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아침 등굣길에 오르면서 무슨 기대였을까,
그렇게 모질게 보내버렸으면서도 뭘 기대했던 것일까,
도이는 늘 성민이 자신을 기다리던 담벼락을 그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모질고 독한 마음으로 녀석의 가슴에 비수를 꽃아 놓은 건 자신이나
그 일이 제발 꿈이길 바라는 어리석은 바람은
비록 성민을 밀어는 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헤어짐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기에 더욱 큰 상처만 남은 도이의 발걸음이 무겁다.
성민과 함께일 때는 너무나 거리가 가깝게만 느껴졌던 학교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진다.
“어깨 좀 펴.... 좀 웃어 봐....
네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으면 내가 널 놔줄 수가 없잖아....
네가 원해도 널 놔줄 수가 없게 되잖아.....”
투벅투벅, 거북이걸음을 걸으며 고개는 땅 끝으로 푹 숙이고
기운 없이 걸어가는 도이의 뒤에서 아주 슬픈 음성이 들려온다.
지금 도이의 표정만큼이나 슬픈 음성이 들려온다.
성민이 버릇처럼 도이의 집 앞까지 또 발걸음을 한 것이다.
‘나’란 존재로 인해 힘들어하는 도이를 위해 옆이 아닌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성민이다.
앞이나 뒤나, 슬프기 짝이 없는 두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
.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밤을 샌 뜬 눈으로 나간 성민을 채 잡지 못했다.
학교는 둘째 치고라도 그 무거운 마음을 좀 달래보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도이에게 가겠다며 나가는 성민의 뒷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그냥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밤을 새워버린 두 사람이었지만 윤희와 권 회장은
아주 조금의 피로도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성민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차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도이양이랑 또 벌어진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
“성민이 말 들어보면 아무래도....”
“그걸 묻는 게 아니잖소.”
“제가 도이양을 만나 볼 까요?”
“글쎄.....”
“만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게요.”
“아니, 그러지 마요. 그 아이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닐 것 같으니.”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눈부신 태양처럼 기분 좋은 아침이 아니었다.
때 아닌 근심으로 인해 덩달아 집 안까지 어둡기만 하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두 아이, 정말 보기 좋았잖아요.
그 아이들이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면 난 내가 돕고 싶어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김 기사한테 부탁을 좀 해 볼까요?”
“김 기사?”
“사실, 성민이가 전학가면서 당신에게 보여줄 새 친구를 찾는 일에...
그 아이를 지목했었거든요.”
윤희는 처음, 이미 연결되어 있던 도이와 성민의 고리가 조금 더 단단하게 조여졌을
그 시점을 회상하며 이야기 했다.
그 때, 김 기사를 시켜 ‘신도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신상명세를 비롯한
이것저것 정보를 캐내어 줬던 일을 말이다.
이미 도이의 주변을 한번쯤 조사를 했던 그라면
이번일도 그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말을 더하면서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 때는 성민이가 도이양을 알고 있었다는 걸 몰랐지만,
아무튼 김 기사라면 뭔가 해결방안을 제시 해 주지 않을까요?”
“일단 김 기사를 먼저 만나봐야겠소. 내가.”
두 사람은 도이와 성민이의 일이 부디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한 저녁식사자리에서 도이를 생각하는 성민의 마음이나
성민을 생각하는 도이의 마음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웃는 게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에게서 그 웃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
.
아주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며칠 전에는 방학식도 마쳤다.
도이는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만 반복했고,
그 작은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지는 벌써 보름도 훌쩍 뛰어넘었다.
학교를 오가는 도중에는 아침에 선도를 서면서라도
스쳐지나가는 성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
성민은 늘 도이를 마중 왔던 담벼락 밑과 골목길 하나쯤의 거리를 두고
도이의 등굣길을 함께 했다.
물론 버스를 타는 도이를 따라 그 버스를 같이 탈 수는 없었기에
늘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자신의 바이크를 대기시켜 놓곤 했었다.
바이크로 천천히 버스를 따라갔다가 그녀가 완전히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고 난 후
약간의 시간을 벌여 자신도 등교하곤 했다.
민환은 어느새 자신을 따라 다니며 좋다고 말하는 경아에게 익숙해져갔다.
경아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경아를 강경아라는 그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도민주라는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누나라고 인식하며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경아는 무척이나 마음속이 쓸쓸해짐을 느꼈지만
민환의 앞에서 크게 나쁜 기분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민환이 자신을 떠날 까 두려웠던 것이다.
경아는 그렇게라도, 강경아로 옆에 설 수 없다면 도민주로라도 민환의 옆에 있고 싶었다.
이미 2년 전에 죽어버린 누나이기에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민환의 모습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사랑하기에 쉽게 잊을 수도 없고 잊지도 못하는 것 일거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민환을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더는 생각 외로 조용했다.
워낙 그들의 움직임 자체가 분주했지만 조용했기에
그 잔잔함이 종종 더 섬뜩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조용하던 움직임도 이제는 끝에 왔는지 표정이 하나같이 살아있었다.
큰일을 앞두고 잔뜩 기대어린 얼굴로
앞으로 펼쳐질 성대한 의식에 대한 포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치르지도 않았지만 이미 많은 일을 치러 놓은 것만 같은 모습이다.
이글 쪽의 움직임도 많이 분주해졌다.
라이더가 조용함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글은 떠들썩한,
다소 분주함 속에서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기선제압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오빠.”
“응.”
“우리... 우리 말 이예요.”
“응.”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어려워 해?”
방학을 하고 나서는 하루 중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한 두 배 정도로 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하루하루가 다르게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남과 더불어
민환의 곁에 자신의 존재가 조금 더 크게 부각되기면서
경아는 아주 어려운 말을 한 번 더 꺼낸다. 언젠가 한번은 꺼냈던 이야기기도 했다.
“오빠.”
“그렇게 오빠, 오빠 부르지 않아도 내가 오빠 인거 알아. 그러니까 하려는 말이나 해 봐.”
“…….”
무슨 큰 이야기를 하려는지 계속해서 뜸을 들이는 경아의 행동에 답답했는지
민환은 어서 말을 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경아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없이 민환을 응시하다가 어렵지만 분명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는 그만 나 받아주면 안 돼요?”
“받아주다니?”
“나, 오빠 여자친구 하고 싶어요.”
“…….”
“그냥 이렇게 만나는 동생 말고, 여자친구 말예요.”
“…….”
“어차피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남들 눈에는 우리가 연인으로 보일 거라고요.
그런데 그건 남들 눈에만 그렇잖아요. 진짜는 아니잖아.
오빠는 아직도 강경아가 아닌 도민주를 찾잖아요.....”
민환은 간절히 원하는 경아를 향해 아무런 말이 없다.
“나 이제 그거 싫어요. 그런 거 싫어요, 오빠....”
“…….”
경아는 민환이 자신을 향해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있는 양,
그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마도 언젠 가처럼 거절을 한다거나 아니면 조용히 자리를 옮기는 행동 따위로
교묘하게 대답을 회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한참 만에 흘러나온 민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
경아는 마치 자신이 환청을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만.... 당장에 너를 사랑해 주길 바라지 않겠다면 말이야....
언제라고 장담 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