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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7화 (17/199)

17화 헤게모니(2)

17화 헤게모니(2)

세상에는 막연한 이미지라는 게 존재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내게 유학자 혹은 선비라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전하! 아니 되옵니다!’를 연발하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들이었다.

팩트 여부를 떠나서 매체를 통해서 하도 자주 접했기에 이런 인식이 뇌에 박혀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소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기 넘치는 장정들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아직은 지망생에 불과한 이들이었으나 때가 무르익으면 유학자가 될 것이니 내 머리에 박힌 이미지를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규모도 처음 내가 예상했던 10명 남짓이 아니었다.

족히 100명은 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혜자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사.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왜 그러십니까. 많이 모이면 좋은 거지요.”

그렇긴 한데 이게 말처럼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다.

지망생이 100명이라는 건 식솔까지 포함하여 500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고 그저 당황스러운 수준이었다.

“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눈으로 보고 계신 겁니다.”

혜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지망생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진짜 먹여 살려줍니까?”

“여기서 먼 산을 쳐다보고 있으면 밥도 주고 쌀도 주고 다 해준다던데요?”

“대인께서는 산신령이시군요.”

“그동안 귀족들만 밥 먹여주는 게 영 별로긴 했는데 드디어 우리도 먹여주시는군요.”

“식솔도 먹여준다던데 대체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배움에 대한 열의는 무슨.

말이 번지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그냥 사라진 게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다.

이런 속도로 말이 번지고 왜곡되는 전통 사회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라면 ‘놀고먹는 게 아니라 공부 열심히 하면 장학금 주는 거다. 생각해보고 다시 오는 게 어때?’라고 좋게 말해봤자 ‘글자 모른다고 무시하던데? 우리보고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래? 재수 없어.’라고 퍼질 게 뻔했다.

게다가 검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 검증이라는 것도 뭘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백지가 부끄러울 정도로 머릿속이 순백에 가까운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검증을 하겠나.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싸움 날 수도 있다. 그러니 검증은 가볍게 머릿속에서 제거했다.

놀랍게도 결론은 오늘 모인 100명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사. 승려는 준비가 되었소?”

“그렇긴 합니다.”

“좋소. 하면, 바로 시작하지요.”

“대인. 대체 어찌 시작하자는 겁니까. 소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허. 대사. 또 왜 이러시오?”

“서책이 있어야 학문을 익힐 수 있습니다. 100명이니 100권이 필요한데 어디서 구합니까? 설마 사찰에서 유학서 100권이 비축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성의 귀족 가문에서 다 구해와도 100권이 안 될 겁니다. 이를 어찌합니까?”

“아니, 없으면 준비하면 되는 게 아니겠소?”

“······음. 예. 그러니 대인께서 준비해주십시오. 소승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

선생님이 교재를 직접 구할 수는 없지.

이 정도는 내가 하자.

“경전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보겠소. 일단 천자문을 익히게 하시오.”

“천자문은 서책이 필요 없습니까?”

“아니······천자문 정도는 입으로 익히고, 글자는 바닥에 대충 적으면서 시작해보시오.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서책만이 아니라 지필묵도 필요할 겁니다.”

그래.

공부하려면 연필이랑 지우개도 있어야지.

이것도 내가 하자.

“서책도 내가 구하고, 지필묵도 내가 구하겠소.”

혜자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습니다. 대인.”

“천자문을 가장 먼저 익힌 사람 5명은 쌀 1석을 내린다고 전하시오.”

“예? 1석이나요?”

“물론이오.”

“심지어 쌀을 말입니까?”

“그렇소.”

혜자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부처님처럼 생긴 사람이 눈동자에는 시기와 질투가 담겨 있었다.

정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1년 농사가 끝나면 수확량을 확인할 수 있소. 그때 보고 사찰 하나 크게 지어봅시다.”

“방금 부처님께서 당장 시작하라고 일갈하셨습니다. 한데, 저들을 어디서 강의합니까?”

“······일단 그 정도는 사찰에서 좀 수용해서 진행해주면 좋겠소만.”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부처님이 계시는 사찰에서 어찌 공자를······.”

“공양미를 마련해보지요.”

“부처님은 자비로우시니 다 이해하실 겁니다.”

“늘 자비를 베푸셨으면 하오. 갈대처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지 마시고.”

“하하하! 부처님께서도 다 뜻이 있으시겠지요.”

힘으로 강제할 게 있고, 하면 안 되는 게 있다.

아무리 내가 최대 주주라고 할지라도 혜자를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다.

유학자 십만 양병설에 두 팔 걷고 나서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타협하면서 가야 하는 법이다. 안 그러면 무조건 탈이 생긴다.

소소하게는 혜자가 꽁해있지 않은 것도 좋은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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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정말 예측대로 흘러갔다.

그러니까

-한데, 대인. 차후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차후라니요? 잘 키운 지망생이 훌륭한 유학자가 되길 바랄 뿐이지요.

-그게 아니라 정치적 파급이 상당할 겁니다.

-사재로 진행하는 일인데 파급이 왜 생기겠소.

-그렇긴 합니다만 대인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무도 개인의 일이라고 보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무려 100명입니다.

-음.

-의도가 없으실지라도 의도로 보이지요. 게다가 의도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오.

-예. 그러니 무조건 탈이 생길 겁니다. 대비하지 않으시면 곤란한 상황과 직면하실 겁니다.

혜자의 충고를 되새기며 잔뜩 몰려온 귀족들을 쳐다봤다. 국내계 귀족만 온 게 아니라 평양계 귀족도 보였다. 온달도 보였다. 을지문덕은 없었고.

이런 게 대동단결이 아니면 무엇이 대동단결이겠는가.

순수하게 감탄할 때 정파를 초월한 귀족을 대표하여 온달이 성큼 나섰다.

“대인.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다들 의구심이 있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공주께서도 의구심을 가지셨소?”

“······.”

한 마디에 온달은 그냥 벙어리가 됐다.

이쯤 되고 나니 조만간 시간 내서 평강 공주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다.

결국, 다른 귀족이 나섰다.

이름은 모르겠고, 국내계 귀족이었다.

“대인. 그저 순수한 궁금증을 해결하러 온 겁니다. 최근 100명을 모집하여 천자문을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틀렸네. 천자문이 아니라 유학을 가르칠 것이네. 사찰에서도 협조하기로 하여 시작이 아주 순탄하게 되었다네.”

“음. 대인. 그런데 이 문제는······.”

구구절절하게 말하는데 제대로 헛돌고 있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구렁이 쌈 싸 먹는 정치화법은 내 취향도 아니었고.

“내가 도성의 인분을 수레에 담아 옮기고 있네.”

“유학은······예?”

“시비법을 도입하려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구려에 도입할 수 있는 시비법 아니 거름이라고 한다면 밑거름과 덧거름이 있네. 밑거름은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나 덧거름은 상당히 까다롭지.”

“예? 똥이 두 개로 나뉘는 겁니까? 똑같이 더럽고 냄새도 지독한데 어찌 분류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됐네. 내가 잘 가르칠 것이네.”

“오.”

“그런데 배울 자격은 내가 엄선할 것이네.”

“설마······.”

국내계 귀족은 술렁였고, 평양계 귀족은 들뜬 반응을 보였다.

순식간에 유학의 이야기는 사라졌다.

“때가 되면 시험을 치를 것이며, 일정한 유학적 소양을 입증한 이들에게만 알려줄 것이네. 나는 이를 과거시험이라고 부를 것이라네.”

“예······?”

“예······?”

같은 한 음절이었으나 국내계 귀족은 ‘무슨 말이세요?’라는 의미였고, 평양계 귀족은 ‘우리가 남이 되나요?’라는 의미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대인의 식객(食客)이 되는 겁니다. 결국, 권농을 대인이 독식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온화하고 늘 원리원칙을 준수하셨던 대인께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말 똑바로 하게.”

“예?”

“대체 언제부터 고구려가 자네 말처럼 다 같이 손잡고 대동단결하며 달렸나?”

“예······?”

“평양계 귀족과 국내계 귀족의 반목이 고구려를 보기 좋게 갈라서 먹고 있는데 나는 왜 그래야 하나?”

“······.”

좋은 게 좋은 거라서 둥글게 둥글게 갈 생각은 없었다.

하나를 들어주면 또 하나를 달라고 할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공공재로 만들어버리는 게 이들의 심리였다.

“아. 자네들끼리 나눠 먹어야 하는 고구려인데 갑자기 겸상해야 할 무언가가 보이니 모처럼 대동단결하여 여기까지 온 건 참으로 보기가 좋군. 부마? 대단하시오? 고구려의 귀족을 이처럼 한데 모아내니 말이오.”

온달이 당황하여 나서려고 했으나 나는 그냥 손을 내저었다.

이왕 이렇게 다 모였으니 내가 할 말만 전하면 된다.

오히려 잘됐다.

나는 내게 따진 귀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독식하는 게 보기 싫으면 자네도 식객을 마련하게. 그들이 과거시험을 치르면 될 것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

“아. 이참에 하나 더 말해야겠군. 시조신을 모실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의 핏줄은 과거시험을 치를 수 없을 것이네. 나중에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이러고 싶군.”

“대인······.”

“시끄럽네. 지금부터 모두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네.”

“······.”

“새로운 경작지는 신청하는 귀족에게 배분할 것이네. 그러나 내어주는 게 아닐세. 조정에 수확량의 5할을 바쳐야 할 것이네”

국가가 지주이며, 귀족이 소작농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굴릴지는 귀족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까지는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물론, 지금 저들이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쓸 정신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내민 조건에 눈이 커졌으니까.

“대, 대인. 5할은 너무 과합니다.”

“매사 왜 그렇게 불만이 많나? 태어나길 잘 태어났으면 숨 쉬는 것도 즐거울 것인데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리고 과하다고 생각하면 신청하지 말게.”

“······.”

“해당 농지는 신농법을 익힌 유학자들이 파견되어 권농을 이를 것이네. 살충제와 밑거름, 덧거름을 모두 사용할 것이니 성과는 확실하게 보장하지.”

표정이 어두워진 귀족들에게 최종 정리라는 걸 해줬다.

“잘 듣게. 귀족은 전쟁과 외교를 담당하고, 유학자는 권농을 담당할 것이네. 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일세.”

이 정도면 딱 좋다.

할 말을 다 끝냈다.

귀족들은 복잡한 표정을 보이면서 모두 물러났다.

말 그대로 농법은 내게서 비롯하는 것이니 무슨 명분을 꺼내도 ‘이거 내 것인데?’라는 말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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