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36화 (136/162)
  • 136화

    파충류의 몸체가 두 동강 났다.

    실제 동물이었으면 그 광경이 퍽 괴기했겠으나 성력으로 만든 뱀은 그저 희고 기다란 덩어리였기에 꼭 밀가루 반죽을 썰어 낸 것 같았다.

    전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는 점에서도 요리 재료랑 비슷했다.

    “…….”

    에덴의 시선이 가만히 제 뱀에게로 향했다.

    그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페불라께서 더 많은 가호를 내려 주셨다는 건 진짜인가 보네.”

    “수백 년 묵은 사람치곤 열려 있구나, 에덴.”

    “하지만 경솔해. 꼭 성검을 쥔 갓난아기 같구나.”

    “인정할게, 네 나이에 비하면 그 정도 연배긴 해.”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는데, 입매만큼이나 심기도 뒤틀린 듯했다.

    “시간을 멈추는 주문이라고 했던가? 그 말대로라면, 지속적으로 성력을 공급해야겠어.”

    “응, 그렇지.”

    “그 상태라면 고위 주문을 병행하지는 못할 테고.”

    “오, 맞아! 정확해.”

    화를 북돋우려고 일부러 더 발랄하게 말하자, 에덴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맞다고?”

    “에이, 수도 시간을 통째로 멈춰 놨는데 고위 주문을 펑펑 써 재끼면 내가 신이지. 가호는 미리 주문을 외워 둬서 가능했던 거고 책갈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못 해.”

    “오만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네.”

    “맞혀 보지 그래.”

    에덴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8주문. 낙원heaven.

    새하얀 빛기둥이 곧장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뱀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그 기세가 위협적이었다.

    두 단계나 아래 주문인 내 방패는 에덴의 낙원을 버텨 냈으나, 주문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8주문. 낙원heaven.

    ─8주문. 낙원heaven.

    ─8주문. 낙원heaven.

    끊기지 않고 쏟아지는 성력에 기어이는 첫 번째 방패에 금이 가 깨지고, 두 번째로 대체해야 했다.

    그렇게 방패 세 개를 다 쓸 때까지 나는 에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의 손바닥에 새로 새긴 마법진은 없었다.

    크루엘로가 진작 그 장소에서 베아티투도를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진 않겠네.

    내가 판단을 내리는 동안 낙원은 기어이 모든 가호를 부수고 내 앞까지 닥쳐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큐딜을 상대할 때처럼,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빛에 삼켜지기 직전.

    쩌저정! 빛기둥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와우.”

    빛이 얼어붙다니,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보이기로는 그랬다.

    저온에 붙들린 낙원은 사방으로 빛을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작품을 만들어 낸 예술가에게 기꺼이 박수쳐 주었다.

    “팔아도 되겠어.”

    “무슨 소리야?”

    게이트를 열고 나오던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렸다.

    못 알아들었으면 말고.

    “그래서 어땠어?”

    “네 말대로 다 굳어 버렸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세등등하게 새로운 주문을 만들어 낸 것까진 좋았지만, 그 효력을 시험할 여유는 없었다.

    크루엘로가 정찰 삼아 상황을 확인해 주기로 했고, 임무를 마친 정찰대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 이야기였다.

    에덴은 이제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워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턱 근육만 불거진 모습이 외려 그의 분노를 더 잘 드러냈지만.

    그는 손안에서 성력을 굴리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기간에 크루엘로가 내 성력을 얼릴 정도로 성장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베아티투도를 썼나?”

    “잘못 먹으면 죽기 딱 좋은데 뭐 하러.”

    성력에 숙련된 나로서도, 내 몸을 통로로 베아티투도를 쏟아 내는 게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시오라의 몸을 못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크루엘로가 다른 데서 에너지를 끌어다 쓴다면 차라리 모리온이 더 안전할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성력이 썩어 넘치는 김에 내가 만들어 줬어.”

    수확제에서 신수들을 굳혀 베아티투도를 만들 듯이, 내 성력을 굳혀 에너지원으로 만들어 줬다.

    페불라께서 소멸하신다면 한낱 소금 덩이만도 못하게 될 테지만, 에덴을 상대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을 것이다.

    내가 수도의 사람들을 재워 놓는 동안 대신해 크루엘로가 그를 막아 줘야 했으니까.

    “하.”

    기가 막히다는 듯, 에덴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다시 주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무식하게 쏟아 내는 식은 아니었다.

    “수정modification. 낙원heaven.”

    수정으로 공간을 왜곡하고 낙원을 퍼붓는다.

    빛은 직진한다는 상식이 조각난 것처럼, 방향을 알 수 없는 공격들이 마구 휘어져 들어왔다.

    그러나 방식이 정교하다 한들, 그것은 내가 시오라일 적 낙원을 퍼부어 대던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결과가 같았다는 말이다.

    크루엘로는 주변의 공간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 내지는 않았지만, 흡사 영역을 만들 듯 하늘빛 얼음을 사방으로 쏘아 냈다.

    거미줄처럼 뻗은 그것에 닿을 때마다 빛줄기는 얼어붙었다.

    거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크루엘로의 발치에서 허공에서 에덴의 뒤에서 수 미터나 높은 하늘에서 반경 1m가량의 눈송이가 피어나더니 에덴을 향해 얼음 창을 쏘아댔다.

    빛과 얼음이 교차하며 늦봄의 밤을 겨울 아침으로 바꾸어 놓았다.

    두 사람은 점점 피를 흘리는 일이 늘었으나 열세에 몰린 건 에덴이었다.

    단련하지 않은 미뉴엣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그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전투에 익숙해 보였으니까.

    화력 차이만 보강해 준다면, 그는 엘린보다도 상대하기 쉬운 적이었다.

    으득, 이를 악문 에덴이 공격을 멈추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그는 말을 꺼내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는 제자리에 선 채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놀랍게도 천천히 여유를 되찾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네.”

    “갑자기 입을 여네. 성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아니, 어차피 상황은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에덴은 우리를 경계하던 자세마저 거두고 맨몸으로 다가왔다.

    크루엘로가 얼음 창을 만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는 그것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해 보란 듯 양팔을 활짝 벌렸다.

    결국 그의 가슴께가 뚫리기 직전에, 크루엘로가 창을 거두었다.

    푸하하, 에덴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미뉴엣 보네티를 죽일 결심이 안 서나 봐?”

    “…….”

    “그 어설픈 애정을 지우지 않으면 영원히 날 죽이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

    그는 짐짓 안타까운 양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문득 깨달은 듯이 끄덕였다.

    “아, 참. 어차피 이 몸을 죽이더라도 나는 죽을 일이 없겠구나.”

    아직 성직자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입을 한번 시원하게 찢어 주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도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에덴은 입매를 기이하리만치 당기고 미소 지었다.

    “안타까워서 어떡하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네.”

    “유감이지만─.”

    “이미 변했는데, 에덴.”

    크루엘로가 내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그러고는 곧이어 하늘을 가리켰다.

    덩달아 그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고개를 꺾었고, 파란 새처럼 날아오른 신호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빠르네.

    마음에 은근히 쌓여 가던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개를 내리자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사내가 보였다.

    “실은 내가 현 신전에 부탁 하나를 했거든.”

    “뭐.”

    “내가 시간을 멈춰 둔 동안, 반역을 일으키려는 주축들에게서 네 사슬을 제거해 달라고 말이야.”

    에덴의 주문을 제거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맹세는 하위 주문이었다.

    그 변형쯤은 어떻게든 떼어 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현 신전의 신관들은 내 부탁을 수월히 들어준 모양이었다.

    “오만하구나, 아이야. 내가 누구에게 씨앗을 뿌려 두었는지 네가 다 알 리도─.”

    “수백 년을 살아서 그런가 왜 그렇게 시야가 좁지? 다 알아.”

    그건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으나 에덴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저 옹졸한 할아버지가 제 비밀을 누구한테 털어놨겠는가.

    누구를 포섭했는지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 뒀을 테니 새어 나갔을 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았겠지.

    다만 미래의 사람들은, 그가 제 목적을 위해 짓밟았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나의 신 또한 마찬가지로.

    나는 〈운명〉에 기록되어 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에덴의 표정이 변해 갔다.

    용케 그 정도는 알았구나, 하듯 얕보는 표정에서 곧 당혹감을 감추려는 표정으로 변하고, 기어이는 참지 못하고 그 얼굴에 경악을 드러냈다.

    마치 온 얼굴로, ‘그걸 어떻게’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에덴과 달리 설명해 주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그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게 인간의 예언을 보여 준 적이 있었지? 마찬가지야.”

    “뭐?”

    “내가 살던 곳, 그러니까 푸가 신전에 〈운명〉이라는 이름의 예언서가 들어왔었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곧.

    “네 계획이 망하는 것도, 결국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단 뜻이야.”

    나는 수도 전역에 흩뿌려 놓았던 13주문을 거두었다.

    마치 내게로 유성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시간을 붙잡고 있던 성력이 내게로 돌아온다.

    전신이 환하게 빛나고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는 에덴이 반응할 겨를을 주지 않고 곧장 입을 열었다.

    “광휘brilliance.”

    아, 참고로 에덴만을 노리도록 변형한 주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미뉴엣을 죽일 결심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까.

    새하얗고 성스러운 빛은 피할 곳 없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강대한 성력은 어떠한 생명도 해치지 않았다.

    불타오른 건 오로지 에덴의 영혼뿐.

    그렇기에 빛이 꺼졌을 때도 그의 외관만은 무사해 보였다.

    에덴은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수그렸다.

    흡사 선 채로 죽은 사람 같기도 했다.

    신음하며 그는 겨우 충격을 견디다가 돌연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숨겨 둔 단검을 꺼내어 제 목에 겨누려 했다.

    근처에 있던 크루엘로가 그의 팔을 비틀어 꺾어 칼을 빼앗았다.

    그게 아니라도 스스로 숨을 끊는 짓은 못 했겠지만, 불쾌한 도발이다.

    팔이 등 뒤로 꺾이고 허리가 구부러진 채, 에덴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다는 건데.”

    그가 고개를 비틀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한 시선에서 진한 악의가 번들거렸다.

    “너, 좀 멍청하니? 페불라께 더 많은 가호를 받아 봐야 네가 할 수 없다는 건 똑같아. 적어도 내 신앙이 온전한 이상은 말이야.”

    “글쎄. 네 생각보단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걸.”

    “왜. 또 주문을 만들어 보려고? 나를 성자에서 박탈시키는 주문? 내가 영혼을 못 옮겨 다니게 하는 주문? 내가 원래 주인에게 몸을 돌려주게 하는 주문?”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는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 꼴도 몇 번을 보다 보니 섬뜩하다기보다는 지겹다.

    같은 패턴을 우려먹는 것도 한두 번이라야 재밌지.

    이제는 이야기에 변주가 필요했고 나는 이미 새로운 악보를 준비해 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