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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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해주의 예쁜 미소가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찍게 된 사진 한 장이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환하게 웃는 모습이 하도 예뻐서 몰래 셔터를 눌렀었다.

처음엔 동질감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 있는 해주에게서 저와 비슷한 향기를 느꼈다.

사람들과 섞이지 않았고,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방관자처럼 겉돌며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비로소 영혼의 쌍둥이를 만난 듯 묘한 기분도 들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해주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딱한 처지.

여러모로 불행한 그녀보다 해주가 조금 더 불행할 아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그녀는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와 너무나 비슷한, 아니, 그녀보다 조금은 불행한 해주가 자꾸만, 자꾸만 좋아졌다.

동질감과 애정을 넘나들던 감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동경으로 바뀌었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악착같이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면서도 과 수석을 놓치지 않는 해주는 그야말로 슈퍼 우먼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해주는 잘 웃었다.

그녀보다 못한 처지의 해주가 어떻게 저렇게 잘 웃을까. 깊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예뻐서구나.

해주는 예뻤다. 인형처럼 예쁜 눈, 코, 입은 물론이고, 자그마한 얼굴도,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도, 적당한 크기의 귓바퀴도, 가느다랗고 긴 목선도, 가로로 쭉 뻗은 쇄골도, 적당한 부피감의 가슴도, 잘록한 허리도, 볼록하고 자그마한 엉덩이도, 길게 쭉 뻗은 다리도, 한 손에 잡힐 듯한 발목도…… 모두 예뻤다. 예뻐도 너무 예뻤다.

그래서 모두가 해주를 좋아했다.

동기들도, 선배들도, 후배들도, 심지어 교수님들까지. 모두 해주를 예뻐했다.

그러니 웃으며 살 수밖에.

씁쓸했지만,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해주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해주가 최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치 외로운 여왕처럼 홀로 꿋꿋이 그들 위에 군림했다.

참으로 도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깊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는데, 사랑이 증오로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지해주.”

리모트 컨트롤 버튼을 누르자 천장에 떠올랐던 해주의 미소가 사라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경은이 옷을 벗으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네가 그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된 게 잘못인 거야.”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용기를 내어 축제 기간 동안 주막 봉사에 자원했다. 말이라도 한번 하게 될까 싶어 해주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해주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차은호가 나타났다.

차은호를 담는 순간 묘하게 변하던 해주의 눈빛. 여왕이었던 해주가 천박한 존재로 한순간에 전락하고 말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경은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3년 전, 전신 성형 수술을 받은 결과 해주와 제법 비슷한 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얼굴은 무려 네 번의 수술 끝에 가장 비슷한 윤곽을 얻게 되었다.

두 손으로 제 몸을 느릿하게 어루만져 본 경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닮았어.”

만족스러웠다.

수술 이후, 대학 시절 해주를 탐냈던 남자들을 찾아내어 한 명씩 정복했다. 개중에는 결혼한 남자도 있었는데, 유혹이 어렵지 않았다.

지해주의 몸과 얼굴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니, 그 역시 웃기는 일이었다.

어제는 고고한 성직자 같던 강현욱까지 손에 넣었다. 이제 남은 건 차은호 하나.

해주를 꺾고 왕좌에 오른 그를 정복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해주야, 내가 너 대신 평범한 여자의 행복을 누릴 테니까, 넌 여왕으로 돌아가. 제발.”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에서 해주를 찾으려 애쓰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때였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창성 사모님>

까만 액정에 불을 밝히며 떠오른 이름을 바라보며 경은이 만족스레 웃었다.

해주를 뒤흔들기에 딱 좋은 패, 나원정.

하지만 이 여자 역시 해주에게는 걸리적거리는 존재일 뿐이지.

“기다려요, 사모님.”

전화를 받지 않은 원정이 수화기 너머의 원정을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사모님도 애가 타 봐야죠.”

* * *

오후 일정을 취소했다.

정 실장으로부터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받은 것이 오전 11시경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문득, 해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주는 괜찮을까.

임원 회의에 들어가기 전,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속 그녀는 한마디도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익명 게시판 글 내려요. 아니, 게시판 자체를 없애 버려. 누가 올린 건지 찾아서 변호사에게 자료 넘기고 허위 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발 조치 해요.]

정 실장에게 짧은 명령을 내린 은호는 발길을 돌려 곧장 강릉으로 차를 몰았다.

누가 올린 건지 굳이 찾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버젓이 제 가족사진을 올려놓은 미친 여자. 그 여자겠지.

경고했는데, 말귀를 들어먹지 않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쓴웃음을 흘린 은호가 속도를 높였다.

강릉으로 들어서자마자 호텔로 달려갔다. 조금 전, 이지수 팀장이 주소를 보내 준 곳이다.

해주가 너무 많이 울어서 과호흡증이 왔다는데, 한사코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우겨 호텔 방을 잡았단다.

딩동.

벨을 누르자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준 지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는 행사장 돌아가 볼게요. 마무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수가 손짓하자 해주 곁을 지키던 김 팀장이 쪼르르 달려왔다. 역시 은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숨을 고른 은호가 침대로 다가갔다.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해주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코트를 입은 채 침대 위로 올라간 은호가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끌어안았다.

“나 왔어.”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해주의 몸이 좀 더 거칠게 떨렸다.

“울 거면, 나한테 안겨서 울어. 네 등 보는 거, 지금은 싫어.”

흑, 흐윽.

가느다란 떨림이 울음이 되더니 해주가 몸을 돌려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런.

눈물로 범벅이 된 해주의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심장을 붙들고 있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내리는 듯하다.

내 여자를.

결혼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울게 만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곁에서 그의 여자로 지내는 동안은 울지 않기를 바랐다.

감히 내 아내를.

눈이 짓무르도록 울고 있는 해주를 쓰다듬은 은호가 그녀의 눈물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눈가를 적시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죄다 들이마실 작정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눈물이 사라지게 할 것이다.

짭조름한 눈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자 가슴 가운데가 뻐근하게 아렸다. 눈물을 흘리는 건 해주인데 왜 그의 가슴이 이 지경일까. 이 먹먹하고도 불유쾌한 감정을 떨치려면 해주가 그만 울어야 할 텐데.

“울지 마.”

그러고는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입술을 감쌌다가 떼어 낸 그가 다시 그녀를 눈에 담았다.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자 눈물이 그렁대는 담갈색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울어. 내가 아닌 걸 아는데.”

쏟아지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해주의 입술에 삐죽하며 힘이 들어갔다.

웃기는 일이다.

우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참아 내는 건 더 마음이 아프다.

“그 사진, 아무리 뜯어봐도 너 아니야. 그걸 너로 착각하는 것들이 등신들이지.”

도대체 눈은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건지. 해주와 그 여자를 어떻게 착각할 수 있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다들 알 거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까.”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의 가슴에 붉어진 눈을 부닥친 해주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너무 끔찍해요.”

고운 음성이 눈물로 얼룩지고 잔뜩 잠겨 들었다.

“나를 향하는 악의적인 마음이 무서워.”

그의 코트 깃을 꼭 거머쥔 해주의 손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그러자 또다시 가슴 가운데가 찌릿하다.

“이유가 뭔지. 그만큼 내가 싫은 건지.”

파들거리며 떨리는 가녀린 몸을 은호가 꼭 끌어안았다.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부디 해주의 고통이 잦아들기를 바라고 바랐다.

“꼭 나더러 죽으라고 치성드리는 것 같잖아.”

해주를 쓰다듬던 손길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죽으라고 치성을 드리다니, 또다시 그런 짓을 한다면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다.

“걱정하지 마.”

살며시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은호가 해주의 턱을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누가, 어떤 악살을 쏘더라도.”

해주의 턱을 당겨 저를 바라보도록 만든 은호가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다 막을 거야.”

해주의 눈망울에 또다시 눈물이 그렁거린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걷어 냈다.

“네가 우니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

애써 마음을 감춘 은호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좀 더 짙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래야 이 애매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물 하나에도 찢어지는 마음이 과연 욕정일지, 아니면 다른 무엇일지.

확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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