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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55화 (5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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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화 더불어(1)

    영주의 전략, 전술적 중요성은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다. 더욱이 강대한 세력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작금의 정세였기에 가치는 더 말하는 게 시간 낭비일 정도였다.

    지난 10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영주라는 지역을 되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생존’이었다. 특히 군소 세력으로 급변하는 정세를 버티며 명맥을 이어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이 험난한 세월에 필요한 능력 중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눈치’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세 판단, 혹은 외교력 또는 군사력 등 여러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본질은 눈치였다.

    누구와 손을 잡을 건지 제대로 판단해내지 못한다면 흔적도 없이 세력이 소멸하는 난세였기에 눈치껏 살아가는 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이러했기에 거란족과 고막해족에게 역사란 곧 생존‘사’였다.

    찰나의 판단으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실로 무섭고 무거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건 곤란합니다.”

    고구려의 입장이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무려성의 가라달인 고승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고막해족이 고보령의 수급을 취한 건 아군이 대대적인 정벌에 나설 것이라는 정세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되새겨도 고막해족의 움직임은 전격적이었다. 당시 무려성이 짧게나마 들썩였던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고승만 하더라도 소식을 접한 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으니 말이다.

    “또한, 머뭇거리던 거란족이 단지 신속으로 그치지 않고 장성 이남으로 함께 약탈을 수행한 것 또한 대군이 진군하여 영주를 확실히 도모할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것입니다. 결론은 양측 모두 영주에서 제 세력권을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공을 세우고자 나선 것이지요.”

    이 모든 건 최대 고구려가 대군을 일으켜 장성 이남의 영토를 도모할지도 모른다는 경외심에서 최소 영주를 영구히 통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만든 현상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군세가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

    개전 직후에는 무탈한 일이었으나 아직도 여전히 고작 수천에 불과하다는 건 문제가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

    “고보령의 수급을 취한 고막해족은 둘째치더라도 거란족은 내부가 뒤숭숭할 겁니다. 하지만, 아군의 수가 소수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최소한 거란족은 신속의 형식만 취할 뿐 전과 같은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겁니다. 돌궐과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수도 있겠지요.”

    고구려의 최전방을 지킨 무려성의 가라달답게 고승의 판단은 냉철했다. 또, 지금껏 영주의 세력 균형을 직접 눈으로 살피고 몸으로 겪었기에 정확했다.

    한 마디로 영주 전역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는 소장의 탓이었다.”

    을지문덕이 자책하며 나서자 고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국내성에서 이리도 시간을 끌지 누가 알았겠는가? 하. 전통의 계승자라며 그렇게 떠들던 사람들이 몸을 사리다니 내가 더 부끄럽네.”

    “······.”

    “그러니 자네 탓은 없으니 아무런 자책도 하지 말게.”

    애초 국내성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급파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 모든 걸 고려하여 도출한 결론으로 거란족의 협조를 끌어낸 을지문덕에게 죄가 있다면 정상적인 판단을 한 것밖에 없었다. 이를 탓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무리하여 추가로 약탈을 감행해도 탈이 나겠군.”

    온달의 말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그렇습니다. 현재 성과를 내려면 북평군을 넘어 기주 내부로 진군해야 합니다. 한데, 보급선이 이렇게 길어지면 고작 수천에 불과한 아군보다는 수만의 거란군을 주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라면 그들은 쉽사리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만일, 약탈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나서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입니다.”

    온달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하면, 그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어떠하겠나?”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기병을 이끌고 기주 내부로 진군하여 성과를 내며 생각을 달리하지 않겠나?”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그건 곤란할 듯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부마께서 적을 대파하여 큰 성과를 낼지라도 영주의 통치와는 무관합니다. 단지, 영주를 소수의 군세를 운용할 장성 이남 약탈의 교두보로 사용한다는 생각만 짙어질 뿐입니다. 이는 고구려의 위력으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백 승을 자신한다고 할지라도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단지, 고구려군만 통솔하는 게 아니라 거란족, 고막해족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고도의 정치력, 외교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하니 무엇하나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결국, 돌궐이나 수나라가 군사적 행보를 보이면 어찌 될지 불 보듯 뻔합니다. 수천의 기병을 동원하여 홀로 성과를 챙기는 고구려와 수만 혹은 수십만의 대군으로 영주를 압박하는 저들을 비교할 것이니 말입니다.”

    “음.”

    “이미 아군이 단독으로 움직일 정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을 건데.”

    기껏 확보한 영주에서 거란족과 고막해족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비루한 행보였다. 그런데 그들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단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작금의 정국은 고구려의 압도적인 국력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이 만든 기괴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었다.

    그때

    “이거 아무래도 내가 가장 적합할 때 당도했군.”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정의였다.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대인께서 오셨습니까.”

    고정의는 엷게 웃으면서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모두 고생이 많으셨네. 부마께서도 고생하셨소.”

    “대인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혹시 국내성에서 대군이 출병했습니까.”

    온달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대군의 출병은 미뤄졌소. 폐하께서 왕명을 내리셨기 때문이지요.”

    “왕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거란족과 고막해족을 한성으로 이주시키라는 왕명이외다.”

    생각하지 못한 왕명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고정의는 여전히 여유를 보이면서 말했다.

    “지금 영주의 정세를 보니 딱 좋소. 쉽사리 이주시킬 수 없다고 여겼는데 이보다 좋을 수는 없소.”

    자신감도 넘쳤다.

    빙그레 웃으며 온달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부마께서 정말 아군만 이끌고 기주 내부를 타격해오실 수 있겠소?”

    “정치, 외교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능히 해낼 수 있지요.”

    “좋소. 마음껏 하시오. 그 뒤는 내가 알아서 책임지리다.”

    “하하하! 고 대인이 이리 말씀하시니 어찌 걱정하겠소이까.”

    온달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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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족의 여러 부족 중 가장 세력이 큰 돌라의 눈이 커졌다.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들으신 그대로요. 본국과 돌궐이 힘을 보태어 수나라를 정벌할 것이외다.”

    고정의의 말에 돌라의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이게 말이 되는가? 고구려와 돌궐은 적대관계이다. 한데, 화친을 넘어 군사 동맹이라니. 게다가 돌궐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돌궐과 밀접한 관계인 돌라는 이 상황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막리지인 고정의의 말을 허언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그가 생각을 이어가는 새 거란족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해졌다.

    “하하하······.”

    “하하하······.”

    오적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을 맹렬하게 움직였다.

    ‘고구려와 돌궐의 60만 대군이라니.’

    양국의 협조한 것도 놀랍지만, 규모 역시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과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십만의 대군이라는 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실 거란족이 가장 원하는 건 세력의 균형이었다. 그들‘만’의 전쟁이 발생하면 무조건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군소 세력이었기에 균형이라는 건 너무나도 간절했다.

    되돌아보면 고보령의 죽음 이후 고구려에 신속을 청하긴 했으나 언제라도 말을 갈아탈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처세란 이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심대한 정치, 외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작금의 정국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애초 중립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돌궐의 편에 서거나 수나라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하지 않으면 생존이 아닌 존재가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정세의 변화가 급격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래서야 마치 그동안 우리를 시험대로 올린 것 같지 않은가.’

    냉정하게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한 돌궐이 미치지 않은 이상 ‘이미’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영주에 있는 거란족을 도와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준비하는 양국을 등지고 수나라와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누가 봐도 우리가 어찌 움직이는지 지켜본 것이다.’

    고작 수천에 불과한 고구려군을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찰나에 전해진 내용이었다. 모든 정황이 딱 맞았다. 오적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돌라와 오적은 고민을 이어가고, 나머지 부족장이 서로 눈알을 주고받을 때였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말갈의 유력가인 돌지계를 만나고 오느라 오늘에 당도한 것이외다.”

    이 말 한마디가 가지는 정치, 외교적 무게는 평소와는 다르고 무거웠다.

    지금 고구려는 거란보다 말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와 직결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전과 같았다면 거란족이 진심으로 고구려의 질서에 편입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에 굳이 입을 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돌궐과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황이었기에 평소와는 달리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고구려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소.”

    이어진 말이 너무나도 묘했다.

    돌지계는 그동안 친고구려를 표방한 인사였다.

    물론, 언제 어찌 태도를 바꿀지 누구도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한데, 이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 고정의는 모두를 지그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이어갔다.

    “말갈의 땅이 참으로 척박하여 농사도 적합하지 않소. 이럴 때 그가 청하기를 옥토를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겠소? 하여, 우리 폐하께서 왕명을 내리시어 한성에 말갈의 터전을 마련하셨으니 어찌 감읍하지 않을 수 있소. 이리된 사정이외다.”

    “한성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평양 옆에 그 한성 맞소.”

    오적은 눈을 껌뻑이며 고정의를 바라봤다.

    표면만 살핀다면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가 그토록 돌지계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상황에 따라서 독이 될 조건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심장부로 이주한다는 건 바꿔 말해서 언제라도 제거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오적이 곁 눈길로 부족장들을 살폈다.

    부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다.

    말 몇 마디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돌라를 쳐다봤으나 대체 무슨 생각에 빠진 것인지 홀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오적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어떤 상황인지를 떠나서 내부의 논의로 단합을 공고하게 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고구려의 어떤 의도에 따라서 거란족이 사분오열될 수가 있었다.

    당장 휴회를 주장하려고 할 때였다.

    “귀공들은 그리 사는 거 안 힘드오?”

    고정의의 말은 너무나도 도발적이었다.

    “본국과 돌궐 그리고 수나라 사이에서 누가 이길지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며 어디와 손을 잡을지 밤을 지새우고 회의하며 숨통을 이어가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소.”

    모욕적인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자긍심을 바닥을 던져버리는 말이었기에 살기까지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정의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나는 너무 피곤하고 고단할 것 같소. 그래서 다시 묻겠소.”

    보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로 고정의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안 피곤하오? 그렇게 사는 거.”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기가 팽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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