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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35화 (35/199)

35화 또 다른 전통

35화 또 다른 전통

뽕나무로 양잠업을 크게 일으키면 막대한 부를 확보할 수 있다.

맹자도 말했다. ‘뽕나무를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이다.

물론, 최소한 조선 중후기 상업 성장 정도일 때가 기준이었으니 고구려는 어림도 없긴 했다. 듣자니 온달이 상업 세력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긴 했다. 그런데 이건 그냥 0에서 1이 된 수준에 불과했다. 왜 이다지도 상업이 성장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랬다.

그런데

“······.”

“······.”

“······.”

대답이 없다.

“혹시 뽕나무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참고로 고구려는 적당한 수준으로 양잠업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내 눈에는 금은으로 장식한 금수 의복이 너무 잘 보였다.

관모도 황금빛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가 옵션이 귀족들이 지금 뽕나무를 거절하고 있었다.

“이 사치스러운 인간들을 봤나.”

내 목소리에 담긴 언짢음을 느꼈을까.

약간의 술렁임이 있었다.

그때였다.

“대형.”

늘 듣고만 있던 고식이 나섰다.

“그간 대형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않았습니다. 돌궐을 파악하느라 바쁘기에 내치에 크게 관여할 여력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조금 전 이르셨던 1할도 동의했습니다. 한데, 이 일은 다소 다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뽕나무를 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양잠업은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백성이나 하호 혹은 노비에게 좋은 옷을 입히자고 여력을 낭비하기는 어렵습니다. 농사에 황충의 알을 채집하고 약탈까지 해야 합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주십시오.”

“백성들에게 따뜻한 옷을 입히자는 건데 기어이 이렇게 나올 건가? 자네가 걸치고 있는 옷은 그렇게 화려한데 말일세.”

“······.”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고식의 눈동자가 좀 이상했다.

고구려로 온 이후로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일전에 단체로 개길 때 느꼈던 불순함도 지금보다는 괜찮았던 거 같았다.

좋게 말하면 의구심, 나쁘게 말하면 경멸이 담겼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형께 그런 말씀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뭐?”

“예. 인정하겠습니다. 내가 백성의 옷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태어난 나라로 차별한 적은 없습니다. 나는 돌궐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번진 거야?

나는 조금 당황하여 말하려고 했으나

“소인은 말갈인 돌근행입니다. 부친께서는 따로 세력을 이끌고 계시며 소인은 고구려 조정에 있습니다. 이게 죄가 됩니까? 그렇다면 소인은 이제 평양도성을 떠나야 합니까?”

이 상황의 아킬레스건이 등장해버렸다.

정말 당황했다.

돌근행은 말갈의 유력 세력인 돌지계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범고구려계로서 명백하게 말갈의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했다.

“조상의 뿌리로 사람을 차별한다면 누가 고구려로 오겠습니까.”

“혹시라도 알려질까 두렵습니다.”

“결과 고구려가 그런 방침이라고 여기면 어찌하실 겁니까. 그런 말을 듣는 건 정말 씻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이건 자네가 잘못한 게 맞네. 내 평생 고구려를 위해서 싸웠으나 포로도 차별하지는 않았네.”

고흘도 보탰다.

참고로 고흘은 평양계로 분류되긴 했으나 국내계라고도 할 수 있는 상당히 복잡한 가계도의 주인공이었다. 뿌리는 국내계이지만, 왕권 강화가 진행될 때 근왕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양측 다 고흘을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데,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나? 무려 막리지가 말일세.”

“······.”

순식간에 나는 차별주의자가 됐다.

그런데 이걸 인정하면 진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1할을 보태는 건 다 이해할 것이네. 처음 들었을 때는 생소한 것이니 당황했을 수도 있으나 이번 사안이 아예 다르지. 아무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고구려의 풍습이 바뀔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고흘의 말은 천금보다 무겁기에 더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릇,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물타기와 함께라면 더 좋다.

“내가 언제 양잠업을 해서 수나라가 고향인 사람은 모르쇠로 일관한다고 했나?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한 말이네. 됐네! 어쨌든 양잠업은 하지 않겠다는 자네들의 마음은 내가 잘 알겠네. 나중에 후회하지 말게. 만일, 뒤늦게 숟가락을 올리면 손목을 잘라버릴 것이네.”

이 정도로 쏘아주자 귀족들이 조금 머뭇거렸다.

고식과 고흘도 당황했는지 더 말하지 못했다.

“썩 물러가게! 장군도 가십시오!”

바로 해산시켰다.

일단 숨부터 좀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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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계의 수장인 고정의는 최근 평양도성의 움직임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하루를 넘기지 않고 국내성으로 매일 전해지는 서찰의 내용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끄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전통의 부활이라.”

전통의 부활이었다.

보기 좋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란 눈을 한 가서일이 보였다.

“그나저나 자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군.”

“실은 대인을 만나고자 온 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대인을 만났을 뿐이지요.”

“그렇겠지. 국내성의 일을 보고 그림으로 남기고자 왔겠지.”

“바로 그렇습니다. 전통을 집행하는 기병을 보려면 이곳에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어릴 때와 지금이나 똑같아.”

“하하하. 소생이 아직 인생을 얼마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가서일은 부지런히 대꾸하며 가느다란 눈동자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최대한 많은 걸 보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정의는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한데, 자네 중책을 맡았다던데 너무 한가한 거 아닌가?”

“중책을 맡았지만 일을 소생이 하는 건 아니지요. 석 달 치 계획을 다 작성하여 사람들에게 시켜두었습니다. 즉, 석달은 자리를 비워도 됩니다. 왕 대인에게도 허락받았고요.”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나?”

“당연하지요. 소생은 항상 당당합니다.”

드디어 주변을 살피던 가서일의 눈동자가 고정의를 담았다.

“그나저나 대인께서는 언제까지 국내성에 계실 생각입니까. 늘 궁금했습니다.”

“왜? 나에 대해서도 그려볼 생각인가?”

“국내계의 수장이지 않습니까. 흥미를 보이는 건 당연하지요.”

고정의는 여전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에 젖은 듯 하늘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도성을 떠나면서 국내계 귀족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일러주시면 다 기억하겠습니다.”

“막리지 왕고덕이 하는 일은 반대하지 말고 다 들어주라고 했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호전적인 연자유나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고식과는 달리 막리지는 화합을 중시했으니까.”

“바꿔 말씀하시면 대인께서 도성에 잔류하시면 다툼이 발생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내가 있으면 다툴 수밖에 없네.”

가서일은 차분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가 공석이라서 그렇습니까?”

“잘 아는군.”

현재 고구려의 최고 관등인 대대로는 공석이었다.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후보를 말하라고 한다면 응당 왕고덕과 고정의였다.

“내가 막리지를 역임한 상태로 도성에 있으면 국내계 귀족은 나를 중심으로 공고하게 뭉쳤을 것이네. 그리고 대대로를 선출하기 위해서 끝없이 다퉜겠지.”

“아마도 그렇겠지요. 대대로는 귀족의 합의로 결정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막리지를 내려놓고 국내성으로 온 것일세. 그러니 어찌 되었던가? 막리지가 없어진 국내계 귀족은 온순해졌고 평양계 수장이자 유일한 막리지가 된 왕고덕과 대국을 논의하게 되었네.”

실제로 고정의가 국내성으로 온 이후 고구려는 정쟁의 급격하게 줄었다.

국내계 귀족이 구심점을 상실한 탓도 있지만, 고정의가 떠나기 전 남긴 말을 천금처럼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국내계 귀족들 사이에서 고정의의 장악력은 대단했다.

“하면, 복귀하실 의사가 없으신 겁니까?”

“최근 평양도성의 일이 너무 흥미로워서 마음이 동하긴 하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농업을 진흥하더니 전통을 부활시켰지 않은가. 이 일이 어찌 흘러가게 될지 너무나도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긴 하네.”

“특히, 전통의 부활에 더 많은 흥미가 동하셨겠군요.”

“하하하. 말이야 바른말로 전통이라고 하면 국내계 귀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어느새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며 천하를 호령했던 선대의 전설과도 같은 역사를 살아생전 경험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찌 준비되었습니까.”

“이미 무려성으로 서찰을 보냈네. 때마침 고승이 무려성에 있기에 모든 건 순탄하지 않겠나? 또한, 며칠 내로 수천의 기병을 출병시킬 것이네.”

“수천이라고 하셨습니까?”

“첫 시작인데 무리하면 곤란하지. 일단 가볍게 움직여 보는 게 좋지 않겠나?”

가서일은 기분 좋게 웃었다.

딱 적절한 시기에 와서 기병의 출병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문마다 적당하게 차출한 상태일세. 세부적인 사안만 조율하면 된다네.”

“세부적인 사안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결국, 수나라의 재화를 가져오는 일일세. 처음이라서 가문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연합할 것인데 어찌 배분할 것인지 명확하게 정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일은 정확하게 해야만 탈이 생기지 않는 법일세.”

가서일은 흥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림을 그릴 생각에 흥분이 된 것이다.

“하하하. 소생이 때를 잘 타고 나서 이 모든 걸 보고 그리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기쁩니다.”

“자네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일세.”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한데, 대인. 소생이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대인께서는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걸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미소를 품던 고정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통은 창조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이어가는 걸세. 이건 반론의 여지가 없네.”

“그렇습니까? 하면,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도성으로 복귀하실 겁니까?”

“음. 평양계 귀족이 국내계 귀족의 수장인 내게 복귀 여부를 묻는다? 흥미롭군.”

“소생의 생각으로는 대인께서 조만간 복귀하실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방금 말씀하셨습니다.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서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업과 유학 그리고 작금의 서진. 대인께서 생각하시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지요. 그러니 복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뭔가? 내 생각을 자네에게 듣고 싶군.”

“소생은 줄곧 대인은 고구려에 대대로가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이제는 복귀하시겠지요. 다만, 때를 늦추시는 건 수나라를 크게 흔들어 금의환향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래야만 고구려를 진두지휘하며 대대로에 가까워진 왕 대인을 견제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절반은 맞췄네.”

“이런. 절반입니까? 소생은 세상 만물을 늘 부지런히 관찰하여 능히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여겼는데 절반이라니 속상하군요.”

“그건 연륜의 문제겠지.”

“하면······.”

“때가 되면 알 것이네.”

고정의는 축객령을 내렸다.

가서일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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