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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53화 (53/199)

53화 대륙의 악몽 [댓글 이벤트 1회차]

53화 대륙의 악몽

천하가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고구려도 대대적인 개간에 돌입하니 마음도 급하고, 손도 급했다. 그러나 다리가 급한 건 아니다. 다 알아서 나를 찾아오니 말이다.

“하하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대인. 모처럼 밥 한 끼 하러 왔습니다.”

호탕한 웃음과 등장한 사람은 혜자였다.

우리 고구려의 핵심 전력이며 아주 유능한 사람이기에 나도 방긋 웃으면서 반겼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는데 잘됐소. 고려두를 잔뜩 준비하리다.”

“허. 대인. 참으로 서운합니다.”

“무슨 말이오?”

“소승도 상추쌈을 좋아합니다.”

“허. 고기를 먹소?”

“아니지요. 고려두로 잘 싸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내 생각이 짧았소.”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건데 내가 이걸 또 망각해버렸다.

크게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그간 왜 이리 격조하셨소? 멀리 다녀오셨소?”

“무슨 말씀입니까? 소승은 도성에 있었습니다.”

“허.”

다시 언급하지만, 혜자는 참으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대업을 수행해야 하는데 놀고먹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비법은 문진이 수행하고, 유학은 의연이 도맡으니 대인을 찾을 일이 없었을 뿐입니다. 더욱이 대인도 소승을 따로 찾지 않으셨지요.”

“해서, 그동안 그냥 노셨다는 거요?”

“허. 소승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처님께 불공을 올렸지요. 한데, 부처님께서 대체 약조한 사찰은 어찌 되는지 끝없이 물어보시는지라 소승이 진땀을 잔뜩 흘렸습니다.”

“······.”

사찰 안 지어준다고 파업했다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썩은 미소를 지어버렸다.

하지만, 어쨌거나 약조한 부분이었기에 내가 할 말이 없긴 했다.

“대사. 내가 약조를 어기려는 게 아니라 지금은 여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외다.”

“소승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 계속 여쭤보시는데 세세한 사정을 몰라서 답변을 드리지 못할 뿐입니다. 불자로서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찰 중건에 투입할 재력과 인원을 따로 확보하는 게 쉽지 않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물론입니다. 소승은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한데, 어젯밤 부처님께서 소승의 꿈에 나타나시어 ‘집현전이 참으로 아름답도다!’ 하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속이 상하신 것 같기에 소승은 그저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혜자가 연락하는 부처님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썩은 미소가 진해질 때 혜자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인. 고구려가 비약하니 불교를 더 진흥해야지요.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물질적인 부처님과 메시아 혜자의 욕구가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봐야 할 거 같았다.

자연스레 경청의 자세를 보이자 혜자가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 유학을 장려하고 계시지요. 한데, 단지 농학자의 양성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 대사의 생각이 무척이나 궁금하구려.”

“유학은 충(忠)을 강조한다고 했습니다. 왕명이라면 목숨을 던지는 귀족의 나라라니. 소승은 소름이 끼치고 말았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호전적인 귀족들이 이권이 아니라 신념으로서 오직 ‘태왕을 위하여!’ 이리 외치며 달린다는 건 유사 이래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고구려의 모습이 있다.

혜자의 말처럼 귀족이 조선의 사대부처럼 신념으로서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소승은 온몸으로 환영합니다. 한데, 대인. 백성은 어찌할 겁니까. 그들을 상대로 유학을 익히게 할 수도 없지요. 하면, 우리 중생들을 묶어낼 수단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소승은 무조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일국을 통치하고, 귀족을 휘어잡고, 백성의 정신세계를 장악하는 철학을 만들어낸다는 건 판타지다. 이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여기에 와서 사상을 창조해낼 수는 없다. 아니, 변형조차 어렵다.

유학이나 불교는 단지 학문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지배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체할 ‘무언가’는 아무나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절 경지에 오른 이들은 달랐다.

이들은 일국을 통치할 ‘사상’을 입안할 역량이 있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혜자가 그중 한 명이다.

“물론, 유학자가 백성을 만나 하나씩 이를 수는 있지요. 한데, 우리 고구려의 학자들은 타국의 학자보다 할 일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학문도 익히고, 농업도 장려해야 하고, 말도 타고, 활도 쏴야 하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나는 대사가 오늘 내게 흥미로운 말을 전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소만.”

“소승이 설마 빈손으로 왔겠습니까.”

“오늘 창고에 있는 고려두를 모두 꺼내오리다. 상추도 마찬가지요.”

“껄껄껄. 제석천께서 아주 기뻐하시겠군요.”

혜자의 말이 귀를 통과하고 뇌로 들어가자 잠시 사고가 멈췄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제석천은 불교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신 중 한 명이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제석천이라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입니다.

이제는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불법이라고 하면······?”

“왕명이지요.”

“큭······.”

“만백성이 불법을 지키는 제석천처럼 왕명을 수행하는 나라. 아름답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전투력이 하늘을 찌르는 고구려 백성이다.

특기가 전쟁이며, 취미가 약탈이 아니었던가.

이들에게 사상적 사고까지 부여된다면 이건 그냥 공포다.

나는 미친 듯이 웃느라 대꾸도 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고구려에 온 이상 유학이나 불교 모두 고구려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무엇이 부족하여 그들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소승에게 맡겨주신다면 제석천을 고구려의 신으로 만들어내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유학으로 귀족의 ‘충’을 구현하고, 불교로 백성을 장악한다.

기어이 이를 해낸다면 고구려는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감당할 수 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질지언정 내전이나 역모로 국호가 바뀔 일은 없다.

백성은 태왕을 신으로 추앙할 것이며, 귀족은 절대적 권능과 정통성을 가진 군주로 인지할 것이니 말이다.

귀족부터 백성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태왕을 위하여 달릴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대륙의 악몽이 아니겠는가.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소. 고구려 전역에 낭만이 깃들겠구려.”

저들에게는 악몽, 우리에게는 낭만일 것이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한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다 말씀하시오. 내가 다 해결하리다.”

“휴. 부처님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내일 당장 설계도 작업을 진행 시킬 것이외다. 아무쪼록 부처님의 마음에 들기만을 바라오.”

“이런.”

혜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감고 염불을 읊조렸다.

이렇게 보면 역시나 엄청난 고승의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이럴 수가.”

염불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끝내 허락하셨습니다. 어찌 이토록 자비로우실 수가.”

“하하하! 그렇소? 참으로 기쁜 일이외다. 그나저나 그 부처님께서는 답변이 참으로 빠르시오.”

“고구려인이 원래 성질이 급하지요.”

“혹시 그 부처님은 고구려인이시오?”

“고구려에 왔으니 다 고구려인이 되어야지요. 하여, 소승이 그렇게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좋소.”

그리고 쓱 물었다.

“대사가 생각하는 고구려의 모습은 무엇이오?”

“고구려지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답변이었다.

모두 고구려식으로 탈바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런. 우문현답이었소.”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때였다.

“왕 대인! 계십니까!”

“왕 대인! 계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공포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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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밖으로 나가보니 수십 명의 백성이 몰려 있었다. 심지어 잔뜩 성이 난 상태였는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에게 원한을 산 적은 없다.

“대인께서 불평과 불만은 언제든 토로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한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백주에 이리도 많이 몰려온 것인가?”

“소인들이 정말 살 수가 없습니다.”

“응?”

“고작 이리 살고자 고구려에 태어난 게 아닙니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이러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만 나왔다.

고구려의 역사를 새로 이끌어가는 막리지로서의 위엄이라는 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눈을 부라리면서 내쫓으면 되겠으나 어찌 그리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 거칠긴 하지만 성정이 그러한 것이기에 불순한 건 아니었으며, 내가 민원을 넣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보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성들은 농기구를 바닥에 던졌다.

아직도 나는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멀뚱히 쳐다만 봤다.

“아니, 농사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한데, 멀쩡한 농기구가 별로 없습니다.”

“예. 심지어 수량도 부족합니다. 땅을 손으로 파라면 팔 수 있으나 그러면 군사 훈련에 지장이 있습니다.”

“소인들의 손이 상하는 건 오직 적의 심장을 뚫는 순간밖에 없습니다. 고작 땅을 파느라 상하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상비군 3천 명에 속한 이들이었다.

불만이 생겨 나름대로 대표단을 꾸려서 내게 온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자세히 살피니 농기구 상태가 영 엉망이긴 했다. 저걸로 경작하면 성과를 떠나서 몸이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약조도 다릅니다.”

“약조가 다르다니?”

“분명 소처럼 일하면 병장기도 주고 뭐 그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보다 더 열심히 경작하는데 군사 훈련할 때는 작대기나 들고 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병장기 갖고 싶어서 지원한 겁니다. 그런데 이리 나오시니 참으로 속상합니다.”

이건 사정이 있었다.

체계적인 계획을 꾸려 집행한 게 아니라 하루아침에 3천 명을 모집했다. 그러하니 단기간에 병장기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존에 있는 건 당연히 임자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소인들도 왔습니다.”

“이 사람아. 우리는 소생이라고 해야지.”

“같은 거라고 들었네.”

“알지. 아는데 소생이 더 있어 보인다고 의연 대사가 이르셨네.”

“그런가?”

이들은 권농을 집행하는 유학자들이었다.

“자네들은 왜 왔나? 경전을 익히는데 농기구나 병장기가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허. 대인. 소생들은 별 의미도 없는 공도의 말이나 배우며 죽으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 애초 공도는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한 겁니까. 듣다가 죽겠습니다. 정말.”

의연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뭘 어찌했기에 이들이 이런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일까.

너무 궁금해졌다.

“어쨌거나 소생들도 싸울 수 있습니다. 낮에는 눈을 감고 공도를 만나고, 밤에는 창칼을 휘둘러야 고구려인이 아니겠습니까. 공도도 항산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니 당연히 약탈해와야지요. 원래 항산이 넉넉해야 우리의 항심인 낭만을 이어갈 수 있는 겁니다.”

“······맹도일세. 공도가 아니라.”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비슷한 말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소생들에게도 병장기를 내려주시고, 밤에는 훈련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야만 허구한 날 배신이나 하는 사문난적, 신라를 수시로 벌하지 않겠습니까.”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외쳤다.

“우리도 멀쩡한 창을 좀 내려주십시오!”

“소인은 칼이 좋습니다.”

“화살과 활이 더 낭만적이지요.”

그러면서 외쳤다.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쟁기질을 소보다 더 잘합니다.”

너무나도 거센 항의였다.

“철이 귀하다는 말씀만은 하지 마십시오!”

“가뜩이나 돼지에게 한수 약탈의 기회를 뺏겨서 속이 쓰린 상태이니 말입니다.”

“멀쩡한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습니다.”

“병장기도 기본입니다.”

그러더니 모두 뒤돌아서 가버렸다.

이건 사실상 파업이었다.

정말 바람 잘 날 없는 나라다.

나는 볼을 씰룩이며 혜자를 불렀다.

“대사.”

“예. 대인.”

“연자유. 어디 있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연자유를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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