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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56화 (56/199)

56화 더불어(2) [댓글 이벤트 4회차]

56화 더불어(2)

명백한 조롱이었다.

수치심이 치솟았다.

분명한 도발이었다.

모든 감정은 살기로 귀결됐다.

전장보다 더 진한 흉흉함이 장내를 매섭게 집어삼켰다.

그런데도 이 사달의 원흉인 고정의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뭐 하러 그렇게 사는 것이오?”

더 조롱하고 도발했다.

“이보시오!”

“당장 말을 거두시오!”

“기어이 목을 내놓을 생각이시오!”

격분한 부족장들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칼자루에 손을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정의는 여전히 태연했다.

“귀공들의 사정은 내가 잘 아오. 존중하오. 그런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이외다. 왜 그렇게 사오?”

결국

-차아아아앙!

부족장 한 명이 칼을 뽑았다.

“귀공은 목이 열 개는 되오?”

서늘한 경고였다.

고정의는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공의 이름이 무엇이오?”

“막하불이외다.”

“그렇소? 한데, 귀공은 내 이름을 아시오?”

“허. 이보시오.”

“내 이름을 아냐고 물었소.”

“막리지 고정의라고 들었소.”

“그렇소. 바로 그것이외다.”

고정의는 히죽거리며 막하불을 지그시 바라봤다.

묘한 건 그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을 모르는데, 공은 나를 알아야 하오.”

“뭐요······?”

고정의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게 현실이며, 나와 네놈의 위치라는 것이다.”

“이보시오! 감히······!”

“그 칼을 당장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칼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야 막하불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또한, 뭐라고 했느냐? 감히? 하. 그 두 글자가 네놈이 내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더냐?”

막하불은 주춤하며 주변을 곁 눈길로 살폈다. 하지만, 누구도 도와줄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달이 발생했는데도 모두 관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적과 돌라도 시선을 피했다.

막하불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딱 이 정도였다.

“너는 내가 누구로 보이는가.”

“······.”

“다시 말해야 하나?”

“······사죄드리오.”

“다시 내 앞에서 칼을 꺼내면 네놈과 수하들을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

“대답하라.”

“······명심하겠소.”

칼을 뽑은 막하불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비참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부족장들은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대화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넘어갔기에 할 수 있는 건 앉은 게 전부였다.

분위기가 다시 바로 잡히자 고정의는 턱을 치켜올렸다.

“공들이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시오?”

어느새 하대를 거두었다.

이미 위계를 입증했기에 더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고구려의 막리지이기 때문이외다. 만일, 공들이 나를 해하면 고구려가 대군을 이끌고 기어이 거란족을 멸할 것이니 말이오.”

“······.”

고구려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나라였다.

실제로 고구려의 호전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토록 호전적인 나라가 영토를 크게 탐하지 않는 사실이 천하제일의 의구심일 뿐이었다.

“아시겠소? 이것이 바로 국세라는 것이외다.”

“······.”

“해서, 묻겠소.”

고정의의 눈동자는 막하불의 눈을 담았다.

오직 그만 바라봤다.

“공도 이리 살고 싶지 않소?”

공‘들’이 아니라 ‘공’이었다.

오직 막하불을 향한 말이었다.

어수선해졌다.

“나처럼 살고 싶지 않소?”

“······.”

“원한다면 기회를 주리다.”

“어찌하면 그리 살 수 있소?”

고정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하불이 홀린 듯 답변했다.

다른 이가 무언가를 할 틈도 없었다.

“한성으로 오시면 그 길이 열릴 것이외다.”

“한성은 고구려의 영토인데 어찌 길이 열리는 것이오?”

“한성을 거점으로 삼아 신라를 약탈하면 되오.”

“뭐요······?”

“약탈은 늘 즐겁고 웅대한 것이오. 그러나 상대의 반격을 늘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소. 하지만, 고구려 남쪽의 신라를 약탈하는데 어찌 고민할 일이 있겠소? 마음껏 그들을 도륙 내어도 좋소.”

“신라의 대군이 반격할 것이외다.”

“하하하! 거점이 한성이외다. 그들이 감히 고구려의 영토를 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고작 신라 따위가? 단독으로?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소. 그리고······.”

고정의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한성은 고구려 평양 도성의 지척이외다. 이곳으로 대군을 출병한다는 건 생사결을 의미하는 것이오. 천하의 누가 감히 고구려와 국운을 걸고 겨룰 수 있소?”

명확한 사실이었다.

작금의 천하에 고구려와 총력전을 펼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승패를 떠나서 전쟁이 끝나면 국력이 쇠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면, 그 뒤는 어찌 되오?”

“때가 되면 고구려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할 것이외다. 그리고 고토 한수를 수복할 것이오. 이때 힘을 보탠다면 한수를 ‘영구히’ 내어줄 것이오.”

“영구히 준다고 하셨소?”

“한성처럼 잠시 머물 땅이 아니라 완벽한 공의 영토가 되오. 일국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옥토 한수가 말이외다.”

“······.”

“작금의 천하는 복잡하오. 홀로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없소. 한데, 말이외다. 바라봐야 하는 상대가 단일 세력이었다면 나름의 강온 전략을 펼칠 수 있으니 더 수월하지 않겠소? 영주는 영원히 이토록 복잡하겠으나 공이 날개를 달 수 있는 한수는 다르오. 그곳에서 힘을 사용한다면 상황은 아예 달라질 것이오.”

어느새 고정의의 목소리는 나근나근해졌다.

이 부드러운 음성은 막불해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되돌아보시오. 한수가 영주보다 협소한 건 맞소. 그러나 그 땅의 천하는 오직 고구려가 좌지우지할 것이며, 공은 우리의 혈맹이 될 것인데 어찌 고민할 일이 있겠소? 공이 바라볼 곳은 비루한 신라밖에 없소. 한데, 그들을 상대할 때 어찌 눈치 따위를 보겠소? 그저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오.”

거란족이 신라의 내부로 진군하여 국운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변방을 도륙낼 수는 있다. 또한, 이 방법은 철저한 약탈일 것이니 신라는 한수의 옥토로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보다 좋은 계책은 존재할 수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약탈할 수 있는 땅이외다.”

“······.”

“만에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우리 고구려가 능히 해결할 것이니 근심도 없을 것이외다.”

“······.”

“고구려는 공의 방패가 될 것이며, 공은 고구려의 창이 될 것이오. 그러하기에 더는 뒤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오.”

“만일 그러했다가 내가 한수 이남의 땅까지 도모하면 고구려는 어찌할 것이오?”

“다 가지시오.”

“······.”

담대하게 답변한 고정의는 속으로 크게 비웃었다.

‘그게 가당키나 하겠느냐. 고작 너희가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신라와 백제가 허술한 나라는 아니다. 그랬다면 그 역사가 오늘까지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니라.’

순수한 군사력을 떠나서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킨다는 건 일국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었다. 거란족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쪽을 지키는 완벽한 방패로서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할 것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되겠는가?

서쪽의 근심을 일소한 고구려는 오직 남쪽에 힘을 집중할 것이다. 완벽한 승리를 도모하였을 때 거란족의 영역은 오직 고구려의 천하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동화될 것이다.

이는 초안이었다.

고정의는 미소를 지었으나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귀공에게 보여준 이 오만함.”

“······.”

“바로 공의 미래요.”

“······.”

“어떻소? 함께 가겠소?”

“······.”

“오만한 역사의 주인이 앉는 자리로.”

고정의의 말은 항거할 수 없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칼을 들고 다퉜던 막불해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였다.

“막리지.”

오적이 나섰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철저하게 분열된다. 내부에서 반목하더라도 우리는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는 부족의 개별 결정이 아닌 거란 전체의 중지를 모아야 해.’

상황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내, 내가 가겠소.”

듣고 있던 부족장 다미가 말했다.

그의 말이 황급히 이어졌다.

“내 부족이 절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이보시오. 지금 무슨······.”

“애초 거란족에 제안되었던 내용이외다. 공이 홀로 독식할 게 아니오.”

순식간에 막불해와 다미가 다퉜다.

지켜보던 오적은 눈앞에 암담해지는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분열되었다. 여기서 나서지 않으면 고구려와 척을 지는 것인가? 아니면, 영주에서 신속하는 수준으로 잔류할 수 있는 것인가. 한데, 고정의는 어째서 나와 돌라에게는 언질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거란족의 여론을 주도하는 부족장 두 명은 어느 순간 철저하게 논의에서 배제됐다.

‘그렇구나. 우리를 배제하여 철저하게 여론을 흔들려고 한 것이다. 오늘의 논의는 여기서 마무리해야 한다.’

입술을 깨물며 다시 나서려고 할 때 고정의와 시선이 마주쳤다.

참으로

“······.”

괴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속내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제안을 할 뿐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소. 한데, 이는 명심하시오.”

“······.”

“수나라와 결탁하는 순간 60만 대군은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세력을 멸할 것이외다.”

“······.”

그 말과 동시에 고구려의 부관이 예를 갖추며 들어왔다.

“대인.”

넘겨주는 서찰을 받아 내용을 확인한 고정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을지문덕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왕 막리지가 그토록 중히 쓰라고 한 이유를 알겠구나.’

이제 막 약관을 넘은 무장의 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과가 지금 서찰에 적혀 있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거란족 부족장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찰을 가볍게 들어 보여주듯 움직였다. 동작은 참으로 유려했다.

“이런. 이미 고막해족은 동의했다고 하오.”

고정의는 엷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그들은 고보령의 수급까지 취했는데 더 물러설 곳이 없으니 판단이 빠를 수밖에 없소. 거란족도 천천히 논의해보시오.”

동시에 오적을 바라봤다.

“세력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외다.”

그리고 막불해와 다미를 바라봤다.

“오늘 본국의 부마께서는 장성을 넘으신다고 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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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서찰을 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보낸 허수를 고 대인께서 정확하게 사용하셨구나. 그러하니 나도 이제 고막해를 압박해야겠다.’

거란족과 고막해족은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니 고막해족을 설득했다는 위계를 사용하면 거란족이 크게 반응할 것이라는 판단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은 생각을 정리한 뒤 태연하게 물었다.

“허. 거란족의 상당수가 동의한 것 같소.”

“음.”

아회씨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침음성을 냈다.

을지문덕은 슬쩍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늉하며 말했다.

“한수 땅은 거란과 말갈이 취하게 되었군요. 아쉽지만 나는 이만 일어나겠소.”

“아. 을지공. 잠시 기다려보시오. 내가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렸소.”

아회씨가 을지문덕을 붙잡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무엇을 어찌하자는 말인지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좋을 것 같소.”

“나도 가리다. 그런데 내가 먼저 동의했다고 합시다.”

“그건 당연하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해서야 내가 공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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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양팔을 벌리며 크게 외쳤다.

“어찌하여 이제 오셨소!”

진심이 가득 담긴 나의 격렬한 환대에 진나라 사신단 정사 위정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더 해줬다.

“내가 공을 기다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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