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결행일은 오늘 새벽입니다.”
그건 인사를 건네던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그토록 여상하게 반란을 입에 담다니.
비정상적인 담대함에 리코드 대공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히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닌가 싶어.”
“대공전하께선 황제가 되고 싶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하늘색 머리칼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더없이 불길하게 빛난다.
그는 대공을 조금도 위협하지 않았으나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제국의 누구라도 그렇듯, 대공 역시도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위험한 인사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최근 얼마간은 그 정도를 넘어선 듯했다.
그 눈. 인간 같지 않은 눈동자에 때로는 흉포한 광기가 비쳤고,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현기가 비쳤다.
‘실종된 사이 무슨 일을 벌이고 온 건지. 아니면, 숨기고 있던 건지.’
물론 그러한 변화는 사내가 진짜 크루엘로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대공이 진실을 알 리는 없었다.
상대가 퍽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수십 년 전 그랬듯이, 일은 수월하게 진행될 테니까요.”
“……부디 그때의 일을 비유로 삼진 말아 주게. 그날의 싸움은 결국 황실의 승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멋대로 목줄을 풀어 버린 개를 어느 주인이 예뻐한답니까.”
대공은 가까스로 침음을 삼켰다.
그 말은, 반역 사태를 주도한 게 화이트데저트임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대공은 잠깐의 호기심에 목숨을 불태우는 부나방이 아니었다.
그는 결론에만 집중했다.
두려워할 것 없이, 그토록 강대한 이들이 제 편을 드는 이 상황 자체가 기회였다.
그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누구인들 협력하지 못할까.
설령 내밀어진 것이 악마의 손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대공전하를 그 자리에 올린 게 누군지나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에 은근히 녹아든 성력이 일말의 불안감조차 지워 냈다.
대공은 의지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간이가 아니라네. 그러면 공작, 자네만 믿고 있겠네.”
“무운을 빕니다.”
혼곤하게 풀린 눈을 보고 상대는 미소 지었다.
대공을 뒤로한 채, 크루엘로의 탈을 쓴 에덴은 저택을 나섰다.
바깥은 풀벌레 소리조차 없이 조용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벌레 같은 미물조차 그가 쌓아 온 격을 아는 건지, 언제부턴가 에덴이 거니는 길은 늘 그랬으니까.
에덴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당분간은 이 껍데기를 쓸 일이 없을 테지.’
리코드 대공은 황실을 뒤엎고 새로운 황제가 될 것이다.
즉위식에 각국의 사신단이 올 때까지, 크루엘로의 행세를 하며 얻어 낼 건 없었다.
그는 수정으로 만들어 낸 외피를 지워 냈다.
하늘색 머리칼의 남성이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기다란 은발을 잡아채어 쓸어 넘겼다.
‘사신단에 침투해 사람을 현혹할 때는, 아무래도 이쪽이 경계를 덜 받을 테고.’
이 모습으로 있어야, 또 다른 신도가 찾아오기도 좋을 테니까.
에덴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밤이 밝은 듯하더니, 달은 어느 때보다 크고 동그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달이 저리도 탐욕스러워 보일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페불라시여.’
다 잊혀 가는 페불라를 유일신으로 추대하고 모든 인간을 운명에 복속시킨다.
그걸 위해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을 바쳤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황홀해지는 일이 오로지 에덴의 공이었다.
비록 그것이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미소 지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혼자 있을 때면 늘 그랬듯, 그는 누군가의 예언을 떠올렸다.
「그자는 여인이었고 사내였고 노인이었고 어린아이였으며 천사였고 악마였고 인간이었으며 괴물이었다.」
그건 에덴이 글러트니로 살아가던 때, 당시 최고의 예언가가 발설한 미래였다.
그 또한 어떤 고대 신의 신도였다는데 진작에 지워버렸기에 어떤 교단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 에덴이 그 예언을 외우고 있는 건, 순전히 그 말이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
제자 텔가가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면 900년 후에는 어찌 되겠나이까.
호르메이아는 답했다.」
“그때는 광명한 빛이 세상을 어루만질지어다.”
그의 대계가 성공할 것을 암시하는 말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이따금 몸이 지치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예언을 되새기며 버텼다.
이제는 결말에 이르렀으니 그런 것쯤 잊어버려도 좋겠지만.
“음?”
문득 에덴의 귓전에 발걸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척을 감출 의지도 없이, 그 솟구치는 성력을 어쩔 생각도 없다는 듯이 보름달을 등지고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역광 때문에 그 얼굴이 어둡게 보였음에도 에덴은 무심코 감탄했다.
칠흑 같은 머리칼은 파도가 이는 밤바다처럼 굽이친다.
대비되게 흰 얼굴은 말갛고 이목구비는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름다워 보이려 조형했다기보다는 아름다움 자체를 깎아 만든 듯한 외관.
결정적인 건 청록빛 눈동자였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물을 몇 번이나 거르고 걸러 담아내면 저런 빛이 나올까, 에덴은 순수하게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아아.”
페불라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기에, 이토록 적합한 얼굴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에덴은 기꺼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희열이 번진 그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빨리 왔네, 내 동생.”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건조한 말투로 내뱉는 목소리까지 아주 마음에 든다.
만약 그녀가 페불라의 신도가 아니었다면 그 육신을 빼앗아 집어삼키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모든 일이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
에덴의 두 눈이 짙은 황홀감으로 물들었다.
눈깔이 왜 저래.
혹시 누가 정상인이라고 오해할까 봐 저러나?
여전히 미뉴엣의 육체를 쓰면서, 저렇게 미뉴엣이 아니란 티가 나기도 힘들겠다.
나는 불쾌해 에덴을 노려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그 감정을 망쳐 버리고 싶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니, 아이야.”
“누가 자기 예정을 줄줄이 읊었다고 하더라고.”
이건 〈운명〉에서 서술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크루엘로에게 들은 말이기도 했다.
일단 황좌부터 갈아엎겠다고 했다나 뭐라나.
봄바람이 뇌에 잘못 들어간 게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크루엘로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무고한 죽음을 막으려 애쓰는 게 정말 영웅 같구나. 성공하긴 힘들겠지만.”
“뭐라는 거야, 이미 성공했어.”
“응?”
“반란 같은 거, 일어날 일 없다고.”
에덴은 의아한 듯 눈을 깜박이다가 픽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옆에 크루엘로가 없구나. 네가 시선을 끄는 동안 그 애가 뭐라도 하고 있나 봐? 이를 테면, 대공을 습격한다거나.”
“네가 알면 눈이 뒤집힐 만큼 특수한 임무를 맡고 있긴 하지.”
“안됐지만, 대공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 늦게 도착해도 괜찮고 설령 죽는다고 해도 다른 스페어는 또 있으니.”
그는 진정으로 내가 제 일을 망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기색이었다.
자신감의 근원은 알 만했다.
황제를 사슬로 결박했듯, 그가 수백 년간 제국에 뿌리내리면서 종으로 삼은 인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당장 수십 년 전의 반란을 회고하더라도 그가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인사가, 나라 하나쯤 뒤엎을 정도로 많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둘을 막아 낸들 의미 없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스페어도 못 움직인다고. 전부. 네가 술수를 부려 놓은 사람이든 아니든, 수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말이야.”
“뭐……?”
“지금 너무 시간이 늦었잖아.”
사방이 검게 물들다 못해 날짜가 넘어가는 시간.
여태까지도 안 자고 있으면 키가 안 큰다.
나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착한 어른은 잘 시간이거든.”
에덴은 눈가를 좁히다가 돌연 성력을 끌어 올렸다.
“전음signal.”
그의 손에서 피어난 나비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원래는 소리를 전하는 주문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쓰고 있지는 않다.
반대로 오감을 전달받기 위한 패밀리어로 쓰나 본데, 수백 년을 살았다고 주문 응용력은 남달랐다.
전과 달리, 그 모습에 배알이 꼴리지는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패배의 미소를 지은 건 에덴이었다.
“뭘 한 거야, 시오라?”
“수도의 모든 사람들을 잠재우는 주문. 그리고 본명은 라스티야.”
“그런 주문은 없을 텐데?”
“없었던 거지.”
나는 에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건 페불라와 대면할 때 알게 된 이야기였다.
고유 주문이란 게 이야기의 특성에 맞추어 성녀, 성자들이 깎아 낸 주문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도 못 할 건 뭐람.
일반 주문과 달리 고유 주문은 한 장에 주문이 하나씩 대응한다.
9주문 수정, 10주문 역행, 11주문 탈피, 12주문 헌신이었지.
그러니까 내가 새로이 만들어 낸다면.
“13주문, 책갈피bookmark야.”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기능은 일시 정지.
주문이 발휘된 동안은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움직일 수 없어.”
에덴이 무슨 수작을 부렸다 한들 모조리 틀어막을 수 있는 완벽한 방패였다.
멍하니 굳었던 에덴은 곧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이 마냥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유 주문을 만들어 시간을 멈추었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건 수백 년간 격을 쌓아 온 나조차 불가능한 일이야.”
“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개중 더 아픈 손가락도 있는 법이라.”
“허?”
“페불라께서 날 편애하신단 소리야.”
에덴의 입가에 인위적인 미소가 걷히고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계속 거짓말로 치부하기엔 너무 진실처럼 들렸나 보지.
간단한 도발에 감정을 드러낼 줄 몰랐으나, 별개로 속은 시원했다.
“……말은 좀 가려 하는 게 좋겠어.”
여유를 잃은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에덴 또한 삽시간에 공격성을 드러냈다.
그의 그림자에서 커다란 뱀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그림자를 털어 낼 시간도 없던 터라 새하얀 뱀은 검은 얼룩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꽤나 섬뜩했으나 나는 동요 없이 주문을 외웠다.
─6주문. 가호protection.
신성한 방패가 떠올라 뱀의 공격을 막았다.
콰득!
이전에는 뱀의 입질 한 번에 방패가 부서졌었던가?
그건 옛날이야기지만.
방패는 뱀의 이빨을 부러뜨리고, 에덴의 종을 그대로 밀어붙여 바닥에 찍어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