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게 뭐지?
줄리안의 피부에 얼룩덜룩한 게 보였다.
처음에는 먼지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검은 선 같았다.
그의 소매를 들춰 보자 그 형상이 명확히 드러났다.
“마법진…… 같은데.”
몇 군데를 더 확인하고는 확신했다.
그의 몸 전체에 그려진 건 마법진이었다.
그런데 왜?
“요즘엔 초대형 마법이 아니고서야 마법진을 안 쓰지 않나.”
마법진은 막대한 양의 마나를 에너지원으로 쓸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저주쯤이야 인간의 몸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텐데 굳이 이런 걸?
의문을 느낀 순간 크루엘로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마지막 원로는, 아마도 흑마법을 익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요.”
“설마 진짜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크루엘로 쪽을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페불라께서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셨다고?
곧 세상이 무너져 내릴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며 나는 슬쩍 창밖을 확인했다.
멀쩡했다, 아직은.
“혹 짐작 가는 것이 있으십니까?”
내 태도가 수상쩍었는지 데이디어가 물었다.
이쪽에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별거 아니라고 답했으나 그녀는 믿지 않았다.
“줄리안을 통해 알고 싶으신 게 있잖습니까.”
“줄리안이 깨어난다고 한들 말해 주리란 보장도 없잖아요.”
“궁정 무도회에서도 협조한 걸로─.”
“협조가 아니라 순응이었지. 내가 경을 인질 삼아 협박했었거든.”
크루엘로는 당사자 앞에서 태연히 진실을 고백했다.
잠시 데이디어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다시.
“그렇다면, 줄리안이 가진 걸로는 협상이 되지 않겠군요. 전부 협박으로 얻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데이디어도 명색이 황실의 조사관이면서 크루엘로의 협박을 너무 자연스럽게 넘기는 거 아닐까?
그 융통성이 재미있기는 한데 아쉽다.
한 번쯤 크루엘로가 손발에 쇠사슬을 차고 감옥에 갇히는 꼴도 재밌을 것 같은데.
내가 수확제 때 갇혔던 것처럼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반드시 줄리안을 죽이셔야 하는 상황입니까?”
“그 목숨에 별 관심 없는데요. 자수만 하면 이후로도 그럴 거고요.”
아, 참.
“가보트한테 사과는 하라고 해요.”
옆에서 크루엘로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시했다.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진짜.
“그건…… 저도 해결해야 할 과제군요. 그러면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성력을 다루는 걸 약점 삼을 생각은 아니시겠죠?”
“예? 아, 그건 보고드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
자기도 약점이 있으니 나를 협박하지는 못하더라도 생색 정도는 낼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런 화제가 올라온 적이 없는 것처럼 곧바로 용건으로 되돌아갔다.
“흥미를 느끼실 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너무 깔끔하니 외려 당황스럽군.
“줄리안이 이렇게 되고 나서 조사한 자료입니다.”
“……혹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원로에 대한 정보일까요?”
“외려 정보를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달링.”
“시끄러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몬 후작과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통계 형태의 자료입니다.”
줄리안이 저 꼴이 된 게 엘린과 마주치고 난 다음이라 그쪽을 파봤나 보다.
“받아 보시고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시면, 다른 형태로 값을 치를 용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레이디 시오라께서 돈을 좋아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는 평범하게 좋아하는 정도예요. 유별난 정도는 아니랍니다.”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혹시 오해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진짜 상대하기 어려워.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그래서 얼마 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라.”
“제 전 재산이면 부족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저기, 줄리안이…….”
“줄리안의 재산 목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후에 설득하면─.”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나는 고개를 젓고 검지로 그녀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줄리안 미네르바를 가리켰다.
데이디어와 크루엘로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걸 확인하고 말했다.
“깨어난 것 같은데요.”
“정신이 들었나, 줄리안!”
“그리고 눈이 좀 이상해진 것 같기도…….”
내뱉은 순간, 크루엘로가 내 허리를 낚아채어 피했다.
그러자마자 내가 있던 자리에 넝쿨이 내리꽂혔다.
와우. 나더러 이런 놈을 살리래.
불만을 내뱉으려고 고개를 든 순간, 줄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초점이 풀린 하늘빛 눈동자, 그 위로 검은색 역오망성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
“수사를 중단하라니요!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
황태자, 폴라리스는 감히 황제를 상대로 소리쳤다.
특정 가문을 상대로는 언제나 무기력해지던 제 부친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지금만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황제는 이번에도 그녀에게 검을 꺾길 명했다.
그래, ‘황제’가. 이 제국의 주인이!
“소몬 후작이 교단의 중추임이 명명백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화이트데저트의 원로회조차 소환하지 말라니요!”
“그만.”
“당장 대원로를 포박해 수사해야 합니다! 내버려 두면 증거가─.”
“너도 황명을 우습게 아는구나.”
언성도 높이지 않은 그 나지막한 한마디에 황태자의 입이 닫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느냐? 무도회장에서의 그 일은 대원로의 용인하에 벌어진 일이다. 파벌 싸움이었겠지. 목적을 이루었으니 더는 눈감아 주지 않을 테고.”
“……폐하.”
“건드려서는 안 될 가문이야. 됐으니 당분간 근신하거라, 황태자. 황명이다.”
“폐하, 폐하, 폐하! 아버님께서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으십니까?”
황태자가 제 가슴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녀는 크루엘로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의 분노와 그런 말을 듣고도 어쩌질 못했던 모욕감을 되새겼다.
“이 제국의 주인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폴라리스.”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선 당신의 안위나 살피십시오.”
“폴라리스!”
황태자는 휙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한껏 움켜쥔 주먹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만큼이나 붉게 충혈된 눈에는 강한 적의가 번져 있었다.
대전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직속 수하가 다가왔다.
궁인으로 분장한, 비밀 조사관의 수장이었다.
“황태자전하, 긴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는 사방을 살펴보는 눈이 없는 걸 확인하고 빠르게 말했다.
“곧 산양의 쉼터를 찾을 것 같습니다.”
검은 뱀 교단의 본거지를 일컫는 암어였다.
황태자가 힘없이 웃었다.
“이미 다 무너진 건물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도 있더냐?”
“아니요, 두 번째 쉼터입니다. 남은 양들이 그쪽으로 옮겨 간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멈칫한 황태자는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떻게.”
“잠입해 있던 조사관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현재 확인 중이니 쉼터의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산양의 전력은 어찌 되는가.”
“전번의 사태로 최소 55%, 최대 80%가량이 죽었습니다. 충당된 면양 두 마리도 죽었다는 목격 증언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원로들도 모두 죽었다라.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린 듯한 함정이라고 해야 할지.”
황태자는 잠시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비밀 조사관은 잠자코 그녀의 생각이 끝나길 기다렸다.
“말을 전한 게 자네가 아니었다면, 단번에 목을 베고 귀를 씻었을 거야.”
“저 또한 덫일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확정되는 대로 증거를 더 보강하여─.”
“하지만, 그래…….”
그런 행운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영원히 뿌리 뽑지 못하겠지.
“위치가 특정되는 순간 바로 보고하게. 직접 움직이겠네.”
“전하!”
수장이 당황하여 소리쳤지만, 황태자는 번복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부친의 뒤를 이어 길들여진 사자로 살거나, 실낱같은 희망에 일생을 걸거나.
‘어차피 밉보인 마당이니 전자도 불가능하겠지만.’
제 친척을 부추겨 끊임없이 암살 시도를 벌이는 주체가 누군지 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죽 틀어 웃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나는 유리 온실에서 근신하겠다. 긴급한 보고가 있다면 그쪽으로 오도록.”
***
자줏빛 넝쿨이 날아들기를 몇 차례, 그게 또 얼어붙어서 깨지길 몇 차례.
그럴 때마다 방 안의 온도가 훅훅 내려갔지만, 목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런 게 호위 기사의 참맛이로군.
나는 크루엘로의 팔에 매달린 채 걱정 없이 주문을 외웠다.
─2주문, 감각 확장extension.
“줄리안, 정신 차려라, 줄리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데이디어가 검을 빼 들며 줄리안을 막아섰다.
칼날이 넝쿨과 맞부딪쳤다.
통상적인 상식대로라면 식물 줄기가 잘려 나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뜻밖에도 넝쿨은 버텼다.
깡깡, 철이 맞붙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전보다 줄리안의 출력이 좋아진 것 같은데?
기어이 베아티투도를 삼킨 건가 싶었으나 곧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줄리안의 겉면에 새겨진 마법진이 그의 마법을 강화하고 있었다.
음.
“크루엘로, 저거 원격으로 죽이는 저주 맞아요? 뭐가 더 있어 보이는데.”
“피부를 물들인 연보랏빛이 그쪽이고 검은 마법진은 다른 종류 같네요.”
“다르다는 건…… 저주가 두 개라고요?”
“아마도. 내가 말한 건 천천히 생명력이 소진되어 죽는 저주예요. 달링의 사슬 덕에 그 꼴은 면했지만요. 끽해야 손바닥만 한 사이즈일걸요.”
그러면 저건 무슨 마법이려나.
확장한 감각으로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이쪽의 소란이 아래에도 전해졌나 보다.
몇 사람이 이리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