싶었소이다. 이렇게 기회가 생기니 너무나도 즐겁소.”
누가 그랬다.
기회는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더 좋은 생각이 있소.”
나도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오늘의 대화는 고구려 남진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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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는 눈을 껌뻑이면서 나를 쳐다봤다. 상당한 당혹감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니까. 아니, 나도 이미 당황하고 왔다. 지금은 차분해진 상태였다.
“아직 말갈족이 자리도 안 잡았습니다.”
“말갈족이라니? 고구려의 태대사자로서 그런 차별적 발언은 적합하지 않네. 발언에 늘 신중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하니 말갈부라고 하시게.”
“예. 말갈부 말입니다. 아직 봇짐도 안 풀었습니다. 한데, 약탈을 감행한다니요? 심지어 내일이라니요?”
수천 명의 인원이었다.
이들은 현재 평양도성 외곽에 대충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한성으로 이동하지만 일단 인사도 해야 하고 질서도 찾아야 하기에 잠시 대기 중이었다.
한성으로 이동하더라도 자리 잡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이러한데 바로 약탈을 떠난다고 하니 연자유가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저들로서도 무언가를 입증하고 싶지 않겠나? 아무리 우리가 우대한다고 할지라도 천년을 지탱해온 고구려에 스며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고구려와 가장 쉽게 동화할 수 있는 가치, 약탈로서 동질감을 확장하려는 의도라는 겁니까?”
“그렇지. 그 정도 정치적 판단은 하니 돌지계가 말갈을 이끌어오지 않았겠나?”
괜한 말이 아니라 돌지계로서는 가장 정확한 판단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왕 고구려에서 살기로 했으면 하루라도 빨리 고구려에 녹아내려져야 한다. 가장 빠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고구려에서 범국민적 지지를 받은 약탈의 선봉에 서는 것이다.
“한데, 반발은 없겠습니까? 일전의 지부상소를 떠올리면 우려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
“만일, 유생들이 다시 들고일어나면 시작부터 양측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방법이 있습니까? 호전적인 우리 유생을 고려하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말을 바로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네. 아니, 상황을 정확하게 정리해야겠지.”
“무슨 말씀입니까.”
“장성을 넘으면 약탈이지만, 한수로 가면 전쟁의 가능성이 있지 않나?”
넓고 넓은 중국의 외곽을 때리는 게 약탈이다. 신라의 영토를 고려할 때 약탈이 아니라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당히 컸다. 게다가 약탈의 주체가 고구려라고 한다면 신라는 기어이 대군을 일으킬 것이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말갈, 거란, 고막해를 데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분명 초안은 그랬지. 한데,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네.”
“무엇입니까.”
“전쟁일세.”
“예······?”
연자유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나는 방긋 웃고 있었다.
“시일을 더 미뤄 말갈을 한성으로 이주시킨 뒤 약탈을 감행할 것이네.”
“······.”
“만일······.”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연자유를 바라봤다.
“말갈이 한수 지역을 약탈하여 신라군이 반격하면 어찌 되겠나?”
“전쟁이지요.”
“한데, 누구와 전쟁인가.”
“그야 당연히······설마······?”
연자유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말갈이 한 것일세. 우리 고구려가 아니라.”
“그러나 말갈은 고구려의 영내에 있습니다. 심지어 한성이지요.”
“그렇지. 신라는 고민할 것이네. 북진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넘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일세.”
“결국, 강력한 항의를 하겠지요.”
“우리는 말해야지. 말갈은 고구려가 아니라고.”
연자유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대외적으로 말갈은 말갈‘국’이 되어야겠군요.”
“그렇지. 거점은 바로 한성일세. 그곳이 말갈국의 심장부가 될 것이네.”
말갈국의 병력이 한수를 약탈한 뒤 도읍인 ‘한성’으로 퇴각한다. 그런데 신라가 말갈을 응징하려면 고구려의 영토를 범해야 한다. 이건 어지간한 결심으로 될 일이 아니다.
“당당하게 말해야지. 한성이 고구려 영토 안에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말갈국은 어엿한 일국이기에 우리는 내정을 간섭할 수 없다고 말일세.”
“고구려는 번국의 일에 하나씩 관여하지 않는 법이지요.”
“마치 과거 신라를 보살폈던 것처럼 말일세.”
이러면 유생의 문제도 해결된다.
“어찌 대국의 유생이 번국의 생존에 시기와 질투를 하겠나?”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의 대화는 점차 밀도를 더해만 갔다.
“이런. 돌지계의 위치가 애매해지겠군요.”
“어려울 건 없네. 그는 말갈국의 왕이지만, 고구려에서 막리지의 관직을 내린 것일세.”
이건 모순이 아니다.
중국도 고구려의 태왕에게 관직을 하사하지 않던가. 동아시아에서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다. 이제 우리가 이를 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돌궐의 칸도 고구려의 막리지가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뒤늦게 결합한 거란과 고막해는 다급하게 상황을 파악하여 뭐라도 하려고 할 것이네.”
“개국을 갈망할 것이며, 더 공세적으로 신라를 공격할 겁니다.”
“그들의 규모는 말갈과 다르지. 수만의 기병이 한수를 약탈하고 한성으로 퇴각하면 신라는 어찌할까.”
“북진을 감행하겠지요.”
“큭. 아주 흥미롭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운영의 묘리를 보여야 하는 법이다.
“신라를 가장 위력적으로 압박하는 세력에게 우리는 작위를 하사해야겠지.”
“동방의 패권을 내리는 것이지요. 동방교위말입니다.”
동방의 하늘은 이미 고구려이기에 모든 걸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한성은 우리의 번국이 될 것이니 평양계 귀족이 당황할 겁니다.”
“말해야지. 이주하라고.”
“정치적 이권으로 반대할 수는 없지요. 이미 동방의 패권을 하사할 신 남진 정책이 감행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군말 없이 이주할 것이네.”
나도 모르게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신 남진 정책은 고구려의 만성적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비책으로도 활용할 수 있겠지.”
고구려 귀족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대체 무슨 위력이 있기에 수천의 사병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이는 그들에게 확고한 지역적 거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뿌리 뽑을 수 있다면 모든 걸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적 거점을 상실한 귀족의 운명은 오직 하나였다.
“관료적 귀족이 탄생할 것이네.”
태왕 중심의 질서에 완벽하게 편입되는 것이다.
오늘 제국의 길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