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십일조
34화 십일조
세상에 이토록 경제 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둑도 이런 도둑이 없다.
결국,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자네들은 어찌 이토록 뻔뻔한가? 동명성왕 이래 이렇게 뻔뻔한 귀족은 당대가 처음일 것이네.”
평양과 국내성을 싸잡아서 욕해버렸다.
귀족들은 내 반응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정말 당황했다.
그래서 내 눈은 더 커지고 말았다.
너무 놀라서 말이 바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왕 대인. 이치에 맞지 않아서 한 말입니다. 가문의 사병을 동원한 약탈의 성과를 1할씩이나 내라니요.”
“허. 이치라고 했나? 내가 참된 이치를 말해주겠네.”
“이번은 소인들의 말이 맞습니다. 선대가 남긴 전통을 모두 찾아봐도 대인의 말씀과 부합되는 사례는 없습니다.”
“시끄럽네. 내 말을 들어보게.”
나는 이 뻔뻔한 사람들을 바로 잡아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섣불리 과거를 꺼내지는 말게.”
“과거가 곧 전통입니다. 어찌 꺼내지 말라고 하십니까.”
“답답하군. 전통은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걸세. 늘 시대의 흐름과 맞춰서 계승해야 한다는 걸세.”
“1할을 내는 것이 창조적 계승이며 시대에 발맞춘 변화라는 겁니까?”
“당연하네. 보시게. 과거 우리 고구려가 종횡무진 말을 타고 달릴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었네. 한데, 작금의 천하가 그러한가?”
“······.”
“우리가 맹렬하게 약탈할 수나라는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네. 여차하면 총력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말일세. 하지만 고구려가 방패를 칠 것이기에 마음껏 가보라고 한 것이네. 생각이라는 걸 해보게. 하면, 최소한의 대가는 내는 게 옳지 않나?”
여태껏 약탈이 중단된 이유를 고스란히 말해줬다.
귀족들은 입맛을 다시며 나서지는 않았다.
내 말이 맞으니까.
아니, 애초 내 말을 반박하려면 ‘고구려는 우리 사병이 지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그냥 판을 엎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이라는 한다면 이리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판이었다.
“많지도 않네. 성과의 1할을 고구려에 바치라고 한 것인데 이게 아깝나? 어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
“왜 말이 없나? 고구려가 남인가?
“······아닙니다.”
“알면서 이리 나오는 건가? 정말 당황스럽군. 여차하면 전쟁이 터질 수도 있건만 모든 성과를 그냥 삼키려고 한 것인가? 하면, 고구려는 대체 뭘 먹고 성장하나? 참으로 못된 심보가 아닐 수 없네.”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대충 흘겨보며 잠시 전날의 대화를 되새겼다.
*****
수나라 사람들의 눈동자는 불안했고, 사지는 떨리고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무런 징후도 없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고구려 땅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모두 살수로 이주시키게. 그리고 우리 말을 빨리 익히면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해주는 게 좋을 것이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학자도 몇 명 있었습니다.”
“우대하게.”
시대를 막론하고 지식인은 중용하는 게 관례다.
1,000명의 인원 중에서 기술자도 있을 건데 이문진이 학자만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데, 처우를 어찌하실 겁니까?”
“그걸 왜 묻나? 노비로 데려왔으니 노비로 부려야지. 고구려인도 노비가 있는데 수나라인을 데려와서 노비로 삼지 않으면 탈이 나는 법일세.”
“예? 대인. 수나라 사람이기에 당연히 노비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지배계급을 고구려인, 피지배계급은 중국인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도 이게 양날의 검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단순하게 바라볼 때 이들은 전쟁 포로라고 할 수 있다.
노비가 아닌 다른 신분이 된다면 내부에서 불만이 터질 수도 있다.
가령 수나라 사람이 고구려인을 노비로 부린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귀족부터 노비까지 강렬한 전쟁 이데올로기로 인프라가 구축된 이 나라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 시절에 ‘노비를 해방하자!’라고 외칠 정도로 내가 이상적인 미친놈은 아니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왜 탈이 납니까?”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맞다.
“위두대형과 상의하게.”
“저를 찾으셨습니까.”
대뜸 뒤에서 들린 목소리, 연자유였다.
대체 언제부터 뒤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위두대형씩이나 되면서 왜 이러는 걸까.
그런데 오히려 연자유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문진의 말이 맞습니다. 태어난 나라가 다르다고 하여 무조건 노비로 삼는 건 고구려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노비 중에 고구려인이 있는 것과 저들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음.”
“허. 형님. 설마 태어난 나라가 다르다고 하여 차별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이럴 때는 말을 줄이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아니, 고구려의 귀족 중에서는 뿌리가 말갈인인 사람이 많습니다. 하면, 이들은 타국의 사람입니까. 심지어 이들도 고구려인을 노비로 부리고 있습니다.”
수백 년 쟁투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사회가 경직되어 있을 리가 없다. 그랬다가는 빠르게 멸망했을 것이다. 내가 고구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아니다. 그냥 요즘 피곤해서 실언한 것이다.
“아닐세. 내가 잘못한 게 맞네. 내가 사과는 또 빠르다네.”
그러나 한발 늦어버렸다.
“연 대인의 말씀대로입니다. ‘타국의 사람은 곧 노비다.’라고 하는 건 참으로 열등한 무리나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고구려는 말과 풍습이 다르다고 하여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자네가 참으로 옳은 말을 했네. 원론적으로 말이 다르면 어떻고, 풍습이 다르면 어떠한가. 고구려에 살면 고구려 사람이 되는 것이니 말일세.”
갑자기 두 사람이 떠들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무릇, 동화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입니다. 뿌리가 고구려인 사람, 말갈인 사람, 거란족인 사람······이 모두가 모여 제 풍습을 가지고 또 배우며 하나로 뭉친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지요. 그들의 풍습 모두가 고구려의 풍습이 아니겠습니까.”
“자네의 안목이 참으로 탁월하네. 반면, 서토의 무리가 말하는 동화는 참으로 저열하기 이를 데가 없네. 남의 풍습을 존중하지 않고 말살하고자 하니 어찌 역사가 오래 이어지며 전통이 계승되겠는가.”
“원래 자신감이 없는 무리가 저열한 법입니다. 그러니 남의 풍습을 무조건 짓밟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는 모두 포용할 수 있지요.”
“그게 바로 고구려일세.”
고구려라는 이름 석 자에 모든 걸 포용한다는 것이었다.
없애는 게 아니라.
되돌아보면 내가 했던 모든 일에 정치적 이권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약간’의 ‘반발’은 있었으나 행위 자체에 대한 반대는 없었다.
산업 중 가장 보수적일 수도 있는 농법을 바꾸는 것인데도 거의 저항이 없었다.
또한, 유학을 기층에서부터 제대로 도입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식으로 해석하며 부드럽게 수용했다. 기껏 나온 반대라는 건 승려인 혜자가 불교와 유학의 위계를 걱정한 것에 불과했다.
여긴 유일신이 와도 그저 고구려 신 중 한 명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나라였다.
즉, 고구려는 다른 하늘 아래 존재할 수가 없었다.
다 포용하여 고구려’식‘으로 포용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 논쟁을 나는 나대로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전원 노비로 삼게. 그러나 우리 말을 익히면 하호가 될 것이네.”
“나쁘지 않은 절충안이군요.”
사실 소유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데려온 인원은 정확하게 왕씨 가문의 자력으로 일군 결과였다.
그런데 이들을 모두 자유민으로 만들면 애매한 선례로 남는다. 아니, 안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귀족들도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왕씨 가문의 힘은 절대로 압도적이어야만 한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나는 무조건 강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비자유민인 하호로 전환하는 것까지만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1할은 왕실로 귀속하겠네.”
“허. 정말입니까?”
“내가 왜 농을 하나? 고구려도 먹고 살아야지.”
1할에 대한 처우는 고양성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아마도 백성으로 삼겠지만 말이다.
*****
상념에서 벗어난 뒤 여전히 볼이 복어처럼 부풀어 있는 귀족들을 빤히 쳐다봤다.
“나머지 인원에 대한 처우는 알아서 해도 좋으니 1할만 내게.”
9할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고구려의 국호를 내건 전쟁이 아닌 가문이 나선 약탈의 성과다. 이건 명백하게 귀족들의 사유재산이기에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이래도 고구려로 모든 성과가 귀속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들이 일하게 될 신 경작지는 모조리 조세를 징수할 것이다. 조정은 손해 볼 게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에서 노비라는 이름은 예비군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국력에서 보탬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곧 사병이니 말이다.
자고로 고구려는 백성이나 하호나 노비나 다들 전쟁이 터지면 죽자고 덤비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물론, 중국에서 잡아 온 이들을 어찌 휘어잡아 동화시킬지는 귀족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나도 했는데 자네들은 왜 못하나? 다시 묻겠네. 고구려가 남인가?”
“아니지요. 어찌 고구려가 남입니까. 휴. 알겠습니다. 하면, 약조를 하나 해주십시오.”
“말해보게. 무엇인가.”
“확실하게 뒷감당을 해주셔야 합니다. 나중에 감당이 안 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시면 곤란합니다. 혹은 외교적 항의를 감당하지 못하여 가문의 후계자를 벌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셔야 합니다.”
얼마나 거하게 가져오려고 이런 말까지 하는 걸까?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 해주려고 1할을 내라는 걸세.”
“또한, 절대로 1할을 넘기시면 안 됩니다.”
“물론일세.”
“좋습니다. 동의하지요.”
말이 1할이지 정말 엄청난 규모였다.
나 혼자서 천 명을 잡아 왔다.
이들이 다 달라붙으면 순식간에 수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사람이 많이 사니까.
“한데, 신라는 그냥 두실 요량입니까? 오히려 더 빠르게 약탈할 수 있을 겁니다.”
가까워서 좋긴 한데, 신라는 가난해서 투자 대비 성과도 영 별로일 거 같았다.
“지금은 그냥 둘까 싶네.”
“신라는 믿을 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미리 약탈하여 힘을 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뭐 하러 그런 나라까지 매사에 신경을 써야 하나?”
“예?”
“서토나 돌궐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신라가 감히 우리를 범할 수는 있나?”
사실 애석하게도 신라와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온 힘을 다해서 중국의 통일 왕조 등장을 막는 게 옳았다.
이것만 해내면 된다. 중국에 통일 왕조가 등판하여 고구려와 혈전을 펼치지 않는 이상 신라는 절대로 설칠 수 없다.
고구려는 무슨, 혼자서는 백제도 감당 못하는 나라인데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 남진과 신라는 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아닙니까.”
“때가 되면 내려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돼지가 2~3만 마리 정도 되면 일단 타격 한 번 해보긴 할 것이다.
혹은 힘이 너무 넘쳐서 달밤에 체조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슬쩍 가보기도 할 생각이었다.
대충 전통 계승 사업의 초안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본업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세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모두 뽕나무를 심게.”
대대적으로 양잠업을 시행한다.
이는 만백성이 부유해질 수 있는 길이다.
농업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만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길도 제시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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