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96화 (96/425)

< 해적 외다리 실버 (2) >

“우리 윤환이네. 그리고 귀염둥이 써니 양.”

이대봉이 나와 선희를 보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곧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우리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머니임.”

“아유, 대봉 씨.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저도요.”

평소 화실에 들락거린 탓에 가족과도 이미 친한 사이라 넉살맞게 잘도 인사한다.

“오늘 무슨 날이야? 가족이 단체로.”

“누나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해서 기념으로.”

“아. 그렇구나. 지금쯤이라고 했었지? 합격 축하해요, 누님.”

이대봉의 인사에 누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형이 나이 더 많잖아. 왜 자꾸 누나를 누님으로 불러?”

“우리 윤환이 누님은 내 누님이니까.”

“뭔 소리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나저나······.”

“······?”

“형은 나 좀 보자.”

그렇게 말하고는 가족이 앉은 테이블에 부대찌개 대자를 시켜놓고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식당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는 곧

바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연락도 안돼서 모두 얼마나 걱정했는데.”

“······여기 부대찌개 엄청 맛있어.”

“말 돌리지 말고.”

내 말에 멈칫한다.

“아, 뭐. 취재 중이었지.”

“내가 보기엔 그냥 식당 직원처럼 보이는데.”

그 말에 이대봉이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말한다.

“그냥은 취재가 안 되지. 직원으로 일하면서 친분부터 쌓아야 되는 거야.”

“그렇다 치고. 그런데 취재라니.”

“그렇다 치고가 아니지. 그러니까······, 큼. 뭐 아무튼 전에 말했잖아. 음식관련 만화 스토리 만들고 있다고.”

“그래서······, 취재를 한다고?”

“당연하지. 이제까지 스토리를 너무 허술하게 만들었잖아. 나도 이젠 제대로 만들고 싶어. 너처럼.”

“나처럼?”

“그래. 너처럼. 너 정도의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지금의 내 입장에선. 난 네 스토리 능력이 너무 부럽거든.”

사실은 그 반대다.

나야, 솔직히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동안 박상식과 함께 스토리를 만들어가

며 늘긴 했지만.

하지만 이대봉은 미래의 일을 전혀 모르면서도 감각적으로 앞으로의 트렌드를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천재성이 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놀란 게 한두 번 아닌데.

그런데 이 인간은 날 보며 새롭게 영역을 더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나야말로 이대봉의 이런 천재성이 부러울 따름이다.

만약, 이런 내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받은 주목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모차르트를 바라보던 살리에리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래, 스토리 진행은?”

내가 묻자 이대봉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한번 볼래?”

당장이라도 보여 줄 기세다.

“지금 있어?”

“저쪽 방에 있지. 지금이라도 가져다 줘?”

“일단 우리 밥 먹으러 왔으니까 그거 먹고 나서 읽어볼게.”

“그래. 지금은 누님 합격이 먼저니까. 끝나면 불러. 아, 그리고 너니까 고기 특별히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해볼게.”

“고마워.”

***

“뭐야? 여기서 지내는 거야?”

“어. 아늑하지?”

“뭐, 아늑하긴 하네. 너무 좁아서.”

내 말에 이대봉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지낼 만 해.”

식사가 끝나자마자 가족들을 일부러 택시 태워 보내고 난 뒤 난 식당 뒤편에 있는 이대봉의 임시 숙소인지 거처인지······, 아무튼 좁은 방이 있는 곳에

들어왔다.

당연히 그가 요즘 쓰고 있다는 이야기의 콘티를 보기 위해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평소엔 창고처럼 쓰던 방인지 방 한쪽 구석은 쌀자루 몇 가마가 쌓여있고, 고추랑, 양파, 마늘 같은 게 구석구석 놓여있었다. 그리고 나

머지의 공간에 작은 앉은뱅이책상과 약간의 책들 그리고 잠자리가 펴져있다.

그래도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당장은 괜찮아 보인다.

“겨울엔 춥겠다.”

“겨울까진 안 있을 거야.”

“그럼 언제까지 있을 건데?”

“뭐, 그냥. 이야기 완성될 때까지. 아마도 몇 달 정도?”

“넉 달이면 겨울인데.”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자신의 책상 쪽으로 가서는 노트하나를 집어 들고는 내게 가지고 와 내밀었다.

“이거,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

이대봉이 내민 노트 표지에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이 ‘식도락(食道樂)’이네?”

“어. 제목에서 만화의 내용이 짐작되지?”

“그러네.”

“뭔가 재밌을 것 같은 향기가······.”

“그런 건 읽어봐야 아는 거고.”

“칫. 냉정하기는.”

제목만 보면······, ‘고독한 미식가’ 스타일인가?

천천히 콘티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읽자마자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놀랍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아니 개인적으로는 익숙하지만 1984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해보면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거, 뭐야? 무협 음식기행 만화야?”

“아, 그래. 내가 무협지도 좀 좋아하거든. 그래서 중원의 요리사가 각 지역의 음식을 먹으며 돌아다니는 만화를 생각해 봤지.”

이상하네, 무협판타지 음식만화라면 중국이 배경일 텐데.

“그럼 뭐 하러 부대찌개 집에서 알바, 아니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화교들이 많은 곳에 가서 일을 할 것이지.”

내 말에 이대봉이 웃었다.

“중국이 배경인데, 왜 여기서 부대찌개 식당에서 일하고 있냐고?”

“어.”

“사실은, 얼마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었어.”

“······그, 그랬어?”

“어. 대충 도서관에 나와 있는 책들로 공부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친해진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했지. 이젠 이야기를 다듬고 있는 중이야.”

“그럼 지금은?”

“나중에 한국 음식에 관한 이야기도 쓸 생각이니까,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중이지. 뭐, 겸사겸사 돈도 벌고. 사실은 나 완전 거지걸랑.”

그렇게 말하며 뭐가 좋은지 혼자 낄낄 거린다.

“······.”

어쨌건 대단한 인간이다.

새로운 만화스토리를 위해 화교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까지 일하면서 음식에 대한 공부를 하다니. 이 시대에 이만한 노력이 들어간 스토리가 제대로 대

접받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할 텐데도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열정이다.

이 인간,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같은 타입인가?

하는 짓이 좀 가벼워서 그렇지 정말 알면 알수록 놀랍기만 하다.

다시 콘티노트에 집중했다.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도중임에도 놀라움의 연속이다.

무협세계라는 것을 나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지만, 주로 진행되는 무력충돌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들을 뿐이고, 주인공은 그저 각종 식당, 그러니까 고관대작들이 머무는 고급 요릿집이 아닌, 일반인이 주로 이용

하는 객잔들이 주 배경이 되는 모양인지 처음부터 허름한 시골 객잔이 등장한다.

물론 판타지답게 무협 속 음식뿐만이 아니라, 음식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들어봤을 법한 최근 음식들도 종종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역시 만화다운 재

미에 집중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음식만화라는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퓨전을 해서 또 다른 만화스토리를 만들고 있으니······, 이 인간은 정말 시대를 너

무 앞서가는 천재인 모양이다.

이런 천재가 왜 후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걸까?

“어때?”

“괜찮네.”

“······그냥, 괜찮은 정도? 너무 평가가 박하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본다.

“재미가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냉정하구나, 정말.”

항상 이대봉의 스토리에서 아쉬운 점이다.

물론 객관적으로는 나쁘지 않고, 충분히 재미도 있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내 눈이 좀 높아야지. 아무래도 시대가 다르다보니, 이 시대의 조금

느린 듯한 전개와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걸리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에서라면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먹힐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소재니까.

“조금만 더 상황이 극적이면 좋겠어.”

“너의 이야기가 좀 구체적이면서도 자극적이긴 하지.”

“형의 이야기가 좀 싱거운 건 아니고.”

내 말에 낄낄거린다.

“왜 그렇게 웃어?”

“그래도 네가 인정해줘서 기분이 좋으니까.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일본에 내 스토리를 알려

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물론 이정도 이야기로는 무리겠지만.”

“전 선생님이랑 일 안할 거야?”

“해야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요즘 그 형 힘들잖아. 언제 상황이 좋아질지 알 수도 없고. 괜히 내가 거기 있으면 그 인간 또 무리한다고.”

“무리?”

“오도 가도 못하는 후배들 어떻게든 붙들고 가는 양반이잖아. 그 형이. 그러니까 지금도 얼마나 힘들겠어.”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이미 그런 사정을 보기도 했으니까.

“형은 지금 전 선생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구나.”

“왜 그새 또 무슨 일 벌어졌어? 혹시 잡혀가거나 한 거야?”

이대봉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과하게 하냐? 설마 그런 말도 안 돼는······.”

아니다. 지금 시절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곧바로 헛기침을 하고 나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전 선생님 요즘 다시 만화그리기 시작하셨어.”

내 말에 정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전신을 펄떡 거린다.

“뭐? 그럼 위험한 거 아니니?”

“위험하긴, 그 무슨 위험한 리스튼가 뭔가에서 빠졌대.”

“어떻게?”

“그렇게 걱정됐으면 좀 연락이라도 해보든가 하지.”

“빨리 좀 말해봐. 궁금해 죽겠네.”

이대봉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전상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나름 세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는 동안 몇 번이나 ‘정말?’, ‘진짜?’, ‘오호.’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박수를 짝짝거리며 좋아한다.

“과연, 우리 윤환이야. 역시 이럴 땐 네가 큰 힘이 되어주었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화실이 정상으로 돌아가게 될 발판이 마련되어서.”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형을 한번 만나고 싶었어.”

“어떤 문제?”

“이제 전 선생님 화실도 살아나려하는데 이런 순간에 주요 인력인 추양구 씨가 파시엔시아 때문에 묶여있으니까. 물론 파시엔시아만 그리는 건 아니

지만, 많은 시간을 매달리는 건 사실이니까.”

“흐음. 그러니까 양구 씨를 대신할 인물 펜터치맨이 필요하다는 거네.”

“그렇지. 혹시 아는 사람 있어?”

“······.”

이대봉은 내 질문에 별다른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잠시 후, 뭔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안 바쁘지?”

“왜?”

“나랑 같이 좀 가볼 곳이 있으니까. 어때?”

“어······. 그래.”

이대봉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식당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친군데. 너도 마음에 들 거다.”

“······?”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1층 건물.

이 시대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의 집이지만, 이건 특히 더 허름해 보인다.

밖으로 통하는 대문도 없이 그냥 집의 낡은 문이 밖으로 오픈된 형태.

퉁. 퉁.

이대봉이 문을 두드린다.

“나야, 제임스. 외다리 실버 안에 있니?”

외다리 실버?

< 해적 외다리 실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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