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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77화 (77/199)

< 77화 낮은 단계의 중앙집권 >

77화 낮은 단계의 중앙집권

현실성을 떠나서 의술의 진흥이라는 당위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시로 전쟁이 발발하는 난세에 백성을 고려한 이문진을 어찌 어리석고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내가 모질 게 말한 건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 현실 정치에서 뜻을 제대로 펼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좌절과 좌절을 만나며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다. 이문진이 만난 첫 좌절과 마지막이 나로 국한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일전에 이르신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하루 만에 다시 나타났다. 크게 낙담하였으니 며칠이라도 실의에 빠져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전보다 더 빛나는 눈빛으로 내 앞에 앉았다. 정말로 아주 이글거렸는데 마주한 내가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생기였고, 열의였다.

“대인께서 이르셨습니다. 모든 건 농업 생산력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러했네.”

“예. 해서, 소인이 제대로 해보고자 합니다.”

“해보겠다고 했나? 제대로?”

“그렇습니다. 의술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질적으로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정책을 모두 펼치고자 함입니다. 정책의 시행이 누군가의 반대는 있을지언정 쌀이 부족한 일은 없는 고구려를 도모할 것입니다. 기어이 해낼 겁니다.”

“허······.”

“대인. 소생은 정말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든 역량을 농업에 집중하겠습니다.”

참으로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이문진이 아니라면 누가 이토록 좌절을 열의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런 자세와 관점은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게 옳다. 더욱이 이문진처럼 장래가 촉망되는 지식인이라면 더 그렇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

꼼꼼하게 문서의 내용을 살폈다.

자세하고 고민이 잘 녹아내린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이는 상당히 괜찮은 아니, 대단한 내용이었다.

“이앙법을 더 확대하자는 거군.”

“그렇습니다. 소생이 생각할 때 이앙법만큼 농업 생산력을 폭증시킬 방도는 없습니다.”

“음. 이 문제는 일전에 연자유에게 일렀네. 혹시 그와 상의한 것인가?”

“물론입니다.”

두 사람의 영역은 정확하게 나눌 수 있었다. 연자유가 고위 귀족으로서 고구려의 이모저모를 실무적으로 정리하면, 이문진이 농법을 중심으로 첨삭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내게 보이는 문서였다.

그리고 이앙법은 이미 내가 언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단하다고 여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음.”

작금의 고구려에서 가장 어려운 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미 장안성 축조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시절이었기에 수천 명 단위의 백성을 동원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실무적인 부분에서 이앙법의 전폭적인 확대는 상당히 어려웠다. 저수지를 비롯한 관개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자유에게 이를 때도 귀족이 자체적으로 소규모 시설을 축조하게 했다.

물론, 귀족의 사병이라고 하여 만능은 아니었기에 쉽사리 진행되기는 어려웠다.

이러할 때 이문진이 꺼낸 제안은 간단하지만, 파격적이었고, 가장 현실적이었다.

“현재 서토인은 2천여 명에 이릅니다. 소생이 여러 번 생각해봤는데 그들을 경작이나 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서토인을 모조리 동원하여 저수지 따위를 축조하면 능히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문진이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중국에서 여기까지 끌려온 이들이다. 중국인이 고구려 땅에서 노역하기 싫다고 저항한다는 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요서에서 데려오는 중인 중국인까지 보태면 인원은 더 늘어난다.

가장 적절한 방책이었다.

“좋군.”

이는 정말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간 고구려는 중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위치를 아래로 두지 않았다. 내가 짧게나마 차별이라는 프레임에 갇혔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이러한데, 그들을 철저하게 노역에만 동원하자는 건 파격 그 자체였다.

“소생은 내부의 반발이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끌. 보시게. 온 나라가 경작하자고 움직이는 시절일세. 이러한데, 사소한 문제를 머리를 들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지. 혹시 있으면 내가 제압하겠네. 그러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게.”

이문진은 방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한데, 새로운 시비법을 고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전하께서 제안하셨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

“음.”

“왜 그러나?”

“아.”

이문진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일을 소생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맡길 수는 있네. 한데, 무엇을 어찌 맡겨달라는 것인지 내가 헷갈리는군.”

고대원이 새로운 시비법의 보급을 언급한 건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였다.

하면, 이문진이 이를 맡겨 달라고 한 건 어떤 의미일까.

“통제할 수 있다면 통제하여 이익을 더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하하하. 자네 마음을 독하게 먹었군.”

“지금의 고구려는 이리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좋네. 하면, 자네가 해보게. 농법을 전해주겠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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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는 피곤한 눈을 비벼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른손으로 목을 주무르며 좌우를 돌아봤다. 상당한 분량의 문서가 있었으나, 공간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바꿔말해서 필요한 문서가 모두 연자유의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래서야······.”

농업 개혁의 닻이 올려진 뒤 가장 어려운 일은 고구려 땅의 실태 파악이었다.

지난 세월 농업을 체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기에 기초적인 자료도 없었다. 하지만, 왕고덕은 아예 기틀부터 쌓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일을 추진하길 바라였다.

연자유로서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당연히 거절하지는 않았으니 시일이 지날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현재 고구려에서 고구려 땅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귀족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면 귀족이 일제히 제 세력권을 파악하여 일러주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건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 아니, 분명한 한계가 있는 방법이었다.

우선, 귀족이라고 하여 늘 협조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농업 개혁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실태 파악은 상당한 인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귀족마다 파악해오는 내용의 기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토지의 성질에 대해서 적을 때 동쪽과 서쪽의 기준이 달랐고, 물의 흐름도 남쪽과 북쪽이 달랐다.

여기에 보태서 일관성도 없었다.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막상 일하는 인력은 그때마다 다르니 혼선이 너무나도 컸다.

속도가 천차만별인 건 당연했다.

“답답하군.”

신 경작지의 기후를 파악하는 일부터 철광을 알아내는 것까지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철광의 일에는 귀족들이 약간이나마 의지를 보이는 건데 오십 보, 백 보인 건 마찬가지였다.

“농업 개혁이 단행된 이후 귀족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겼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쉽사리 나서기가 어려운 상태이긴 하지.”

경작지부터 약탈까지.

귀족이라고 하여 만능이 아니며, 끝없이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휴.”

그때였다.

“대인의 한숨 소리가 도성을 울리는군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연자유는 서둘러 일어났다. 말도 없이 집무실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중 여인은 오직 한 명, 평강공주였다.

“공주께서 오셨습니까.”

“지나가다 잠시 들렸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필시 어떤 사유가 있을 것이다.

‘공주의 행보는 늘 시의적절했고, 적합했다.’

그렇다면 오늘도 상당히 좋은 방안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연자유는 내심 기대했다.

“태대사자의 일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지요?”

“끙. 실은 그렇습니다. 내용을 한 번 파악하는데도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또한, 그 내용도 무조건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다시 교차 검증을 해야 하는데 번거롭기가 이를 데 없고, 시간도 크게 소모됩니다.”

“사실상 고구려의 내정을 총괄하는 태대사자의 고충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공주께서 그리 일러주시니 참으로 송구합니다. 다만, 집행을 일사불란하게 할 수 있는 체계가 간절한 시절이지요. 물론,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새로운 체계는 과거 왕고덕이 언급한 바가 있었다. 농법으로 확장할 경작지를 조정의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특별한 말이 없었고, 연자유가 보더라도 당장 될 일이 아니었다.

“내게 상당히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들어보겠습니까?”

“허. 정말입니까.”

“하하하. 당황하실 건 없습니다. 이는 왕 막리지의 생각이니 말입니다.”

평강공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저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한데, 오늘 마침 적기인 듯하여 태대사자에게 전하는 겁니다.”

“왕 막리지의 일이라고 하신다면 고구려 전역에 관리를 파견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 이는 당장 시행할 여력이 없습니다.”

연자유는 딱 잘라서 말했다.

지금 고구려가 무슨 여력으로 전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겠는가. 게다가 귀족의 반발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렇습니까? 한데, 나는 가능할 거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입니까.”

“의지가 있는 사람을 선출하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혹시 막리지가 말한 과거시험을 이르십니까.”

“그렇습니다.”

왕고덕이 따로 과거시험을 진행하고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 농법을 집행하는 이를 선출하는 수준이었다. 이조차도 왕고덕, 개인 수준의 일이었다.

한데, 평강공주는 이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하자는 말이었다.

“어려움은 있을 겁니다. 한데, 내게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귀족의 반발이 없는 방법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재정적 부담과 관리의 확충에도 무리는 없어야 합니다.”

단서가 많았다.

귀족의 반발을 떠나서 관리를 확충하지 않은 건 결국, 비용의 부담이 너무 컸다. 쌀 한 석이라도 아껴야 할 고구려였기에 섣불리 수백 명의 관리를 구한다는 건 엄청난 부담이었다.

현재 농법을 집행하는 유생을 왕고덕 홀로 부담하고 있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관리라면 단지 농법을 시행하는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용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평강공주는 여유로웠다.

“고구려의 조정과 귀족은 성을 통치하지만, 백성은 여기저기 잘 몰려 살지요. 그곳을 가면 됩니다.”

“허······.”

“그곳에 가면 새로운 경작지를 낼 것이니 발생하는 조세에 따라 ‘녹봉’을 내리면 될 일입니다.”

“그 말씀은······.”

“맡은 지역의 수확 수준에 따라서 녹봉을 책정할 겁니다.”

경작지에 백성을 보내는 게 아니다.

이미 산발적으로 몰려 사는 이들에게 관리를 보내는 방법이었다.

곳곳에 작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운집한 곳이 많았다.

이곳부터 정확하게 통치하자는 말이었다.

“수십 명을 다스를 관리. 이들 관리를 통제할 관리. 점차 이렇게 체계를 잡는다면 일사불란하게 농법을 집행할 수 있을 겁니다.”

간단하고 명확하면서 효과적이었다.

비용의 부담도 없다.

남은 건 한 가지였다.

“귀족의 반발이 있을 겁니다.”

“무마시켜야지요. 때로는 그들에게 유화책을 제시할 필요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출신지로 배치해주면 어찌 불만이 터져 나오겠습니까.”

양날의 검이었다.

순식간에 거대 세력을 확보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귀족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자유는 그래서 말했다.

“좋습니다.”

“이미 시작은 되었지요.”

“말갈부를 이르시는군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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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이 당도했다.

한 눈으로 보더라도 수천 명이었다.

나는 양팔을 벌려서 환영했다.

“어서 오시오!”

그리고 나는 이들의 수장, 돌지계가 차후 어떤 위치로 고구려에서 살아가게 될지 확실하게 언급했다.

돌지계는

“막리지.”

막리지가 된다.

고구려 6부 중 말갈부의 수장이었기에 능히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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