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너....”
그즈음이 되자 성민은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성민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며칠동안 내내....”
“있잖아... 성민아....”
“신도이... 나봐... 내.. 얼굴 좀 봐....”
성민은 반 강제로 도이의 상체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쩐지 도이가 자신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꾹 눌러 참은 덕분인지 그래도 흘러내리지는 않았던 눈물이 성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성민의 불안에 떠는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온다.
“뭐야? 왜 울어? 응? 도이야!”
“정말... 정말... 많이.. 생각 해... 봤는데.. 말이야....”
“뭘? 도대체 뭘 생각 했다는 거야? 응?”
“…….”
“도이야, 신도이. 설마 너, 설마 너, 쓸데없는 생각...
그런 거.. 한 건.. 아니지? 응? 그렇지?”
성민은 같은 말을 재차 반복하면서 자신을 엄습해오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력에서 그칠 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는 정말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손만 뻗으면 네가 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생각 했어.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말 하지 마. 전혀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봐, 지금 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잖아.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잖아.”
얼굴은 이미 흥건히 젖어버렸지만,
막상 시작을 하니 그 끝을 향해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이는 부지런히 끝을 향해 달려갔다.
온 얼굴을 다 적실만큼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왜, 말 안했어? 응? 왜 말 안했어 성민아?”
원치 않게 자꾸만 갈라지는 음성과 북받혀오는 서러움을 간신히 억눌러가며 도이가 물었다.
“왜, 그런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듣게 했어. 왜?”
“신도이! 너, 도대체 왜 그래? 응?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나도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고!”
“왜 몰라? 네가 왜 몰라?”
“도대체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건 네 입으로 말 해 줬어야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한테 듣기 전에 너가 해 줬어야 하는 거잖아!”
“도대체 누가 무슨 소리를 한거야? 응?!”
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 속 시원히 말 하지 않는 도이를 보며 성민은 답답했다.
화가 났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다하는 뭣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려는지
좀처럼 이해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라 이런 거 못해. 나는 겁쟁이라 너 같은 애 사랑 할 수 없다고.
너 같이 분에 넘치는 사람 사랑 받으며 하하호호깔깔깔 웃을 수가 없다고!”
“…….”
“내가 유민오빠와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뭔데?”
“갑자기 차유민이 왜 나와? 응?”
이만하면 대충 눈치를 챘을 법도 한데 성민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때문에 더욱 모진 말을 해야 하는 도이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너, 유민오빠가 얼마나 오랜 시간 날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
유민오빠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곁에서 마음 졸였는지는 알기나 해?
왜 마음을 졸였는지는 알기나 해?”
“그만 해! 그만 하라고!”
“너, 하나도 모르잖아! 하나도 모르잖아!!”
“내가 그런 걸 왜 궁금해야 해? 넌 이미 내 여잔데. 넌 이미 내거잖아!”
“너.. 정말.. 나빠....”
“뭐?!”
“너 정말 나빠! 나쁘다고!”
도이는 정말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성민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처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매몰차게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날 바라봐 준 사람, 좋아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오빠가 가진 배경 때문이었다고!! 난 그 배경이 싫었다고!! 알아?”
“배경...이라니..? 설마... 너.... 너...!!”
하아, 하며 묵직한 한숨과 함께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제야 도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얼추, 어느 누가 도이에게 그런 소리를 전했는지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오빠가 가지고 있던 배경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었는데...
오빠가 가진 배경이 날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았는데...”
“…….”
“너무 다른 배경 속에서 끊이지 않는 무시와 멸시 당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는데... 얼마나 큰.. 악몽..이었는데...
왜 너 까지 날 그 악몽 속에 끌어들여? 다 끝났다고 생각 한 악몽 속에 왜 또 잡아끌어!”
성민은 그게 아니라는 말을 너무나 간절히 하고 싶었지만
입안 가득 맴도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 뱉지는 못했다.
자신은 단 한번도 생각 하지 못했고 겪어보지도 못했던 아픔을 호소하는 도이를 보니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 한마디가 어쩐지 도이를 더욱 힘들게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았잖아! 너도 알고 있었잖아!”
“…….”
“그러면서 왜 나 흔들어 놨어, 왜! 죽이 되든 밥이 되던, 그냥 두지 왜 흔들어 놨어!
그 말만 아니었어도, 그 말만 아니었어도....
유민오빠 그렇게 떠나보내면서 너 찾진 않았을 거 아니야....
혼자... 아파하고... 혼자... 일어서게... 놔...두지... 그렇게.. 좀.. 놔두지....”
“…….”
“처음부터... 너란 존재만.. 다가..오지... 않았어도....
이렇게... 비참해지진... 않았을 거야.....”
도이는 원망 가득한 말들을 막무가내로 쏟아 붓고는 줄행랑치듯 그 곳을 빠져나왔다.
성민은 차라리 헤어지자는 말 보다 더 모진 말을 한 도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
원망 때문이 아닌 너무나 아파보이는 도이의 상처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다고 말 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도이를 좋아했었는데,
알아주지 못하는 도이가 미운 게 아니라 그렇게 오래 좋아했으면서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도이의 아픔 때문에 아팠다.
자신 또한 상처만 주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 도이에게 아니라는 그 쉬운 한 마디 조차
해 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뛰어가는 그녀를 이번에도 잡지 못해, 잡을 수 없어 괴로웠다.
도이역시 괴로운 마음은 성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웃으면서 떠나보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민아가 원하는 방향대로 민아가 만들어 놓은 길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이 머리와 다르게, 가슴속에서 하는 말과 다르게 제 멋대로 움직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되면 민아는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며,
어차피 짜여졌던 각본대로, 민아가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기뻐하며
도이를 향해 늘 그랬던 것처럼 가소로운 웃음을 한껏 날려줄 것이다.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도이는 이미 민아가 원하는 방향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켰기에 후회 해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있다.
모든 일이든 어떤 일이 쌓였을 때는 한껏 쏘아붙이면 풀리기 마련이지만
이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고두고 후회 할 만큼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럽다.
뒤늦게나마 그냥 모른 척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민이 말 해 줄 때 까지 기다렸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냥 두 분을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편안한 분들이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닥쳐올 앞날에 대한 걱정 보다는 현재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