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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33화 (33/199)
  • 33화 시대

    33화 시대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영주의 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생존에 누구보다도 예민한 거란의 부족장들은 은밀한 회합을 열었다.

    털이 복스럽게 난 부족장, 돌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영주 땅의 정세가 예사롭지 않소. 주체는 놀랍게도 고구려요.”

    ‘놀랍게도’라는 표현은 부족장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너도나도 곱씹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궐이 공격해도 방어만 하고, 북제가 일갈하자 5천 호를 쇄환했던 고구려였소. 솔직히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소.”

    눈이 찢어진 부족장, 오적이 동의하며 말했다.

    “참으로 정확한 분석입니다. 한데, 이번에 슬쩍 보내본 3천 호는 크게 환대받고 있습니다.”

    “환대? 자세히 말해보시오.”

    “현재 요동인데 고구려에서 원하는 건 모두 지원해준다고 합니다. 농업을 원하면 땅을 주고, 목축을 원하면 가축을 내린다고 말입니다.”

    실체적인 국력을 떠나서 서쪽의 영토를 탐하지 않았기에 늘 온건적이던 고구려가 이렇게 달라졌다. 말 그대로 ‘우리 고구려가 달라졌어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고구려가 갑자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아야 하오. 그래야만 전처럼 뒤통수를 맞지 않소.”

    “그렇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부분입니다. 해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최근 주목할만한 변수는 수나라의 건국밖에 없었습니다.”

    “수나라? 그 나라가 뭐 했소? 양견이 찬탈해서 황제가 된 게 전부라고 들었소만. 이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 않소이까.”

    “일단 들어보시지요. 화북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고구려는 외교로 잘 풀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화북의 나라에서는 매번 눈을 부라리면서 고구려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과거 5천 호를 내놓으라고 북제가 어깃장을 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서토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고구려와 신경전을 펼쳤다.

    사실상 위계를 정하려는 외교전이었는데 고구려가 늘 한 수 양보하면서 마무리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태도를 달리하기로 했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의문은 깔끔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참에 고구려가 외교 노선을 싹 바꿔보겠다고 나선 것이라는 말이오?”

    “그게 아니고서는 부마까지 보내서 고보령과 혈전을 치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껏 양측의 우호 관계는 고구려의 양보가 선행되어야만 했다. 한데, 이리하지 않고 남쪽과 연계하여 북을 압박한다면 천하의 질서가 어찌 바꿀지 쉽사리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고보령을 압박하는 지금의 정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부마를 보냈다는 건 고보령을 확실하게 정리하려는 고구려의 의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일리가 있소. 만일, 고구려가 영주를 독점하면 수나라는 발작하듯 반응할 것이외다. 그리고 전처럼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에게 양보를 요구할 것이외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구려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수나라는 남쪽의 진을 도모하지 않은 이상 고구려와 충돌하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니 말입니다. 결국, 고구려의 영주 지배를 수나라가 인정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고구려의 이상 행동을 분석한 부족장들은 잠시 침묵했다.

    결론이 상당히 흥미롭고 새로웠기 때문이었다.

    “수성이 아닌 공세로 전환한 고구려라.”

    “전처럼 서토의 승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국력으로 동방의 패권을 독자적 확보를 선언한 겁니다.”

    현재 북방의 질서는 수나라와 돌궐 그리고 고구려라는 거대 세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유지되었다. 그러한데 고구려가 전과는 달리 서쪽을 향해서 공세적으로 입장을 전환한다면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떻소? 고구려가 장성 이남으로 진군할 수도 있겠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총력전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방책이니 말입니다. 또한, 장성 이북의 영주만 도모해도 수나라가 받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건데 굳이 무리하겠습니까?”

    “하긴. 고구려가 영주를 독점하는 순간 수나라는 어지간해서는 남정에 나서지도 못하겠구려.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는 순간 고구려가 장성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도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일 것이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고구려가 단지 영주를 독점하는 것만으로도 천하의 질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모두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라가 정리했다.

    “북방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시대가 개막하고 있는 것이외다.”

    “하면,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도 시대에 순응하는 게 옳소.”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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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평야는 송곳 하나 꽂을 곳 없이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세상은 이러한 장면을 대풍이라고 했다.

    “대인. 소생의 짧은 견문으로는 지금껏 고구려에 이런 풍년은 없었습니다.”

    이문진의 목소리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황금물결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신선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백성들이 이토록 즐거워하는 건 처음 보는군요. 제천행사를 즐기던 기쁨과 전쟁에 대한 열정도 그들을 웃게 만들지만, 이토록 순수한 미소를 짓는 건 정말 처음입니다.”

    이문진의 말대로 경작을 일군 백성들은 순박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음주 가무를 즐기던 열정의 밤에 보였던 박장대소와 전쟁에 열광하던 뜨거움이 아닌 잔잔한 미소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사람 그 자체의 온기가 느껴졌다.

    참으로 보기 좋았다.

    농업은 이토록 사람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러니 더 확장하는 게 옳았다.

    감상은 여기까지.

    이문진의 보고가 시작됐다.

    “대인. 수나라인을 잡아 오면 보낼 만한 곳을 검토해봤습니다.”

    “어디인가.”

    “살수 하류의 평야가 적합할 듯합니다. 대인께서 이르신 상류에서 풍부하게 공급된 토사가 잘 쌓인 곳이었습니다. 현재 농업이 이뤄지긴 하지만 규모가 크지는 않습니다. 또한······.”

    대충 말을 들어보니 충적평야가 넓게 분포한 곳이었다. 또, 침식 평야로 추정되는 지역도 있는 것 같은데 말로만 들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위치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옥토라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자네가 볼 때 그 땅을 경작하려면 몇 명이나 필요하겠던가?”

    “소생이 아직 농업에 통달한 건 아니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족히 만 명은 필요한 듯했습니다. 물론, 우경을 도입하면 사정은 또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무려 10,000명이라고 했다.

    인원이 이 정도라는 건 청천강 일대의 평야가 엄청나다는 걸 의미했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곳은 조정에서 관리해야겠군. 고구려인과 수나라인을 각각 5할씩 비중을 두어 배치할 것이니 준비하게.”

    “예? 수나라인이 5천 명이나 되겠습니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네. 천 명씩 다섯 번 부지런히 옮기면 5천 명이 되는 것일세.”

    “아······.”

    “그리고 그 땅은 옥토이기에 경작을 희망하는 백성이 있더라도 조세를 내야 할 것이네.”

    “그리 진행하겠습니다.”

    말하다 보니 들판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쳤는데 참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옥토가 아닌 땅이 더 많지 않은가. 또한, 조정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옥토도 있을 것이네. 애석하게도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습니다.”

    “이곳을 백성이나 귀족이 개간하면 참으로 좋을 것이네. 해서,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해보았네.”

    “이르시지요.”

    “조정에서 직접 개간하는 곳을 제외하고 자력으로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면 귀족은 3년, 백성은 5년간 조세를 거두지 않겠네.”

    바야흐로 대 개간의 시대를 개막하는 것이다.

    이문진은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소생이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개간이 활발해지고 경작에 뛰어드는 백성이 늘어날수록 인분을 구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네. 하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렇군요. 새로운 시비법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군요. 소생의 물음이 우매했습니다.”

    “하하하. 되었네. 어쨌든 우선 가축의 분뇨로 준비하되 자력으로 경작지를 구하려는 백성은 지원하도록 하게. 무릇, 자작농이 많고 편안해야만 편안해야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일세.”

    “그리하겠습니다. 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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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완전 각을 잡고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는 모두 황금물결이 만든 현상이었다.

    나를 믿고 따라오긴 했으나 막상 눈으로 보게 된 엄청난 결과물은 사람을 이렇게 충성스럽게 만드는 법이었다. 여기에 보태어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라는 거창한 칭호까지 생겼기에 상황은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전에 자네 중 누군가가 수확량만 챙겨가면 되는 데 뭘 그렇게 말이 많으냐고 했었던 것 같군.”

    “그 형편 없는 놈이 대체 누구입니까. 소인이 당장 가서 다리를 분지르겠습니다.”

    “소인이 국내성으로 달려가서 사병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누굽니까. 그놈이.”

    귀족들은 눈을 부라리며 범인을 색출하고자 했다.

    한 명이 눈에 띄게 사색이 되었길래 그냥 빤히 쳐다만 봐줬다.

    물론, 분위기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들에게 미리 말해둘 것이 있네.”

    “소인들은 이미 심장에 새겨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축을 미리 확보하게. 가축이 곧 농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니 말일세.”

    “가축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우경은 당연할 것이며, 돼지와 양의 분뇨는 시비법에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네. 조만간 이문진이 크게 알릴 것이니 자네들은 미리 준비하게.”

    “오. 시비법이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행하는 게 옳습니다. 한데, 가축을 키우는 건 막대한 인력이 필요합니다. 실은 대인께서 농자천하지대본의 웅대한 목표를 하늘 아래 새기신 이후로 세상이 참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작도 해야 하고, 황충의 알도 구하고, 전통도 이어가야 하기에 무언가를 더 하려니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시일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 수가 있을까?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전통의 계승을 왜 하나? 일할 사람 구하려고 계승하는 게 아닌가? 조만간 서토에서 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경작도 할 사람을 잔뜩 구할 건데 그런 걱정은 대체 왜 하는 것인가?”

    “이런. 소인들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나저나 과연 대인은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이십니다.”

    “됐네.”

    대충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형님!”

    사랑채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들어온 사람은 연자유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아니,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했던 위두대형 연자유 대인이 아니시오!”

    “거! 진짜 사람이 왜 그럽니까!? 됐습니다. 급보입니다. 강이식이 수나라 사람 1,000여 명을 잡아 왔습니다. 그리고 영주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

    “오!”

    “오!”

    전통의 집행이 성공적이었기에 귀족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외침은 끈적했고, 눈동자에는 열정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양측에서 승전고가 울렸다는 건 이제 본격적으로 가문이 나서는 약탈의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바야흐로 낭만의 시대가 도래했군.”

    “낭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국가와 총력전에 얽매이지 않는 전통, 이것이야말로 낭만이 아니겠는가?”

    귀족들은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낭만적으로 말했다.

    “바로 이러한 모든 걸 낭만이라고 하는 걸세. 천하는 이제 야박하게 약탈을 도외시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하여, 낭만의 시대가 열렸다고 한 것일세. 모두 기뻐하게.”

    “하하하. 참으로 입에 착착 감기는 말이군요. 낭만이라. 오늘 대인께 또 새로운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역시 낭만이라면 배를 타고 약탈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평양계와

    “하하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무릇, 낭만이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지요. 약탈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국내계의 경쟁도 시작됐다.

    전처럼 내란이 아니라 외부로 힘을 방출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었다.

    단지 생존을 위한 약탈이 아니었다.

    보급이 튼튼하고 국력이 뒷받침되는 고구려가 ‘국가적인’ 방침으로 약탈을 하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낭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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