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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79화 (79/199)

< 79화 의외의 일 >

79화 의외의 일

고구려의 전통적인 질서를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다. 그러한데 진통이 없을 수가 없다. 고구려의 귀족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고 여겼다면 내가 마친 놈이다.

실제로 그들의 썩은 표정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한데 억지로 우리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고 말하는 건 참으로 우매한 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평과 불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은 얌전히 있어야 했다.

작금의 고구려는 계획이 수립되면 ‘일단’ 집행하는 속도전을 선호하는데, 오늘이 바로

“신 돌지계.”

말갈의 돌지계가

“말갈국의 군왕으로서 고구려 태왕 폐하께 충심을 보일 것이옵니다.”

말갈국의 군왕으로 책봉되는 날이었다.

“말갈국은 영원히 고구려의 번국으로 역사를 이어갈 것이옵니다.”

고양성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돌지계는 말갈국의 국왕이지만 본국의 신하이기에 막리지를 겸하게 할 것이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막리지는 고구려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 중 하나에 해당한다. 그러하니 늘 자부심을 새겨야 할 것이며, 고구려의 위상에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 말갈국 국왕 돌지계. 심장에 아로새기겠사옵니다.”

책봉과 임명까지 대대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로써 돌지계의 확고한 정통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하였듯 급격한 변화는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법이다.

또한, 반발의 근거가 합당하지 않고, 단지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정으로도 발생하는 건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자네 대체 어찌할 생각인가?”

실제로 이를 느낀 고흘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물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잘 무마해야지요. 반발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허.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일을 빠르게 추진하나?”

고흘이 우려하는 건 바로 평양계 귀족의 내재한 불만이었다.

“평양계 귀족의 반발이 점차 거세질 것이네. 눈 뜨고 일어났더니 거점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 아닌가.”

애초 합의된 내용은 철저한 임대차 계약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매각에 가까운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평양계 귀족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질만한 일이었고, 눈을 부라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 이해했다. 그들의 분노를 말이다.

“잊지 말게. 평양계 귀족의 반발은 고구려의 내전과 직결한다는 걸 말일세.”

“아.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어찌 그리도 확신하나?”

나는 피식 웃었다.

“장군. 고구려 내전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압니까?”

“평양과 국내성의 대립이 아닌가?”

“아니지요. 절대로 아닙니다.”

다들 고흘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아니었다. 아니다.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저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태왕의 즉위와 관련하였을 때만 발생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그러니 평양계와 국내성계가 충돌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 외의 사안으로는 절대로 내전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고흘은 멈칫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작금의 고구려에서 내전 따위는 발생할 수 없다는 나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깨달은 것이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불평과 불만이 하늘을 찌를지라도 평양계 귀족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알게 될 겁니다. 작금의 고구려에서 내부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입니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외부 세력이 내부로 진입하여 동화되는 걸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점차 고구려가 되고자 하는 세력은 늘어만 갈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고구려의 중추로 진출할 것이다.

이 모든 걸 지켜볼 평양계는 빠른 판단을 내리게 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빠르게 말에 올라타느냐가 가장 중요한 시대라는 걸 깨달을 것입니다.”

고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네. 또한, 기득권에도 의미를 두지 않아. 다만, 고구려가 흔들리지 않길 바라지.”

“소인이 어찌 장군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한데, 다른 귀족이라고 하여 다르겠습니까.”

“다르지 않을 걸세. 하지만, 잊지는 말게. 그들의 걸음이 때로는 느릴 수도 있다는 걸 말일세.”

“새기겠습니다.”

그때였다.

“하하하! 왕 막리지!”

오늘도 호탕한 돌지계가 다가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예를 취했다.

“참으로 감축드립니다. 전하.”

“아니, 이거 왜 이러시오? 낯 간지러우니 평소처럼 하시오. 우리 사이에 무슨 전하요?”

우리 사이라.

며칠 보지도 않은 사이였으나 어느새 가까워진 모양이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격식을 바로 잡아야 하지요. 이제 일국의 군왕이신데 소인이 어찌 편히 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를 향한 소인의 의리는 늘 같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하하하! 내가 왕 막리지만 믿소. 그리고······.”

슬쩍 고흘을 쳐다보더니 다소 경직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 장군을 흠모했는데, 오늘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이토록 강건하니 참으로 마음이 좋습니다.”

“소인 또한 전하의 위명에······.”

갑자기 시작된 팬 미팅에 고흘은 뚝딱거리며 어렵사리 미사여구를 꺼냈다. 참 안 맞는 옷인 듯하여 미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서 나는 슬쩍 발을 뺐다.

“하하하! 장군! 이왕 이리되었으니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아······.”

고흘의 곤란함과 난처함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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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일은 기분이 참으로 별로였다.

아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말갈국의 선포와 책봉이 있거늘 어찌······.’

말갈이 오롯이 고구려가 되는 날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역사적인 일이었으나 참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기억하여 남길 것인가!’

위대한 행사였기에 기어이 그림으로 남겨야 하거늘 갈 수 없었으니 분통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가서일은 아무런 관등이 없다. 그저 왕고덕의 식객에 불과했다. 그러한데 어찌 책봉식에 발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물론, 가서일에게 이런 지극한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지 못했기에 눈으로 담아낼 수 없었고, 그림으로 남길 수 없게 된 사실에 노여울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가느다란 눈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날카로웠다. 그의 앞에 선 수나라인 들은 마주칠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웅성거렸다.

“저 사람은 왜 저리 살벌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잡아먹겠군.”

“여태껏 본 고구려인 중에서 제일 사나워.”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현재 모인 수나라인의 수가 천여 명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두 똑바로 내 말을 들어라.”

가서일의 입에서 유창한 수나라 말이 터져 나왔다. 모두 움찔하여 쳐다봤다.

“응당 본국의 말을 사용해야만 하지만 오늘 나의 기분이 무척이나 별로기에 역관을 거치는 시간마저 아깝도다.”

가서일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역시나 예사롭지 않았기에 모두 긴장하여 쳐다봤다.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건 너희는 아무런 재주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저 사지만 멀쩡하다는 것이지.”

아무리 대우가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학자나 장인은 철저하게 나눴다. 그들은 분명 고구려에서도 필요한 인재였기에 같은 대접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장차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할 인재들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해도 나설 수 없고, 하지 못해도 나설 수 없다. 누가 이 분위기에서 섣불리 답할 수 있겠는가. 가서일의 표정부터가 아예 썩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애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가서일 역시 어떤 답변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말을 할 뿐이었다. 어차피 인부들과 어떤 대화와 토론으로 결과를 도출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재주가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네. 왜? 오늘부터 나를 믿고 따른다면 자네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주역이 되는 것이기 때문일세.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

“······.”

그러니까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중요하지만 간단한 것이었다.

“관개 시설을 축조해야 할 것이네. 내 말을 이해했는가!”

“······.”

사실 고구려의 인부들도 가서일에게 감히 나서지 못한다. 그러한데 여기까지 끌려온 수나라인들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송구합니다만······.”

누군가가 조심스레 나섰다.

그리고

“그것만 하면 됩니까?”

물음은 참으로 희한했다.

가서일이 눈을 두 번이나 껌뻑거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장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

“아······.”

그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산도 작고, 강도 좁고, 평야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혹시 소인이 보고 있는 이곳을 평야라고 한다면 그저 웃지요.”

“······.”

“이러하니 관개 시설이라고 한들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을 겁니다. 음. 소인이 볼 때는······설마 이곳에 축조할 시설을 저수지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관개 시설만 축조하면 소인들은 탈이 없는 건지 여쭤본 것입니다.”

“······혹시 경험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인재로다.”

가서일은 크게 감탄했다.

고구려에 한 줄기 빛이 내린 것만 같았다.

“내가 자네를 귀히 여길 것이네. 당장 따라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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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일의 보고를 들어보니 중국인 중 토목 공사 경험이 있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고구려의 ‘아담한’ 산천을 보고 마음껏 비웃으며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차이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홀로 엷게 웃고 있을 때 방문객이 있었다.

고식이었다. 보자마자 왜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올 줄은 몰랐네.”

“하면, 누가 오겠습니까. 모두 대형의 눈치를 살피느라 나서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나라도 와야지요.”

“자네도 좀 눈치나 보고 있지 그랬나.”

“세상만사가 어디 그렇게 됩니까.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니더라도 찾아왔을 겁니다.”

행동이 앞서는 의연과는 달리 고식은 참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평소 고민이 아주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아마 밤을 지새우며 치열하게 홀로 싸웠을 것이다.

“불필요한 말은 걷어내지. 이미 일은 진행됐네. 폐하께서 책봉까지 하셨거늘 이를 거두라고는 건가?”

“아니지요. 어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일평생 근왕파로 살아왔습니다. 폐하의 왕명은 곧 심장이라는 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찾은 이유가 있을 것이네.”

“적어도 희생의 대가는 일러줘야겠지요.”

고식은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물러났기에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가라······.”

“고구려의 영광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 말입니다.”

고식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들의 박탈감을 외면만 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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