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97화 (97/425)
  • < 해적 외다리 실버 (3) >

    무슨 보물섬이냐?

    갑자기 외다리 실버라니.

    퉁. 퉁.

    “안에 없어?”

    이대봉이 한 번 더 외치자, 잠시 후 안에서 약간은 걸걸한 남자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시끄럽게 문 두드리지 말고 들어와. 문 안 잠겨 있으니까.”

    “아, 그럼 실례할게.”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이 낡은 나무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안에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한쪽 손으로 코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이리저리 휘젓는다.

    “아후, 냄새. 먼지 좀 봐. 이게 도대체 뭐야?”

    음침한 실내와 확 풍겨오는 홀아비 냄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뭐 만화 그리는 사람들을 여러 번 겪다보니 이런 것쯤이야 크게 거슬리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반가울 이유도 없지만.

    아무튼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실내의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한다.

    늦은 오후라고는 해도 여름이라 아직은 밝은 시간인데도 실내는 굉장히 어둡다. 그 이유가 특별히 집에 빛이 잘 안 드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창문

    에  암막커튼을 쳐둔 탓도 있다.

    아마도 일반적인 만화가들처럼 이 외다리 실버라는 사람도 야행성인 모양이다.

    “뭐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대봉이 투덜거리며 말하자 얇은 이불 속에서 짜증 섞인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르긴,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질 텐데.”

    “······.”

    “에휴, 환기도 좀 시키고 살면 얼마나 좋아.”

    이대봉이 그렇게 말하며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더운 여름인데도 문까지 닫고 사는 게 신기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방안이 그래도 시원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그렇게 방안이 밝아지자 책상 위에 놓은 원고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

    책상위에 색다른 물건이 놓여있다.

    사각형의 나무상자.

    그런데 윗면은 유리로 되어있다.

    바로 라이트박스다.

    보통은 애니메이션 작업 때 원화와 동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지만, 만화 쪽에서도 일부 사용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 곁에 있는 원고를 얼핏 보니, 내가 본적이 있는 만화가 틀림없다. 그것도 일본만화.

    이 사람······, 해적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인가?

    아직 남자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있다.

    그때 이대봉이 방을 이리저리 치우며 잔소리를 한다.

    “실버. 어서 일어나봐. 오늘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왔어.”

    “······무슨 소리야? 손님?”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뒤집어썼던 이불을 젖힌다.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이 된 머리.

    생각보다 강인해 보이는 인상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답지 않게 어깨도 떡 벌이진 타입이다.

    그런 그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나를 슬쩍 올려다본다.

    “누구······?”

    “안녕하세요.”

    “아, 네.”

    하지만 곧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야, 그래도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게 뭐니? 좀 일어나 봐.”

    “아, 진짜. 귀찮게. 왜 그래?”

    “외다리 실버. 어서.”

    이대봉이 이불을 끌어당기자 버티다 결국 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 씨. 너 이 새끼. 실버라고 부르지 말랬지? 그리고 내가 왜 외다리 실버냐?”

    “아하하, 성공.”

    실버라는 인간이 버럭 화를 내고 있는데도 이대봉은 뭐가 좋은지 박수까지 치며 실실 웃는다.

    “이 인간이 왜 웃고 지랄이야?”

    “눈곱.”

    이대봉이 실버에게 손가락질을 인상을 살짝 쓰더니 서둘러 손가락으로 눈곱을 떼며 다시 짜증을 부린다.

    “조심봉이라고 조심봉. 존 실버가 아니라. 그리고 이거 그냥 금만 좀 간 거야. 보름만 있으면 기브스도 풀 거고. 왜 멀쩡하게 붙어있는 다리를 소멸시

    켜?”

    이름이 조심봉이야?

    그러고 보니 조심봉······, 존 실버라.

    조심봉?

    조심봉과 이대봉이라······.

    재미있는 조합이다. 이것도 인연인가?

    아무튼 그가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자 그의 말대로 왼쪽에 기브스를 한 다리가 드러났다. 그 덕분에 묘하게 외다리 실버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거기다 지금 하는 일은 대충 봐도 해적판 만화를 그리는 모양이니.

    어째 묘하게 떨어지네.

    속으로는 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왜 해적판 만화를 그리는 사람에게 이대봉이 날 데려왔을지 궁금했다. 이 인간이 좀 실없기는 해도 이유 없이 이

    런 짓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야, 그러니까 야간에 왜 공장에서 일을 하고 그래? 내가 전부터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했지?”

    “그 자식, 진짜.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럼 일을 안 해?”

    “그럼 이런 거 차라리 만화 그림이나 도와주라니까. 너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돈도 많이 받을 거잖아.”

    “오늘따라 왜 이래? 갑자기 손님을 데려오질 않나, 지나간 얘기 또 하질 않나.”

    “네 실력이 아깝잖아.”

    “아까울 게 뭐 있어? 어차피 만화가가 될 것도 아닌데.”

    “어휴 진짜. 아예 관심이 없으면 이런 짓은 왜 하는 건지.”

    “내가 좋아해서 하는 거라니까. 어차피 만화가들 밑에서 그 쓰레기 같은 데생위에 그림을 그릴 바에야 이런 작품이 훨 낫지. 거기다 돈까지 준다니까

    더 좋은 거고.”

    “돈도 얼만 안 되잖아. 거기다 이건 불법이라고.”

    “야, 솔직히 말해서 지금 만화가들 중에서 이 짓 안 해본 사람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데?”

    “······.”

    “대부분 만화가들이 해적 만화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거다.”

    이 부분은 나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당시 만화가들 중 대다수가 해적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게 이런 실력을 이런 식으로 썩힐 이유가 되니?”

    그건 그렇고 이대봉이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나저나 무슨 실력이 있다는 거지? 궁금하네.

    곁에서 멀뚱거리며 눈치만 보던 날 이대봉이 힐끔 돌아보더니 주변을 대충 정리한 뒤 책상 위에 있던 원고 한 장을 내게 내 밀었다.

    “윤환아, 이거 한 번 봐봐.”

    “야, 적어도 내 허락 정도는 받는 게 도리 아니냐?”

    “흥, 도리 좋아하네. 베낀 만화 주제에.”

    그 말에 실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쳇. 망할 놈.”

    뭐 대충 봐도 된다는 걸로 생각하고 그제야 이대봉이 내민 만화를 살펴본다.

    단 한 장의 만화원고지만, 이 만화에 대한 정체는 알고 있다.

    이케가미 료이치의 남조(男組)다.

    크라잉 프리맨, 생츄어리로 유명한 만화가의 작품으로 1974년에 연재를 시작해 1979년까지 총 25권으로 완결된 만화다.

    선이 굵고 시대를 앞서간 극화 체의 만화가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만화가 작품이라 잘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좋아하는 만화가이긴

    하다.

    그런데······, 그런 사실 이전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

    내가 놀란 눈으로 원고를 내려다보자 심봉, 아니 실버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대단하지?”

    이대봉의 말 대로였다.

    난 정말 놀라고 있었다.

    이케가미 료이치의 펜선 자체가 강렬하면서도 내공이 잔뜩 실려 있다.

    그런데 그런 이 원고 속 그림은 같은 그림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인상이 강하다.

    만화자체의 느낌을 진짜 원고보다 더 살리고 있는 펜선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농담으로 원작초월이라는 말들이 나돌기도 했었는데, 이쪽은 정말 원작을 초월한 펜선이다.

    “대단하긴, 네 녀석 말대로 해적질일 뿐인데.”

    “아유, 또 내 말에 속상했니?”

    “시끄럽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내 쪽을 바라본다.

    “너는······. 손님을 데려올 거면 미리 얘기라도 할 것이지.”

    자신의 펜선에 대한 것을 알아봤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우리 윤환이는 동생 같은 애야. 손님이라니.”

    “그거야 니 입장에서나 그런 거고. 나한테는 손님이지.”

    그렇게 말하며 날 슬쩍 보고는 다시 이대봉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 별로 자랑스럽지도 못한 일을 자랑하려고 데려온 건 아닐 테고, 진짜 목적이 뭐야? 혹시 만화가?”

    그렇게 말하더니 날 돌아본다.

    “만약 그렇다면 헛걸음 한 거예요. 난 어차피 문하생 따윈 할 생각 없으니까.”

    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방을 둘러봤다.

    어차피 아까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그냥 도와달라고 해봐야 헛수고 일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방금도 그것을 확정짓기라도 할 듯 단호하게 말했

    다.

    방엔 일본만화책들이 제법 눈에 많이 보인다. 그것도 번역판이 아닌 일본어판으로.

    소년점프, 소년매거진 같은 일본 만화잡지와 단행본들도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고르고13’과 ‘크라잉 프리맨’이다.

    확실히 이런 계통의 만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방바닥 한쪽에 놓인 책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만화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일본원서까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걸 보면요.”

    “아, 뭐. 좋아하죠. 아는 재주가 일본어 정도라.”

    “저랑 비슷하시네요.”

    내 말에 그가 호기심을 보인다.

    “그래요? 그럼 북두의 권 같은 만화도 좋아합니까?”

    “그럼요.”

    대화는 북두의 권으로 시작했지만, 이 방에 있는 만화인 고르고13을 비롯해 크라잉 프리맨, 그리고 더불어 극화 체 만화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근처에서 그런 우리들을 멀뚱거리며 바라보던 이대봉은 싱글거리며 집안 청소를 계속 했다.

    대화를 해 나가다 보니 마음이 맞아 이대봉처럼 형, 동생처럼 지내기로 하고 말을 텄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만화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대화의 방향이 내가 참여한 만화까지 도달했다.

    “진심의 남자랑 파시엔시아, 그리고 삼사라가 실려 있는 소년 히어로 아냐?”

    실버의 질문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지. 그런데 왜?”

    “그 세 작품 중에 제일 아쉬운 게 삼사라야.”

    “뭐? 그게 왜?”

    “다른 두 작품은 솔직히 펜선이 살아있어서, 그림에 생동감이 있는데. 삼사라는 뭐랄까 데생이 죽어버리는 느낌이라서.”

    역시 실버의 눈에도 정미자의 펜선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정미자의 펜선은 나쁘지 않지만, 점점 성장해가는 선희의 데생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저나 역시 예상대로다.

    실버가 삼사라와 파시엔시아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방구석에 놓여있는 잡지가 바로 주간소년 히어로였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대화를 시작한 것이었으니까.

    “파시엔시아는 어때?”

    “파시엔시아? 그게 왜?”

    “펜선 말이야. 형이 보기엔?”

    “제법 노련하더라. 만화가가 그린건지 그 밑에 사람이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이라면 어때? 그 정도 느낌으로 펜선을 낼 자신 있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피식 웃었다.

    “혹시 너, 이 형님을 도발하려는 거냐?”

    “도발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혹시 가능해?”

    내 질문에 실버가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냐? 데생이라면 몰라도 펜선만으로 따지면 그 정도는 내 발끝에도 못 미치지.”

    그때 이대봉이 끼어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

    “넌 좀 빠져, 임마!”

    “그래도 과장이 좀 심해야지.”

    “그럼 발끝정도라고 하자.”

    “에이.”

    “그래그래. 발목! 됐냐? 망할 놈.”

    그 말에 이대봉이 낄낄거린다.

    “발목이라니.”

    “종아리까지는 아니지.”

    그때 내가 다시 말했다.

    “형, 파시엔시아 펜선 형이 좀 맡아주면 안 돼?”

    “그러니까, 파시엔시아 정도는······. 뭐라고?”

    “파시엔시아 인물 펜선맨을 새로 구해야 하거든. 그런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

    실버가 입을 떡 벌린 채로 날 보다 이대봉을 돌아본다.

    그러자 이대봉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건 할 생각이 있어?”

    “농담이······.”

    “아니지. 내가 설마 어쭙잖은 사람을 데려왔겠어?”

    그 말에 여전히 입을 벌린 채로 날 돌아본다.

    “······.”

    < 해적 외다리 실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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