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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1화 (91/162)

91화

보네티 마차 안, 바퀴가 잘 포장된 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렸다.

어떻게든 준비를 마치고 내려오긴 했으나 기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계속 창밖만 쳐다봤다.

인생이란.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크루엘로는 한동안 나를 내버려 두었으나 그러기도 지겨워졌는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

“딱히 웃은 건 아니에요. 그냥 잠깐 사레가 들렸어요.”

“…….”

“달링은 오히려 굉장한 일을 했죠. 단서를 잡은 것만 해도 어디예요. 줄리안 미네르바는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웃지 그래요.”

그 말에 버튼이 눌렸는지, 크루엘로는 몸을 구부렸다.

좁은 마차도 아닌데 그가 원체 큰 탓에 공간이 다 크루엘로로 꽉 차 버린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웃음기에 덜덜 떨리고 있는 크루엘로로.

짜증 나.

나는 그의 정수리를 뚱하니 노려보았다.

“왜 또 창문으로 들어왔어요? 이번엔 정식으로 약속까지 잡아 놓고!”

그는 무어라 답하려고 했으나 다시 웃음이 터져서는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진짜 싫다.

그리하여 그가 제대로 답한 건 대략 3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그냥 습관이 돼서, 미안, 미안해요. 하하.”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맺혔다.

검지로 눈가를 닦아 낸 크루엘로는 그제야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런데 진짜 줄리안 미네르바는 뭐예요.”

“난들 알아요. 대뜸 줄리안 미네르바를 보여 주신 게 전부인데.”

“음, 달링의 신은 계시를 그런 식으로 내리나요?”

“아니요, 원래는 신어로 또박또박 말하죠. ‘구원하라’라든가 ‘침묵하라’라든가.”

“구원은 그렇다 치고 침묵이요?”

어, 지뢰 밟았다.

침묵하라는 계시를 받은 건 어린 크루엘로의 앞에서였다.

어린아이를 속인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정을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

그러니 당연히 지금의 크루엘로에게도 말해 줄 수는 없다.

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런 게 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또 비밀을 만드네.”

“페불라 교단의 특급 비밀이니 크루엘로가 이해해요.”

“알았어요, 나도 미안한 일했으니까 못 들은 척할게요.”

씩 웃으며 말해서 괜히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이게 다 페불라 때문이야.

내가 말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아,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야 해요.”

크루엘로가 내 말을 마부에게 전했다.

우리는 지금 줄리안 미네르바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원래는 대원로 포획 계획을 짤 생각이었지만, 페불라께서 다른 화두를 던져 주셨으니까.

줄리안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도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데이디어의 손에 구출되어 이동 마법을 타고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 협조하기도 했고, 그녀에게 자수하란 말도 들었기에 순조로운 결말을 예상했다.

하나 그 이후, 줄리안 미네르바는 실종됐다고 한다.

난리가 난 미네르바 후작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고.

그러나 내게 줄리안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슬 조각이라는 거 유용하네요.”

그의 목에 박아 넣은 사슬 조각을 아직 빼지 않았으니까.

“목에 꽂을 수 있어야 의미 있어요. 다른 데다가는 넣어도 잘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수준의 상대한테는 안 되겠네요.”

“그렇죠. 바로 제압 가능해야 쓸 수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서의 위치 추적밖에 안 되니까요.”

그가 수도 밖에 있었으면 방방곡곡을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솔직히 추적 마법보다 기한은 길지만, 성능은 떨어진다.

“크루엘로는 줄리안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글쎄요. 아카데미 때 자주 시비를 걸었던 것 같기는 해요.”

“‘같기는’? 왜 그렇게 모호하게 말해요.”

“이건 진짜로 불확실해서요. 그때 기억이 분명한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크루엘로가 아카데미에 들어간 건, 비가로 살다 죽은 직후.

어쩌면 에이미증후군에 이어 비가증후군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원로회의 끄나풀 노릇을 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조금 지켜봤지만, 별건 없더라고요.”

“애초에 누가 꾀어낸 거예요, 잡일 담당이었던 큐딜?”

“나도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정확히 못 찾았어요.”

“그래도 큐딜…….”

큐딜일 게 뻔하다고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어라.

누가 줄리안을 꾀어냈는지 못 찾았다고?

과도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모든 게 단서다.

“혹시 숨어 있는 원로가?”

“가능성이 없진 않죠. 달링의 신이 그런 의도로 말해 줬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기대감이 팍 떨어진다.

페불라께서 그렇게 도움이 되시지는 않을 텐데, 흠.

“일단 심문해 봐서 나쁠 건 없겠네요. 아, 두 블록 뒤에서 오른쪽이요. 그리고 세 블록 더 가서 멈추면 돼요.”

사슬 조각의 기운이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우리는 멈추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정지! 멈추십시오! 이곳은 크림슨 공작저입니다! 신원을 밝히십시오!”

크림슨 공작가였다.

오호라.

***

크림슨 공작이 크루엘로를 좋아하지 않으니 문전박대라도 당할까 우려했지만, 그는 상식이 있는 중년이었다.

“데이디어를 만나러 왔다고?”

“네, 공작님. 저번에 친구가 되었거든요.”

나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만나러 오면서 크루엘로를 왜 데려오냐는 공작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문제없이 공작저의 응접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작은 아가씨께서 잠시 부재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실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이디어가 저택에 없는 것이 의외였으나 있든 없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무렴 생명의 은인을 내쫓기라도 하려고.

사용인은 차 두 잔을 내어 주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리는 약속한 듯이 서로를 쳐다봤다.

“사슬은?”

“위쪽에 있어요. 투명화 부탁할게요.”

“분부대로.”

곧 크루엘로와 내 형상이 보이지 않게 변했다.

다름 아닌 크림슨 공작저인 터라 마법 방비가 조금 더 되어 있는 듯했지만, 문제없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응접실을 나와 위쪽으로 향했다.

3층의 끝에서 두 번째 있는 방.

사슬 조각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 낸 순간, 나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벌컥!

“이─.”

쾅, 도로 닫았다.

닫힌 문을 보며 나는 세 번 정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방금까지 기척 없지 않았어요?”

“있었어요, 너무 당당히 열길래 알고 여는 줄 알았는데.”

“회복이 덜 되어서 그래요.”

“성력 안 쓸 땐 원래 그랬어요.”

“이럴 때 칼같이 굴지 말아요. 음, 투명화 마법 걸었는데 그냥 바람인 줄 알았겠죠?”

“저런. 그러길 바랐다면 입은 안 여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하긴. 이렇게 대놓고 목소리를 들려주면 투명화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곧 크루엘로가 마법을 거두었다.

나는 체념하며 다시 문을 열었다.

재색 눈동자에 장신의 기사, 데이디어가 우리를 맞았다.

“레이디 시오라? 그리고 공작전하시군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데이디어는 조금 전의 그 우스운 상황이 없던 양 여상히 말했다.

창피하지만, 솔직히 고맙다.

나도 의외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오, 안녕하세요. 데이디어 경.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여긴 제 방입니다만.”

내가 그걸 몰랐네.

“잠깐 들어오시겠습니까?”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디어의 사실은 꽤 넓었다.

내 방을 기준으로 하면 1.5배 정도?

살짝 질투가 났지만 괜찮다.

내 신전은 훨씬 더 크니까.

“그런데 데이디어 경, 부재중이라고 들었는데.”

“아, 사용인들은 그렇게 알았을 겁니다. 실은 창문을 통해 귀가했으니까요.”

익숙하게 들리는 말에 나는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수도 유행인가?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예쁘게 눈을 휘었다. 왜 저래.

“요즘 좀 귀찮은 일이 많아서요. 그래서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찾아 주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별건 아니고요.”

나도 데이디어와 수다나 떨러 온 건 아니기에, 곧바로 사슬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은 벽이었다.

하지만 줄리안의 시체를 묻고 벽지를 바른 게 아니라면, 진짜 벽은 아니겠지.

크루엘로가 그쪽을 두어 번 두드리자 빈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여봐, 이거. 숨겨진 공간 있는 거 보라고.

데이디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마나가 닿자 벽이 열리더니 숨겨진 곳이 드러났다.

빈말로도 넓지는 않았다.

사람 하나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정육면체의 공간에 작은 침대 하나.

그리고 그 위에 누워 있는, 줄리안 미네르바.

“황궁 예배당에서 자수를 권하시는 걸 들은 것 같은데요.”

“줄리안도 그러려고 했을 겁니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요.”

줄리안의 온몸은 기이하게도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직 그의 목 부근만 희었는데, 그 모양이 내가 박아 넣은 사슬 조각과 완전히 같았다.

그리고 내 성력의 조각이 검은 마나로부터 그나마 그의 목숨을 부지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기묘한 기분에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흑마법 계열의 저주네요. 조건부는 아니고 원격으로 발동시키는 종류예요. 대상자의 동의가 필요한 저주인데 잘도 이런 걸 달고 있네요.”

그래, 끄나풀이래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겠지.

원로회 측은 이해가 됐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줄리안이었다.

뭐가 아쉬워서 이런 저주에도 얌전히 목줄을 내줬을까.

나는 이 멍청한 청년의 친구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모르겠습니다.”

데이디어는 감정을 다스리듯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줄리안이 실종됐다고 해서, 이동 마법의 도착지에 가 봤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엘린이 죽은 직후에 발동됐다고 해도 무방하려나.

의식이 없는 줄리안, 이대로라면 뭔가를 알아낼 수가 없다.

성력을 써 회복시켜 줘야 했는데, 이런 몸 상태로 무리하는 게 내키진 않는단 말이야.

속으로 불평하며 줄리안을 살피던 때.

“어?”

나는 그의 몸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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