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90화 (90/162)

90화

“미안해!”

미뉴엣의 추궁에 나는 냅다 사과부터 내질렀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뭐가?”

“응……?”

“물론 네가 미안할 일이야 많지. 대뜸 네크로맨서 의혹을 덮어쓰더니 연락도 없이 실종되어 버리질 않나, 상의도 없이 궁정 무도회에 나타나 황제를 기만해 가며 스스로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나, 그러고도 또 감쪽같이 사라져 공작저에서 자고 있다는 소식을 정보 조직을 통해 겨우 듣게 하질 않나.”

숨도 쉬지 않고 내뱉는 말이 하나하나 어깨 위로 쌓인다.

미뉴엣의 말이 다 끝났을 때, 나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변명했다.

“아니, 그게 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야.”

“그…… 러면?”

“파혼할래?”

미뉴엣이 툭 내뱉은 말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농담 아니야. 너, 공작이랑 어울릴수록 점점 상태가 말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 공작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감당할 테니까 해, 파혼.”

“음…….”

“왜. 생각 없어?”

당황스러웠다.

가보트에게 그런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냥 감동을 주는 이벤트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고?

솔직히 말해 크루엘로와 꼭 약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었으나 파혼할 이유도 없었다.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 터라 그럴 여유도 없었고.

“설마 공작을 좋아하니?”

“아, 아니! 무슨 말, 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크루엘로를 좋아하면 반쯤은 범죄다.

내가 에이미로 빙의했을 때, 내 본체는 갓 성인이 된 나이였다.

어려서부터 본 애를 좋아하다니 그런 비윤리적인 일이 어디 있담?

그런 게 아니라도 이건 내 진짜 몸도 아니고 나는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니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변명하는 것 같지.

미뉴엣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말 못 하는 사정 때문에 기어이 공작과 어울려야 한다는 거야?”

“비슷하지?”

“그게 다 끝나면 공작이랑 더 어울릴 필요는 없는 거고?”

“그럴걸?”

“좋아, 그러면 그때 가서 파혼해.”

그녀의 두 눈에는 어떻게든 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넘실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공작이랑 어울릴수록 점점 더 위험해지는 것 같아. 그래, 내막을 모르니 그것까진 그렇다 치겠는데 공작은 멀쩡하잖아.”

“음, 크루엘로도 이번에 어깨가 뚫렸거든?”

“너는 일주일간 의식이 없었다며.”

그렇게 받아치면 할 말은 없다.

“지금 계속 너만 위험해지고 있어. 연인 관계가 아니라도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야? 그런 사람이랑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꼭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럼 이야기 끝났네. 일 끝났을 때 바로 말해. 절차 진행할 테니까.”

“으응, 알았어. 그런데 미뉴엣.”

“말해.”

“내가 크루엘로랑 결혼하길 바라지 않았어? 네 혼담을 대체하는 문제가 아니라도 그 편이 보네티에 이득이잖아.”

가보트야 초지일관으로 크루엘로를 싫어했지만, 미뉴엣이 달라진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저런 일로 빚을 지워 뒀다고는 하지만 화이트데저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잃을 걸 생각하면 지금의 보답은 과했으니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적이 길어지면서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시오라 보네티.”

“응?”

“이제 와서 너도 보네티의 일원이니 어쩌니 이야기해도 코웃음만 치겠지만 말이야.”

그녀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나한테도 마음이란 게 있고 애정이란 게 있어. 소중한 것도 있고 ”

“어…….”

“바티한테는 잘도 가족, 가족 지껄여 대더니 너는 왜…….”

그 말은…….

나는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말을 다 끝맺지도 않고 미뉴엣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가 문을 가리켰다.

“됐어, 나가 봐.”

나는 주춤주춤 움직여 집무실의 문으로 향했다.

“오후에 공작을 만난다고 했지. 나갈 때, 보네티 마차 타고 가.”

“알았어.”

“…….”

“…….”

“……안 나가고 뭐 해?”

“있잖아. 조금 전에 한 말, 결국 내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단 거지?”

“뭐?”

미뉴엣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으나, 나는 그녀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지는 걸 보고도 그랬다.

웃으면 안 되는데 음, 솔직히 말해 기뻤다.

미뉴엣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말이기도 했고, 크루엘로 외에 누가 날 걱정하는 것도 익숙지는 않았고.

그리고 진짜로, 평범한 가족이 생긴 기분이 들기도 했고.

더 있다간 미뉴엣이 프레스토를 부를 것 같아서 나는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또 내 한 몸은 기가 막히게 챙기지. 안 죽고 멀쩡히 다닐게!”

“시오라 보네티.”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말로 하면 되지.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니까 바로 못 알아듣잖아, 내가 사회 경험이 좀 적어서. 다음부턴 직설적으로 말해 줘, 다정하게 사랑을 담아.”

“시오라 보네티!”

“알았어, 언니. 나도 사랑해!”

나는 살해당하기 전에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미뉴엣이 문을 열고 쫓아오지는 않았다.

기분 좋다.

실실 웃으며 고개를 든 순간, 나는 가보트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는지,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너, 혹시…….”

“미쳤냐는 말은 크루엘로한테만 해.”

“너 혹시 공작했냐?”

“새로운 단어 만들지 마.”

에이, 방금까지 기분 좋았는데.

나는 꿍얼거리며 가보트를 지나쳐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휙 몸을 돌려 물었다.

“맞다, 가보트! 오늘 간식 뭐야?”

***

이게 얼마 만에 들어오는 내 방인지.

조금 감동까지 들었다.

더 그리운 장소는 침실이었지만, 그곳은 밤에나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앞쪽 테이블에 베티가 준 트레이를 내려두었다.

고아한 문양의 접시 위, 레몬색 마카롱이 영롱하게 빛났다.

한입에 털어 넣으면 참 행복하련만, 저건 내 게 아니었다.

페불라에게 바치는 제물이었으니까.

“휴우.”

나는 양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았다.

이게 얼마 만의 기도더라.

연도를 되짚어 보니 꽤나 까마득해서 계산하기를 포기했다.

그 정도로 오래간만이니 마카롱이라도 바치는 거다.

뭐, 내 선배 신도들이 계좌 털어 간 거 아실 테니 이쯤은 이해해 주셔야지.

나는 돈 없는 가난한 신도니까.

“페불라시여, 당신의 유일…… 하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제일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어린 종이 위대하신 분께 기도 올립니다.”

저는 지금 커다란 시련에 봉착해 당신을 의심하고 있나이다.

새하얀 눈처럼 순진한 제가 선배 신도들의 세뇌에 속아 넘어간 것은 아닌지.

당신의 이면에, 나이젤리아 같은 인간을 신도로 삼을 만한 악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어린 양에게 답을 내려 주소서, 페불라시여.

당신의 가장 가까운 종이 네크로맨서 단체의 초대 교주였다는 사실을 들었나이다.

왜 그런 이에게 그토록 거대한 힘을 주셨나이까.

아니면, 이 미욱한 신도가 모를 뿐 악에 물든 이를 처벌하고 그 힘을 거두셨나이까.

그런데 어떤 사정이 있으면 그쯤은 말해 줘도 괜찮은 게 아닐지 의심하는 바이옵니다.

설마 제가 유일한 신도가 아니라고 박대하시는 건지, 다른 신도는 당신께 매일매일 기도를 올리고 질 좋은 제물을 바치는지 의심하는 바이옵니다.

답이 없으시군요.

이런 달콤한 과자가 취향이 아니시거든 계시라도 내려 주면서 요구를 하시는 게 세상 이치에 합당한 일이 아닌지, 제 상황을 알면서 비싼 제물을 요구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되는 바이며 또한 인간 제물이 취향이시라면 그만 신으로서의 지위를 내려놓고…….

“음.”

오래간만에 해서 그런가, 기도를 할수록 신성 모독으로 흘러간다.

나는 멋쩍어져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깐이나마 눈을 감은 탓에 희뿌옇게 물든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졌다.

명확히 초점이 잡히자 보인 건 접시, 그리고 마카롱이다.

“냠.”

나는 손을 뻗어 마카롱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세상에 일방적인 호의는 없는 법, 답이 없으면 제물도 주지 않겠다.

“몰라! 안 해.”

나는 그대로 소파에 엎어져 누웠다.

애당초 내가 답을 구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 해명하셔야 할 일 아닌가?

필요 없을 때는 계시를 잘만 내려 주더니, 내가 불량 신도라 차별하시는 거야?

“아, 세계 구하라면서요! 혜택을 주셔야죠! 대답해 주기 싫으면 뭐라도 줘 봐요! 이미 소멸하신 건 아니죠?”

아니지, 생각해 보면 대뜸 어린아이의 몸에 집어넣으면서도 계시 한 번 없던 매정한 신이다.

그러면서 필요 없는 상황에선 구태여 계시를 내려서 날 괴롭혔단 말이지.

“자꾸 이러시면 저 마법교로 개종합니다? 진짜로 할 거예요?”

나는 허공에 대고 떼를 썼다.

당연히 정말로 먹힐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신전에 틀어박혀 지낼 때에도 이 짓거리를 몇 번을 했는데 답이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냥 단순한 화풀이였다. 그런데.

“헉!”

순간적으로 시야가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으나 눈앞에 다른 게 보인 건 한순간뿐이다.

그럼에도 그 찰나의 잔상은 눈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줄리안…… 미네르바?”

착각할 여지도 없이 분명했다.

연분홍색 머리칼에 서글서글한 인상.

다만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신어는 한 줄도 없다. 이것도 계시라고 쳐 줘야 하나? 뭐야?

“저기요? 그래서 얘를 어쩌라는 걸까요?”

눈치를 보며 슬쩍 물어봤으나 대답은 없다.

“죽이라는 걸까요, 살리라는 걸까요? 그게 아니면, 그 타락한 성자가 줄리안이라는 건가요?”

나는 신발을 벗고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목소리도 더 정중하게 가다듬었다.

“페불라시여? 마카롱 드릴까요? 무슨 색. 레몬색? 자주색?”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없다.

혹시 날 놀리신 건 아니겠지?

신이 그렇게까지 한가하진 않겠지?

불안해하며 양손을 끌어모을 때였다.

“큽.”

옆에서 들린, 웃음을 참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창문은 보란 듯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턱에는 크루엘로가 걸터앉아 입가를 틀어막고 있었다.

……나 진짜 개종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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