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34화 (134/162)
  • 134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문을 외웠다.

    “수정modification.”

    처음에는 주문이 고장 난 것처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성력을 쏟아붓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기어이 내가 이전에 다룰 수 있던 총량을 밀어 넣은 순간, 허공에 직사각형의 문이 생겨났다.

    어느 정도의 기준점까지는 반응하지 않도록 공간 전체에 수정을 걸어 놓은 건가.

    슬그머니 그 문을 밀자 틈새가 열리며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이거 봐라.

    “순 사기꾼이잖아.”

    어쩐지 열쇠를 되찾으려는 노력도 안 하더라.

    애당초 에덴은 열쇠 없이도 모리온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던 크루엘로는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깥으로 이어진 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맞아, 크루엘로.”

    나는 입꼬리를 비죽 틀고 웃었다.

    “열쇠가 있어야만 올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복선을 신경 쓰길 잘했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고 살아야 한다니까.

    ***

    우리는 게이트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크루엘로가 호수의 좌표를 기억한 덕분에 물에서 기어 나올 일은 없었다.

    계속 기다렸는지 곧장 데이디어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크루엘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곧장 다른 화두를 입에 올렸다.

    “실은 두 분께서 호수에 계시는 동안,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라니, 경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왔나?”

    “아닙니다, 전하.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을뿐더러 따라붙은 추적자도 없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디어를 믿는다.

    그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좀 더 은밀한 방식을 썼을 테니까.

    크루엘로는 여전히 예민해 보였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스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 없으니 크루엘로에게 온 연락일 테고, 그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에덴뿐이니.

    나는 내심 상대를 확정 지은 채로 물었다.

    “그래서 데이디어, 누구한테서 온 연락이에요?”

    “신전입니다.”

    “……네?”

    갑자기 신전?

    “상세한 내용을 말해 봐.”

    “여기 계신 분께 메시지를 하나 전하라 들었습니다. ‘운명의 사자께 잠깐의 시간을 청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내게 온 연락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내가 페불라의 신도라는 걸 어떻게 알았으며 신전에서 왜 나더러 만나 달라는지는 의아했지만, 나쁜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 거야, 라스티.”

    “음.”

    좋아, 생각해 보자.

    신전은 〈운명〉에서도 최후의 최후까지 크루엘로와 맞서 싸웠다.

    그러니 일단, 그쪽에서 에덴에게 현혹되었을 리는 없다.

    메시지도 제법 정중하니 내가 이단이라고 시비를 걸려는 것 같지도 않고.

    적의가 없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외엔 추측할 거리가 없다.

    하나 이미 내 정체는 드러났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그들을 만나야 했다.

    혹시 그쪽에서 얕은 술책을 부린 거라면…….

    로 블루가 교황의 조카라고 했던가.

    “뭣하면 인질이라도 잡지, 뭐.”

    “예?”

    “가겠다는 소리예요.”

    “그러면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데이디어는 신전 측에서 건네받은 듯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푸른 불꽃이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이 얼핏 보기엔 재빠른 새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고, 저렇게 만들어 둔 걸까?

    제법 본격적이다.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쪽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너무 늦으면 약속을 다시 잡아야겠네요.”

    “그럴 수단이 있으십니까?”

    “바람맞히겠단 말…….”

    대화를 잇던 중,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같은 기척을 느꼈는지 크루엘로와 데이디어도 차례로 시선을 틀었다.

    흰 구름을 뭉쳐 놓은 것 같은 무리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근처에 엎드려 있었나 보네.”

    “좋아, 좋아, 성의 있어.”

    백마를 타고 새하얀 제복을 입은 성기사단.

    선두에 있는 남자는, 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로 블루는 말에서 내리더니 시오라를 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손히 인사했다.

    “운명의 사자를 모시러 왔습니다.”

    ***

    관련이 없는 데이디어는 방문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도 애석한 기색이 없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불러 달라 말하고 떠났다.

    나와 크루엘로는 성기사단의 인도 아래 어딘가로 이동했다.

    도착지는 대신전이 아니었다.

    수도 외곽의 숲으로 들어가면 있는 자그만 신전, 신성 주문을 통해서만 열리는 공간이었다.

    그 존재조차 몰랐던 장소의 입구에는 허리를 꼿꼿이 편 노인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자세 반듯한 할머니랑 상성이 안 좋은데.

    크루엘로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꿍얼거리자 그가 웃었다.

    우리가 말에서 내리자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던 듯, 성기사단이 자리를 비웠다.

    얼마 가지 않아 자리엔 노인과 우리만 남게 되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노인은 빈말로도 온화한 인상은 아니었다.

    색이라곤 없는 얇은 은테 안경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듯이 차가운 표정.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내가 봐 온 현 신전의 성직자 중 가장 짙은 성력이 넘실거렸다.

    누군가를 몹시 닮았는데 착각은 아니겠지.

    “신을 섬기는 첫 번째 종, 아르센이라고 합니다.”

    현 신전에는 성녀나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첫 번째 종이라 함은 곧 교황을 일컬었다.

    교황을 닮은 얼굴에 이만한 성력, 당연한 이야기지.

    나는 비굴하지 않은 선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교황성하를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라스티라고 합니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입니다.”

    간단한 인사 끝에 나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바깥에 나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거물이었으나, 별다른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아무 사람을 보는 것과, 하다못해 이 숲에 있는 나무나 바위를 보는 것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만큼 아르센의 존재감이 희박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내 시야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교황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운명의 사자께서는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을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제가 좀 예의범절이 특출해서 말을 높이는 게 편해요.”

    “…….”

    “뭐야, 크루엘로. 왜 그렇게 봐?”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는 아무런 해명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자리니 봐준다.

    그리고.

    “고대 교단을 달가워하시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교화하고 통합해야 할 대상으로 보시는 게 아니었나요?”

    “그래야 했습니다.”

    그녀는 옅게 미소 지었다.

    웃어도 인상이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내버려 두었다간 검은 뱀에 사냥당해 덧없이 목숨을 잃어버릴 테니까요.”

    “그게 설마 핑계예요?”

    “또한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교단의 교리는 당대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사자께서도 그래서 고생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현 신전도 마찬가지가 될걸요.”

    “그러면 그때는 또 새로운 신께서 인류를 굽어살피실 겁니다. 운명께서 스스로의 존재를 내려놓으신 것처럼요.”

    나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교황이라는 사람이 제 신의 소멸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게 놀랍기도 했고, 말을 덧붙였다간 페불라를 모욕하는 꼴이 될까 저어되기도 했고.

    이런 게 연륜이라는 건가.

    레카논 교단이 쫓겨 다니는 걸 본 이후 현 신전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으나 그 은근하던 적의도 한풀 꺾였다.

    얌전해진 나를 대신하여 크루엘로가 물었다.

    “라스티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탁이요?”

    “사자께서 어떤 일을 헤쳐 오셨는지, 이후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에 대한 신탁입니다.”

    “……성하의 신께선 그토록 구체적으로 계시를 내리시나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나 놀랍진 않다.

    그리고 기껍지도 않았다.

    현 신전의 조력 없이도 힘든 일을 잘 헤쳐 왔다.

    페불라께서 존재 자체를 내건 마당이니 더 이상 곤란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는 모양새가 달가우면, 그건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호구다.

    “모릅니다. 신탁을 받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네?”

    진짜?

    나는 자연스럽게 크루엘로를 쳐다봤고 곧장 그의 입이 열렸다.

    “현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압니다만.”

    “왕왕 신관들이 꿈에 본 것을 세간에 떠들어 댔을 뿐입니다. 신탁이라 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 순식간에 와전되더군요. 저희도 구태여 낭설을 정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유리한 소문이라, 모르는 척 내버려 뒀다는 거지?

    뭐야.

    안 그렇게 생겨서 이 할머니 왜 이렇게 뻔뻔해?

    현 신전은, 조금 재수 없고 수동적이라도 타협 없이 완고하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착각이었나?

    “거짓말해도 된다는 교리가 있나요?”

    “하면 안 된다는 교리도 없습니다.”

    “허?”

    “아마 선조들께선, 신께서 신탁을 내릴 정도로 사람들을 굽어살핀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거라고 판단하신 걸 겁니다.”

    너무 자의적인 해석 아니야?

    어쩌면 이 할머니는 수백 년 전에 태어났으면 페불라의 신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처음엔, 신탁을 받고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사제께서 모시는 분이 이야기와 운명의 주인이라는 걸 아니 이해가 가더군요.”

    신탁.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

    아무래도 교황은, 페불라께서 그 신탁에 간섭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권능을 넘겨받았다고 한들 내 신과 생각을 공유하는 건 아닌 터라, 나는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직감으로만 판단할 때 그 말이 아예 틀린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페불라께선 호구인가 봐.

    나는 한숨을 참았다.

    “지시하실 일이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요.”

    “무엇이든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이겠지요.”

    그건 내가 종종 장난스레 내뱉던 말과 같았으나 남의 입으로 들으니, 아예 다른 말처럼 느껴졌다.

    목 안쪽에 무언가 형체 없는 덩어리가 뭉쳐 있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의미도 없이 크루엘로를 쳐다봤고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맞잡은 온기가 마음으로 스며들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해 주었다.

    조금, 기뻤다.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일 뿐이다.

    그간 내가 해 온 고생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닐 말.

    그런데 그 얄팍한 감사를 들은 것조차 처음이라 마음에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파문이 번졌다.

    내 신이 호구라 나도 호구가 됐나 봐.

    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다만 크루엘로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힘써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인간들은 결코 그 노고를 잊지 않을 겁니다.”

    “……잊어버릴걸요.”

    나도 인간인지라 잘 알았다.

    당장 어제 먹은 식사 메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판에, 남의 공로가 오래 기억에 남을 리 없지. 세계를 구했다는 건 너무나 막연한 이야기고, 그 주체가 잊힌 신의 사도라는 건 어린아이의 상상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기록으로 남겨 길이길이 보전할 테니까요.”

    “아니요, 투덜거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뒷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이 기뻤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내 의도를 숭고하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감사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었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인사를 들을 생각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공간이었다.

    내 집을 안전하게 가꾸고 싶은 건 누구나 품는 욕망이니까.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나 자신과 내 주변인들이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교황의 말 한 마디 정도는 가볍게 즐길 수 있겠지만.

    나는 가만히 웃었고 노인 또한 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그 웃음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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