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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8화 (18/199)

18화 기초공사

18화 기초공사

늘 그렇듯 새로운 길이라는 건 결과가 불확실한 법이다.

성과를 100% 확신할 수 없는 새로운 농법의 도입이라는 건 다들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평범’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나의 비범함을 설명할 방법은 결과밖에 없었다.

자고로 모든 건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고, 우려와 걱정 따위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게다가 여러 번 언급했듯 왕고덕은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았다.

그의 이름이 곧 신뢰였고, 그의 말이 곧 믿음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인산인해였다.

“대인. 아직 늦은 건 아니겠지요?”

“우리가 가진 밥자리가 수십 번인데 좋은 땅으로 내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늘 대인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아니, 경작지를 분양받으려는 고객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걱정은 시간 낭비다.

나는 마음이 급해 보이는 고객님들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해줬다.

“오늘 온 사람들은 모두 경작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잠시 뜸을 들였다.

나도 여론이라는 걸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달래듯이 말을 꺼냈다.

“수확량의 5할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우려가 크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런데 일단은 1년 계약일세. 나를 믿고 일단 편히 시작해보시게. 만일, 수확량이 생각보다 적으면 그때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세. 내 말을 이해하셨나?”

내 말이 끝날 때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제조가 끝난 인분 거름이 수레에 실려서 등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으나 나는 태연하게 뒷짐을 쥐고 말했다.

“당장 배분할 거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네.”

대충 손을 내저으니 수레에 올려진 거름통의 뚜껑이 열렸다.

냄새가 사방을 지배했다.

“저건 밑거름일세. 밑거름은 경작을 시작할 때 사용하면 될 것이네. 그리고······.”

밑거름과 덧거름은 제조 방법이 달랐다.

또한, 사용처도 달랐는데 밑거름은 경작을 시작할 때, 덧거름은 작물이 잘 자라고 있을 때 추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귀족들의 개인 농지는 농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덧거름을 사용하되, 분양받게 될 농경지에는 밑거름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또한, 이미 살충제를 받았을 것이네. 특히, 어디에 자주 사용하는지 이르겠네. 하전(下田, 수확이 좋지 않은 밭)의 물이 차가워지면 논벼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에 석회를 거름으로 사용하면 토양이 따뜻해질 것일세. 내 말을 명심하게. 살충제로 거름의 효과를 볼 곳은 물이 차가운 하전일세. 그 외의 논밭에서는 살충으로만 사용하게. 자세한 내용은 차차 전하겠네.”

물론, 세세한 설명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비밀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귀족이 농법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실제로 농사를 진행할 실무자들의 일이었다.

어차피 나와 이들이 나눠야 할 대화는 구체적인 실무가 아니라 큰 틀의 계약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오늘 자네들이 숙지해야 할 내용이 있네. 알다시피 일전에 귀족의 농부를 동원하여 경작했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는데 그 땅은 어찌 됩니까? 아무래도 경작이 조금이라도 진행되었으니 일이 수월할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대가를 내야 할 것 같네.”

“예······?”

“아니, 생각해보게. 허허벌판도 아니고 다른 귀족의 노력으로 땅이 경작된 것인데 대가를 내야지.”

당시는 초안이 진행되던 때라서 연자유의 농부만 투입됐다.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유학 경전과 지필묵 따위로 받을 것이네.”

“예? 대인. 지필묵이야 그렇다고 할지라도 유학 경전은 당장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

“빠를수록 좋을 것이네. 선입금하는 귀족부터 땅을 줄 것이네.”

“대인. 소인은 당장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좋은 자세일세.”

“바로 구하겠습니다. 족히 50명은 사용할 지필묵을 오늘 당장 구할 수 있습니다.”

“자네 이름을 적어놓고 가게.”

그리고 한 마디를 보탰다.

“구하기 쉬운 지필묵부터 신청하는 게 좋을 것이네. 시간이 지나면 경전을 구해와야 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니까.”

“대, 대인. 소인도 있습니다.”

“저, 저부터 받아주십시오.”

계약서를 체결했다.

선입금을 마무리하는 귀족은 바로 경작지를 받아 갈 것이다.

시작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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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을 다 보내고 나니 기력이 빠졌다.

“휴.”

상당히 피곤했다.

혜자가 거들어 주고 있긴 하지만, 거름도 제조하랴, 식객들 수업 준비도 하랴 일이 너무 많았다. 여기에 개인비서까지 하라고 하면 염주로 내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끙.”

이게 원래는 전면 보급해서 알아서 일이 진행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고 아름다운 고구려의 정세를 알게 된 마당에 마냥 평화롭게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의 지식이 곧 무기가 되는 세상이었기에 최대한 활용하면서 목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때가 되면 식객들이 훌륭한 유학자로 성장하여 나를······그날이 언제 오냐고.

멍하게 석양이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대인.”

상당히 깔끔한 복색을 한 약관의 청년이 등장했다.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어서 그냥 쳐다보다가 말했다.

“밥 한 끼 하러 왔나?”

“내어주신다면 먹겠습니다.”

“넉살이 좋군. 한데, 초면이긴 한가?”

나는 너를 모르는데, 나는 유명 인사라서 너는 나를 알겠지만, 혹시라도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 밥 달라고 찾아올 정도로 문턱이 낮은 건 아니었다. 당장 을지문덕이 편히 오가는 사실만으로도 놀라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초면입니다.”

“그래? 혹시 누구의 소개로 오셨나?”

“소생은 인맥으로 세상에 나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내게 인사 청탁을 하러 온 것인가?”

“아닙니다.”

“하면?”

“소생의 재주가 쓰일 수 있을지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

“보통 보탬이 된다고 하지 않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과거 국상을 역임하셨던 을파소 대인이지요. 송구합니다만 소생은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소서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면 면접을 보도록 하자.

가문은 한미한 듯하여 출신은 묻지 않고 블라인드로 볼 생각이었다.

아.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지.

“이름이 무엇인가.”

“이문진이라고 합니다.”

유기 100권을 신집 5권으로 만든 영양왕의 신하, 이문진이었다.

그냥 통과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군. 함께 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런. 이유도 묻지 않나?”

“소생에게 좋은 일인데 평가를 들어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문현답이로군.”

몇 마디 나눠보지 않았으나 이문진은 깔끔한 사람이었다.

외면도 그렇고, 언행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데, 대인. 소생은 조정이 아니라 대인을 보필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소생은 권농에 관심이 많습니다.”

“유학자인가?”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 하면, 묻겠네. 지금 무엇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나?”

“역시 우경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다.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하나 묻지. 우경을 크게 확장하려면 어찌하는 게 좋겠나?”

“대인. 고구려에 소가 부족한 건 아닙니다. 소는 무척이나 많지만 대부분 제사용입니다. 이를 타파할 수 있다면 우경이 널리 퍼질 겁니다.”

“그렇지. 그 귀한 소를 제사에 모두 사용하는 건 낭비지.”

“어떻습니까.”

은근한 물음이었다.

이제 보니까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것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생각이군.”

권농의 후계자, 이문진으로 정했다.

오늘부터 하나씩 내용을 전달해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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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볼 때부터 떨렸는데 의자에 앉은 지금도 떨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아.”

“참으로 좋은 소식인데 어찌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옵니까. 폐하.”

“하하하. 그렇지요. 참으로 좋은 소식이외다. 콩의 수확량이 5할이나 늘었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고작 5할에 불과한데 그렇게까지 기뻐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폐하. 신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 많사옵니다.”

“그렇소······?”

제때 시작했으면 고작 50% 증가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게 아쉬웠으나 고양성은 이것만 해도 충격적인 성과였다.

그러니 크게 기뻐하는 게 옳은데도 다소 당황한 건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 폐하께서 분명 신에게 소를 구해주겠노라 하셨사옵니다. 하온데, 신은 소를 한 마리도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신을 믿지 못하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사옵니다.”

“막리지. 내가 구하고 있소. 그러니 진정하시오.”

“폐하. 오매불망 제사만 기다리는 소들은 경작지에서 일하면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옵니까?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사옵니다.”

이문진이 제사용 소를 말했을 때 바로 달려오고 싶었으나 참은 건 이날을 위해서였다. 고양성이 소를 바로 구해주지 않는 건 나를 믿지 못한 건 아니라 수확량을 보고 결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수확량이 늘어날지 가늠할 수 없으니 섣불리 수십 마리, 수백 마리의 소를 동원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5할의 성과를 보이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그리고 제사용 소를 언급하니 고양성의 표정은 근본부터 썩었다.

이 시절 제사라는 건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하는 수준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이건 왕권의 권위는 물론이거니와 귀족의 기득권과도 연결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거부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폐하. 어차피 소는 소에 불과하옵니다.”

“······.”

“대저 왕후장상의 소가 따로 있사옵니까? 아니옵니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이미 콩의 수확량이 5할이나 늘었사옵니다. 이를 비축하지 않고 소의 사료로 사용하면 소의 수는 많이 늘어날 것이옵니다. 아. 인분 비료의 성과를 우려하실 수도 있겠사옵니다. 신을 믿지 못하시는 것이니 어찌 이해하지 않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

“하면, 인분 비료의 성과가 나오면 다시 오겠사옵니다. 신이 기어이 결과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오니 어찌 속이 쓰리지 않겠사옵니까. 그러고 보니 연자유도 신의 행보를 보고 우려했는데 폐하께서도 같으셨사옵니다.”

“구해주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고양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제사보다 더 백성을 취하게 할 성과를 가져오셔야 하오.”

“오곡이 풍성하게 익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백성들은 충성을 바칠 것이옵니다. 원래 생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옵니다. 하여, 신이 청하옵니다. 적당한 곳에 돼지와 양을 사육할까 하옵니다. 신은 폐하께서 이 또한 동의해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구해주리다.”

고양성은 분명 기쁜 기색이었다.

그런데 엄청난 성과에 어안이 벙벙하여 이러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분위기는 아주 좋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 요구를 했다.

“신이 알아보았는데 과거 말갈족은 부유한 가문일 경우 돼지를 수백 마리나 사육했사옵니다.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천 마리 구해주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구려가 소나 돼지를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인문학적 상황이 열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살충제로 수확량이 50% 늘었다.

인분 비료의 효과까지 보태진다면 어찌 될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성과 하나 나오니까 탄탄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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