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은호가 강릉에 온 것은 어제 오후였고, 두 사람은 결국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밤인지 새벽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고, 아침인지 낮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지 못했다.
해주는 그렇게 뒤엉킨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잠만 잤다.
잘 짜인 연극 대본과 빽빽한 스케줄에 철저하게 저를 짜 맞추며 3년을 살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잘 해냈고, 성과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자 잠이 쏟아졌다. 지난 3년간 미뤄 온 잠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모양이다.
지금은 또 몇 시일까?
나른하게 드리워진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옆으로 누워 있던 해주는 제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칼코마니처럼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워서는 그녀를 은밀히 담아내는 차은호.
잠에서 깰 때마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은호 때문에 순간순간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가슴 가운데가 아릿했다.
어제였다.
은호가 강릉까지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정성껏 위로해 주었다.
짙게 키스하고, 뜨겁게 어루만졌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죄다 들이마신 그는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질 만큼 짜릿한 쾌락도 안겨 주었다.
폭풍 같은 절정이 지나고 그의 품에 안긴 해주가 나직이 속삭였다.
[차은호 부회장님.]
그의 품을 깊게 파고들어서는 조심스럽게 속내를 드러냈다.
[저 사직할게요. 회사 그만 다닐래요.]
갑작스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지난 3년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들며 그녀를 납작하게 내리누르는 듯했다.
고아 주제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창성의 며느리가 되어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었다.
초고속 승진을 이뤘고, 그 대가로 대중 앞에 던져져 무대 위에 올라야 했다.
그녀의 옷차림, 헤어스타일, 말투, 몸짓, 걸음걸이, 식사 매너, 취향까지. 모든 것이 남의 입에 오르내렸고 평가받아야 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일상이었다.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일상이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창성의 후계자 차은호. 그 완벽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자.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결혼까지 쟁취한 세기의 커플. 해주는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난 지금, 연극이 현실이 된 지금,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두려웠고 겁이 났다.
[조금 쉬고 싶어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해 낼 자신이 없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이 남자의 육체 정도가 아닐까. 어차피 마음이야 그녀에게 주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며칠 쉬면서, 마음을 정리할래요.]
[그래, 그러자.]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는 그의 ‘그래, 그러자’라는 대답의 의미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다음 날, 날이 밝고도 돌아가지 않는 그를 보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와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그런 거였나 보다.
“은호 씨.”
해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은호를 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엷게 어렸다.
“응.”
차은호의 미소.
잘 웃지 않는 그가 그녀에게만 보여 주는 이런 미소가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그는 알까.
손을 뻗어 은호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날렵하게 뻗은 턱선을 매만진 해주가 그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돌아가요.”
“싫어.”
똑같은 말들의 반복이다.
자다 깰 때마다 돌아가라고 말하는 해주와 싫다는 은호.
거기에 은호가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나도 마음을 정리해야 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니. 그 말이 이유도 없이 해주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누른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응시하자 은호가 그녀의 손가락을 입술로 지그시 물었다.
입 안에 넣은 채 잘근잘근 씹고, 혀끝으로 쓰다듬자 등줄기를 따라 대번에 전율이 일었다. 조금만 방심했어도 신음을 흘릴 뻔했다.
“몇 시예요?”
당황한 해주가 손을 빼내며 시간을 물었다.
“오후 3시 정도?”
벌써 오후 3시. 이 방에 틀어박힌 지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
실컷 울고, 은호와 사랑을 나누고, 그 뒤로는 계속 잠을 잤다. 새벽에 마신 물 한 모금 외에는 밥도 먹지 않았다.
“곧 해가 지겠네요.”
느릿하게 말한 해주가 다시 눈을 감았다. 곧 해가 진다니, 제가 말하고도 웃음이 흘렀다. 이제 겨우 3시인걸.
“또 잘 거야?”
은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리가 얽히고 호흡이 부딪친다. 그러자 살결을 따라 솜털이 오소소 일어섰다.
“자꾸 잠이 와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대답한 해주가 제 허리를 감는 뜨거운 손을 의식하며 말했다.
“더 잘래요.”
“그만 자. 충분히 잤어.”
노골적으로 몸을 부닥친 은호가 그녀를 살살 어루만졌다.
“뭘 좀 먹어야 해.”
납작한 배를 간지럽힌 손이 천천히 위를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바짝 움켜쥐었다.
하,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한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프게 될 거야.”
입술이 겹쳐졌다.
살며시 움직이던 입술이 농밀하게 맞물리며 속을 헤집었다. 겨우 키스일 뿐인데, 심장에 불이라도 붙은 듯 온몸이 뜨거워진다.
입 안 가득 침범한 은호가 거칠게 휘감자 저도 모르게 등이 들썩였다. 하체가 맞붙고 그의 다른 손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읏, 은호 씨, 난…….”
“미치겠어. 안고 싶어서.”
나른하게 속삭인 그가 그녀의 귓바퀴를 입술로 매만졌다. 혀끝이 귓구멍을 파고들고 입술이 귓불을 삼켰다.
“으응.”
나른한 신음을 토한 해주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목덜미를 매만지듯 스친 입술이 쇄골에 이르더니 오목한 곳을 혀가 쓸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그녀의 몸 깊숙한 곳을 탐하기 여념 없다.
입술이 가슴에 닿자 좀 더 짙은 신음을 흘린 해주가 그의 숱 많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오히려 그를 끌어당기는 제 손을 원망스레 바라본 그녀가 얕게 신음하며 그를 기다렸다.
깊은 곳을 탐하던 손을 느리게 걷어 낸 그가 열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받아들인 해주는 짙은 숨을 뜨겁게 내뱉었다.
그가 느리게 움직이며 시선으로 그녀를 매만졌다. 그가 밀어붙일 때마다 미세하게 찡그려지는 미간, 뜨거운 숨을 토하느라 벌어진 입술. 말라붙은 입술을 축이느라 달싹이는 붉은 혀. 그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좇았다.
뜨겁게 그녀를 담아내는 검은 눈동자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해주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기대하게 된다. 뜨겁게 일렁거리는 눈동자에 그녀만이 오롯이 새겨질 때면 착각하고 만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 괴이한 감정이 견딜 수 없이 비참해서 해주는 차라리 그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마음이 아니라 몸의 쾌락만을 좇을 수 있다.
깊게 맞물린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몸이 스치며 만들어 내는 젖은 소음, 그리고 두 사람이 내뱉는 습한 음성이 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흡사 용광로에 심장을 녹이고 있는 기분이다. 심장과 함께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도 녹여 주었으면.
“해주야.”
나른하게 녹아드는 그녀를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은호가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날 봐.”
눈을 뜨고 싶지 않은데, 눈을 떠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를 보라고 한다.
눈을 질끈 감은 해주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싫어. 당신 눈을 들여다보면 결국 상처받게 돼. 기대한 만큼 처참해진다고.
“지해주.”
순간, 입술이 열리고 신음이 흘렀다. 은호가 그녀의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발.”
한 번 더 다그치는 애달픈 목소리에 눈꺼풀이 파들거리며 열렸다.
“날 봐, 해주야.”
겁에 질린 담갈색 눈동자가 은호를 담아냈다.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보라고.”
이 남자의 이런 눈빛도, 이런 목소리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남자의 그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가 눈물을 터트림과 동시에 절정이 찾아왔다. 울부짖듯 신음하는 해주를 바라보며 은호 역시 거친 신음을 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해주는 아이처럼 울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하는 저가 너무나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해주가 엉엉 울자 은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날 봐.”
울음을 그치지 않은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해주야, 말해.”
“싫어.”
결합을 풀지 않은 은호가 그녀의 팔을 억누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울지 말고 말해.”
그러자 아랫입술을 꼭 깨문 해주가 고개를 휘저었다. 입술 안쪽은 빨갛게 피가 맺혔고, 눈물은 방울방울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빌어먹을.”
떨어진 눈물이 침대 시트에 얼룩을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을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본 은호가 결국 울분을 토했다.
“네가 우는 이유를 말하라고.”
“사랑해요.”
꾹꾹 눌러두었던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녀의 의지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숨기려 했다.
“사랑하지 말고, 욕망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더는 숨길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커졌다.
“그게 내 맘대로 안 돼.”
그러게 왜 그런 눈빛을 보내. 왜 그런 목소리로 애원해. 왜 사람 마음을…… 이런 식으로 뒤흔드냐고.
“내가 차은호 당신을 사랑한다고.”
눈물에 시야가 흐려져 은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황당해하고 있을 그의 표정 따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막힌 입술에 해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은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말을, 호흡을, 울분을 죄다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