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75화 (76/91)

75.

성민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아무도 부르지 않은 채로 혼자 마시는 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쓰고 매웠다.

그리고 슬펐다.

날이 날이니 만큼 더 했는지도 모른다.

새벽 두시도 훨씬 넘은 시간.

성민은 미세하게 남아있는 정신으로 겨우겨우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지, 새벽이지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오늘따라 그 불빛이 유난히 싫다.

집이라고 찾아왔는데 제일먼저 자신을 반기는, 한눈에 들어올 수 없이 큰 대문이 싫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이라도 하듯 높디높은 벽이 싫다.

큰 대지위에 위풍당당하게 솟아오른 저 집이 싫다.

불필요하게 넓은 정원까지 소유하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저 집이 싫다.

늘 큰 보폭이 없는 감정으로 오가던 집인데, 송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해서도,

다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상처들에 가슴 아파 하면서도...

싫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던 집인데....

오늘은 자신이 이런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구역질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역겹고 또 역겨웠다.

“이제 오니?”

구역질이 날 만큼 못 마땅한 집이 싫어 발길을 돌리려다...

다시 발걸음을 고쳐 집으로 향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라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엄청난 소음을 동반하여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걱정 가득한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를 반긴다.

그러나 곧, 술 냄새가 가득 베인 성민의 모습을 보며

한층 더 깊은 근심을 표면위로 자연스레 끌어올린다.

늘 있었던 일이고 익숙한 일이긴 하지만

집이 싫다보니 성민은 어머니의 그런 모습도, 관심도 싫어졌다.

생각해보니 도이는 어머니의 정을 무척이나 그리워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었던 것도 같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응?”

한동안 신도이라는 한 아이로 인해 어두웠던 그늘에서 벗어났나 싶었더니

표정 없이 차가운 얼굴로 새벽 두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그것도 초점 없는 서늘한 눈으로 당당하게 들어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민을 보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또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있는 걸가 걱정이 된다.

눈물이 없을 뿐이지 슬프게 우는 성민의 눈동자를 보며

도대체 뭘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디서 잔뜩 취해가지고 온 건지, 쯧쯧. 도무지 네 놈은 좀 잡을 수가 없구나.

도대체 시간이 몇 신데 이 난리냐? 술에 취해 들어왔으면 조용히 올라가서 잘 것이지.”

윤희가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안방 문이 열리며 잠에서 막 일어난 듯 피곤해 보이는 아버지가 나온다.

성민의 눈이 그를 멀거니 바라본다.

“쯧쯧,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게야?!”

초점을 잃은 눈을 그저 술기운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린 그는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

“도무지 네 놈을 좋게 봐주려야 좋게 봐줄 수가 없구나!”

“아버지...”

“내가 그 아이를 마음에 내켜 한다고 모든 일이 끝났다고는 생각...”

“나 왜 이렇게 잘난 놈으로 만들었어요?”

“…….”

초점 없는 성민의 눈이, 멀거니 아버지를 응시하던 성민의 눈에

뜨거운 뭔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호하게 못이라도 박듯, 성민을 위협하듯 흘러나오던 시니컬한 그의 말이 멈췄다.

이번에는 권 회장 쪽에서 물끄러미 성민을 응시한다.

“나 왜 이렇게 잘 난 놈으로 만들었냐니까?”

“자식 놈이라도 기껏 키워놨더니 술에 취해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러게 나 같은 놈은 좀 낳지 말지. 좀 참지...”

“그게 기껏 낳아준 부모 앞에서 할 소리냐?”

그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성민은 거기서 말을 그치지 않았다.

어쩐지 아버지의 안색을 보아서는 그쳤으면 좋으련만,

성민의 심정도 심정이니 만큼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요. 나 왜 이렇게 잘난 놈으로 만들었냐니까? 응?”

그렇게 말 하는 성민은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척이나 괴로운 듯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듯 앉았다.

그리고는 빠르지 않은 느린 음성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 했다.

“난.... 왜 이렇게 가진 게 많은 거예요? 왜 이렇게 많은 걸 준 거야?

왜 그랬어? 나 그냥 평범한 놈으로 해 주지 왜 그랬어? 응?”

“…….”

“아버지가 너무 미워.... 엄마가 너무 미워.....

나.. 이렇게 많은 거 준... 아버지 엄마가 밉다고...”

그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가보다 했는데,

너무나 심각한 성민의 모습에 그를 삐뚤게 보던 시선이 고쳐진다.

우습기 짝이 없게도 가슴이 녀석의 음성에 동요를 하고

축 처져 버린 그늘진 어깨에 동요를 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무슨 일이야 성민아.”

윤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성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너무나 작아 보이는 그 어깨를 꼭 감싸 않고는 물었다.

이럴 때면 늘 따듯하게 느껴졌던 엄마의 품이지만

성민은 그 체온에 거부감을 느끼며 밀어낸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윤희는 몹시도 당황스러워했고

성민은 잠시 미안한 기색을 내 보였지만 그도 곧, 없던 일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몹쓸 놈!”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성민의 행동에 권 회장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게야? 네 말대로 많을 걸 쥐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또 뭐가 뒤틀린 게야?!”

잔뜩 화가 난 듯한 권 회장의 음성에 성민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좀처럼 열지 않았던 그 입을 열었다. 같은 말만 반복하던 일을 이제 멈췄다.

그의 입이 말한다. 작고 얇은 입술이 벌어지면서 말한다.

“내가 가진 배경이... 그 녀석을 힘들게 해요....

내가 가진 배경에... 그 녀석이 겁을 먹고 도망을 친단 말예요....

이제껏.... 내 배경을 따라 오는 녀석들은 많았지만 처음이라고요.

처음으로 내 배경 때문에, 아버지가 이뤄놓은 그 대단한 배경 때문에

나를 등진 녀석이 나타났다고요!!”

“…….”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

“하나같이 내 배경을 보고 다가오지만....

처음으로 그 배경에 나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 배경 하나면 뭐든지 지켜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아닌 게 있었어....”

“…….”

“아버지... 나 진짜 미칠 것 같은데... 신도이.. 아니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그 애는 내가 아니래....

나... 때문에 비참하데.... 나란 존재 때문에 힘이 들데....”

더는 억제하려는 슬픔이 감춰지지 않는 성민의 목 메인 소리에

그를 지켜보는 그의 부모들 또한 가슴이 아려온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진 것에 대해서

도이에 대한 실망과 함께 또 다른 믿음도 피어오른다.

“바보 같이 잡지 못해서 후회 했으면서, 나 때문에 우는 녀석을 잡을 수가 없었어.

아버지는 다른 분들처럼 우리도이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데,

그러니 날 믿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

“근데... 근데 나 정말... 그 녀석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은데...

정말 난 신도이 아니면 아무도 안 될 것 같은데.... 그걸 몰라주는 그 녀석을...

어떡해야 해요? 나 정말 어떡해야해?”

원망 가득한 눈초리도, 처음처럼 차고 무표정한 얼굴도 아닌,

그저 슬픔으로만 얼룩진 얼굴을 보면서 쓴 눈물을 속으로 삼키는 부모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민은 계속해서 어떡해야 하느냐고 만 묻는다. 한참을 그렇게 묻는다.

그 사이, 어느덧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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