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철의 나라 [댓글 이벤트 2회차]
54화 철의 나라
이건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농기구가 부족하면 생산은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고, 병장기가 부족하면 약탈은 할 수가 없다.
이리되면 어찌 되겠는가?
야심 차게 힘껏 추진한 농업은 광활한 미경지를 바라만 보게 될 것이다. 단적으로 요동이나 국내성 일대는 겨울이 길어 토양이 장기간 얼어 있다. 대형 철제 농기구가 없으면 경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런 추세로 흐른다면 국민적 유흥인 약탈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불만은 폭발하게 된다.
하.
이러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아니, 목숨을 걸고 신경 써서 챙겨야 할 일을 이토록 엉성하게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너무 화가 났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하나를 처리하면 하나가 부족하고.
뭐. 이런 경우가 있나 모르겠다.
아니, 애초 태대사자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수동적인지 모르겠다.
이런 건 좀 알아서 챙기면 얼마나 좋을까.
답답하다. 정말.
단전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담아 오만상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난리가 났네. 추모왕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말일세. 여차하면 고구려에 새로운 전통이라도 생길 상황이네. 나는 자네가 해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파업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그간 보아온 고구려인의 놀라운 습득력 등을 되돌아볼 때 파업이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이를 조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어이가 없군요.”
이건 무슨 적반하장이라는 말인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자유를 쳐다봤다.
표정이 아주 뻔뻔했다.
“일이라는 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겁니다. 병장기와 농기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러십니까.”
“허. 참으로 놀랍군. 이 사달이 났는데도 당당할 수 있다니. 자네가 외교를 전담하게. 고구려의 기상을 만방에 떨치겠군.”
“거. 이거나 보십시오.”
지도를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은 평소보다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일단 들어나 보기로 하자는 생각으로 쓱 쳐다봤다.
“요동의 건안성을 비롯하여 10여 곳에서 지속하여 채광하고 있습니다.”
지도에는 철 생산지가 보기 좋게 표시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철 생산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요동 전선과 국내성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평양도성 근처에도 철 생산지가 있었다.
게다가 말이 열 곳이었지, 고구려 지도에 표기하니 사실상 전 국토에서 철을 생산하는 수준이긴 했다. 연자유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자신만만할 만했다.
“우리 고구려처럼 철을 부지런히 생산하는 나라도 드뭅니다.”
“음.”
“백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보급을 할 수 없으면 전쟁을 치를 수 없는 법이지요. 남쪽의 신라나 백제가 우리 고구려보다 병력의 수가 적은 건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병력이 30만에 육박하지 않습니까. 이들의 손에 창칼을 쥐여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백성이 많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을지라도 병장기가 부족하면 전투를 치를 수는 없는 법이다.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려면 결국, 철기 생산이 안정적이어야만 했다. 병장기를 2교대로 사용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연자유의 말은 절대로 틀린 게 아니었다. 철의 생산을 등한시했다면 고구려가 30만 대군을 운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내가 잠시 생각에 젖어있을 때 의기양양한 연자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답답하군요. 추모왕 이래 형님보다 답답한 분은 없었을 겁니다. 좋습니다. 보십시오.”
손가락에 힘을 딱 주면서 지도를 가리켰다.
가히 백만 대군을 통솔하는 장수의 위엄이었다.
“건안성의 내외에 제련로가 있으며, 제련까지 직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철기는 인근의 안시성, 백암성, 비사성 등 요동 전선으로 운송됩니다.”
건안성은 일대의 소금과 철을 총괄하는 요충지의 요충지였다.
만일, 이곳에 변고가 생기면 요동이 휘청일 수도 있었다.
이어진 설명을 들으며 지도를 살펴보니 특징이 있었다. 주요 철 생산지는 하천 연안의 평지, 철광, 수송에 유리해야 한다는 세 가지 공식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요동 전선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구도(舊都)였던 국내성 인근의 주력 철 생산지도 마찬가지였다. 평양 도성도 철의 운송이 원활하였다. 즉, 고구려는 철 생산지가 곧 주요 거점으로 직결되는 시스템으로 나라를 운영해온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연자유를 이해는커녕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잘 갖춰진 체계인데 농기구와 병장기를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나?”
“하. 그게 아니지요. 사람에 왜 이렇게 꼬여 있습니까? 이렇게 잘 갖춰진 체계인데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철 수요가 폭증한 겁니다. 이게 핵심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기존의 생산과 공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백성의 수가 많다고 하여 병력을 증강할 수는 없다. 군량이 있어야 하고, 창칼도 필요하다. 군제 개혁이라는 기조를 꺼내더라도 생산력이 전과 같다면 허구한 날 굶는 병졸이 돌멩이나 들고 뛰어다니는 군영이 탄생할 뿐이었다. 그러니 무엇하나 하려고 해도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시절 농경지를 확장한다는 건 철제 농기구와 ‘소’를 얼마나 보급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이런 요소가 뒤를 바쳐주지 않다면 뚜렷한 성과를 낼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한가할 수 있을까?
“자네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리타분하다고 할 수 있겠네.”
“뭐, 뭐라고 했습니까?”
“단군의 일화보다 더 고리타분한 이야기라는 걸세.”
진심이었다.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현실론이었다.
“일국의 기조를 덜어낼 정도로 강도 높은 개혁과 변화를 도모하고 있네. 새로운 농법을 도모하고, 태왕 직속의 상비군을 육성하고 있네. 어디 이뿐인가? 전통을 부활시켜 대대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일세.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하. 형님이야말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고구려 전역에서 철을 생산하고 점진적으로 보급하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어찌 이렇게 보편적인 역사의 흐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물론, 연자유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유기체인 국가가 주도할 역사의 변화와 발전은 기층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보편적이니 말이다.
누구도 농업의 중요성을 몰라서 방치하는 게 아니다. 농업의 발전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경작지도 버거운데 무슨 확장을 시도하겠는가.
우리 역사에서 시비법이나 이앙법이 중국보다 수백 년 이상 늦게 보급된 것도 제대로 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이러했겠는가? 그냥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현실이 만든 보편성이었다.
연자유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일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내 말을 똑바로 듣게. 모든 것이 전과 달리 이뤄지고 있네. 한데,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할 철 생산은 아무런 혁신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게 문제였다.
혁신은 절대 한 분야의 독주로 이뤄질 수 없다.
복잡하게 엮이며 전일적이고 유기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무려 수백 년을 앞선 농업 정책을 추진한다면 무리해서라도 다른 영역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단지 그대로라면 고구려의 농업 정책은 처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철 생산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연자유는 이를 모르고 태평하게 있는 것이다.
“제사상에 올라갈 때를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던 소를 5만 마리 데려왔네. 경작지도 확대할 것이네. 한데, 철 생산은 전처럼 할 것이니 순번을 기다리라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
“아니······.”
“수백 년 만에 전통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만방에 떨치는데 병장기가 부족하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허. 방법이 없습니다. 음. 혹시, 농법처럼 새로운 제련 기술이라도 알고 있습니까? 하면, 사정이 달라지지요.”
“없네. 그런 건.”
“허.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답답하군. 농법이 발전하는 건 농사를 광범위하게 짓기에 발생하는 현상에 불과하네. 제련 기술이라고 다르겠나? 우리 고구려의 제련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더 많은 철을 생산해봐야지. 그러면서 시행착오가 생기고, 더 빠른 기술을 찾기 위한 노력과 고민이 이어지는 걸세. 광개토태왕이래 확보된 철광이나 수백 년간 부여잡고 미동도 하지 않는데 무슨 발전이 있을 수 있나?”
기술의 발전은 곧 생산력의 확충이 이뤄질 때나 가능한 것이다.
내가 획기적인 제련 기술을 모른다고 하여 이 시절 고구려인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자면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폭발적인 생산력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그걸 어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건 아주 간단했다.
“더 많은 철을 채광하면 되는 걸세.”
“······이 대화 끝내고 싶군요.”
“찾아오게.”
“하.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귀한 철을 어찌 쉽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에서 철광을 더 확보하는 건 어렵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없기는 왜 없어.
북한 땅에 매장된 철이 50억 톤으로 세계 10대 규모라는 걸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심지어 고구려는 북한보다 더 넓다.
그러면 1톤이라도 더 많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인구 300만에 불과한 고구려가 아닌가.
만백성이 농기구를 하나씩 들고 있으며, 집에 창이나 칼을 갖춰둘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걸 말한다. 한 마디로 고구려는 전 백성의 무장화, 농민화를 꾀할 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밑장 빼기를 하는 걸까?
“있을 것일세.”
“예?”
“찾아서 채광하게.”
“혀, 형님.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나도 친절하게 어디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정말 모른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달려야지.
“귀족들보고 찾으라고 하게. 채광권을 준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것이네. 물론, 외부로 반출할 수는 없네.”
“······.”
“알아서 농기구와 무기도 만들 것이네. 제 사병은 알아서 해야지. 하나부터 열까지 조정에서 챙겨줄 수는 없지 않겠나? 아. 나도 사람 시켜서 찾을 것이네. 우리 가문도 뒤처질 수는 없지.”
그래도 왕씨 가문이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기는 해야 한다.
“조정에 생산량의 절반을 바치라고 하게.”
“······.”
“찾는 김에 금광도 찾으라고 하게.”
금도 2천 톤이 있다고 했다.
이것도 세계 10대 규모였다.
이러다가 진짜 황금의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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