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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9화 (89/162)
  • 89화

    내 가여운 위를 최선을 다해 달래 주고 나자, 멈췄던 머리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원로의 말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지만, 확실히 해 둘 문제가 있었다.

    “남은 열쇠는 누구한테 있어요?”

    〈운명〉에서 주로 언급된 원로는 넷, 개중 셋에게서 열쇠를 빼앗았다.

    열쇠는 총 다섯 개라 했으니 한 명이 더 있을 텐데도,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책, 예언서인 것치고는 상당히 도움이 안 된다.

    모리온을 손에 넣은 크루엘로가 어떻게 세계를 짓밟는지만 자세히 나와 있을 뿐.

    하기야 저자가 마믹이었으니 숨겨진 정보를 서술하기는 어려웠겠지.

    그래도 크루엘로는 알 거라고 믿었다.

    내가 모르던 열쇠 마법의 존재까지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몰라요.”

    “……네?”

    “주로 캐 본 건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흑마법사들이었는데 의심 가는 사람이 더 없더라고요.”

    “네에에에?”

    비상! 비상!

    안일했다.

    크루엘로가 전부 알 거라고 막연하게 믿어 버리다니!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이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성하자, 반성…… 은 맨날 말로만 하고 있군.

    어쩐지 대원로가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더라니.

    “그러니 마지막 원로는, 아마도 흑마법을 익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요.”

    “좋아요. 이제 공작령으로 가 볼 때가 된 것 같아요.”

    “글쎄요, 영지에 있는 원로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쪽은 정말로 교단과 엮인 일이 없거든요.”

    “확실해요?”

    “90%쯤.”

    확실하다는 거네.

    이렇게 되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대원로를 족쳐서 열쇠와 정보를 모두 얻어 내자!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나는 무심코 움찔했다.

    “달링?”

    “아, 아니에요.”

    “어디 안 좋아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창밖의 나비를 보고 놀랐을 뿐이다.

    흰 나비도 아니었지만, 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원로랑 연결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요, 사실 수상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말해 봐요.”

    “나이젤리아만 교단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잖아요? 흰 나비가 그분인지 저분인지의 말씀을 전해 줬다고.”

    심지어 내 나비로 비교 체험까지 해 봤는데도 그렇게 말할 정도면, 같은 종류의 주문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페불라의 성직자 하나가 교단 측에 숨어서 나이젤리아를 조종한 것 같아요.”

    “음.”

    “초대 교주가 페불라의 성자였다는 게 진짜라면, 그런 사람이 더 튀어나오는 것도 가능해요.”

    “달링은 그 말을 믿어요?”

    “의심해 볼 법은 하다고 생각해요.”

    전처럼 맹목적인 믿음은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도 신앙심이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비교할 바 없이 나빴다.

    나는 엘린이 죽던 순간을 봤다.

    다 이긴 싸움에서 동요하고 과다하게 베아티투도를 삼켜 가며 자멸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걸 바로 앞에서 보고도, 그 모든 게 엘린의 거짓말이었노라 치부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죽음은 내 신보다 정직해 보였다.

    내 말을 들은 크루엘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이젤리아는 베아티투도를 먹고 200년을 넘게 살았죠. 과연, 그걸 먹은 사람이 나이젤리아가 최초일까 싶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면 그 성자 본인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간 수집했던 기록물을 떠올렸다.

    인신 공양을 했던 페불라의 성자에 관한 몇 줄의 글자들.

    그것들이 쓰여 있던 종이가 얼마나 낡았는지, 하는 것들을.

    “아니길 바라지만요.”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저택의 지하실.

    흐릿한 불 아래에서 사내는 대원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온을 바로 해방해야겠네.”

    그의 방으로 들어선 즉시, 대원로는 대뜸 본론을 내뱉었다.

    “계시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까? 뭐, 2원로님이 돌아가신 거야 저도 알기는 하지만요.”

    “그자가 죽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참으로 어리석네만, 그 계시란 게 진짜였는지도 의문이 드네.”

    흠, 로브를 입은 사내는 의미 모를 신음을 내뱉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신이 아니야. 남들은 신이라 부르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건 악마를 만들어 내는 거란 말일세.”

    “그렇죠, 저희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인 에너지요.”

    “……자네는 정말 그 입을 어쩔 줄 모르는군.”

    “시정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시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시게 된 겁니까?”

    “2원로가 수백 년을 살아왔다고 해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진짜란 건 아니야. 결국 죽은 걸 보면, 그 여자도 하찮은 인간에 불과했다는 걸 알겠어.”

    “하기야 계시를 무기로 교단의 방향성을 정해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내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의 신앙이라는 게 얄팍하기 짝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대원로도 그 가벼운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노인은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일을 거행하기 전에 계시로 기일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 같더군.”

    “더 설명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열쇠는 어쩌시겠습니까. 남의 손으로 간 게 너무 많은데.”

    “그건 염려할 일이 아니야. 어쨌거나 가주는 모리온을 취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제 열쇠는?”

    “일단은 가지고 있게. 그리고 준비하는 동안 자네의 장난감으로 시간을 좀 벌어 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사내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참 즐거운 명령이네요. 하는 김에 시원하게 해 보죠. 슬슬 황태자가 선을 모르고 기어오르려고 하던데요.”

    “이 시국에 황태자를 처리하겠다?”

    “예. 시오라 보네티를 다 무너진 네크로맨서 단체와 잘 엮어 보겠습니다.”

    대원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아이는 성직자야. 필히 신관에서 숨겨 길렀다가 귀족 아이와 바꿔치기를 한 거겠지. ‘검은 뱀’이었다고 주장한들 사람들이 믿을 리 없어.”

    “고대 교단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흥, 2원로가 그쪽을 쥐 잡듯 잡은 걸 보고도 모르겠나. 레카논도 그 꼴이 되었어, 그만한 성세를 가진 교단이 남았을 리 없지.”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요. 은밀히 신원을 바꿔치기했다면, 신전도 떳떳이 드러내 보이진 못할 겁니다. 실제로 저번 의혹에도 나서서 대응하지 않았잖습니까.”

    “자네…….”

    “애당초 2원로님을 처리한 게 시오라 보네티란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저희야 당시 2원로님의 행적과 타깃을 아니 확신하는 거지만.”

    사내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마침 엘린과 나이젤리아가 동일인임이 밝혀지고 나서는, 시오라 보네티의 주장도 모호해진 상황이었다.

    “교단의 사람이라 낙인찍고 성력을 입증할 자리를 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도망쳐 다니는 동안, 모리온이 해방될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로군.”

    “그러면 승인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대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4원로.”

    용건을 마친 노인이 지하실을 나섰다.

    사내, 4원로는 다시 작업대로 몸을 돌렸다.

    사방으로 각진 석판 위 거대한 사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피부가 창백한 걸 제외하면 생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그 시신은 아레스였다.

    “그 늙은이도 하필이면 완성 직전에 와서 초를 친다니까.”

    4원로는 투덜거리며 책상 서랍을 열어 정량대로 소분된 베아티투도를 꺼내 들었다.

    그는 시신에 다가가, 가슴팍에 그려진 마법진을 다시 한번 살폈다.

    “문제는 없고.”

    사내는 조심스럽게 마법진에 베아티투도를 부었다.

    흰 알갱이들은 금세 진에 녹아들더니 그 모양대로 검보랏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빛은 가느다란 선을 빽빽이 긋고 면을 채우며 종내는 심장 모양을 그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심장이 시신의 가슴팍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레스의 팔다리가 감전된 것처럼 움찔움찔 튀어 오른다.

    그러다가 돌연, 죽은 이가 번쩍 눈을 떴다.

    “좋아, 완성이로군.”

    4원로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곧장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일어나, 아레스.”

    아레스는 곧장 명령을 따르며 석판에서 일어났다.

    “엎드려.”

    그는 순순히 사내의 앞에 엎드렸다.

    당연한 지시를 따른다는 듯이 얼굴에는 아무런 굴욕감도 뒤따르지 않았다.

    4원로가 그의 등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아도 마찬가지였다.

    푸하하하,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다가 마주칠 때면, 저를 한심하단 꼴로 흘겨보던 놈이 이 꼴이 되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부활이니 영생이니 개소리들 하고 있어. 이런 게 진짜 네크로맨서지.”

    하여튼 인간들이 고전미를 몰라요.

    그는 아레스의 머리를 툭툭 쳐 대며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 하나의 완성품을 보니 아쉬운 것들이 생각났다.

    나이젤리아는 늙어 죽었으니 글렀고, 큐딜은 어딜 갔는지 통 찾을 수 없고.

    크루엘로가 죽어 제 인형이 되어 주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이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슬슬 줄리안의 사체도 가져올 수 있으려나?”

    4원로가 유쾌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나는 일단 화이트데저트 공작저를 나와 보네티 백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가주 집무실로 불려왔다.

    곧게 편 허리와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칼.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 안쪽으로 말간 초록빛 눈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홍채에 비친 내 얼굴까지도 보이는 듯했다.

    시오라의 시력이 그렇게 좋진 않으니 착각이겠지만, 분위기상 그랬다.

    나는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뉴엣, 그 옷 새로 맞춘 거야? 진짜 잘 어울린다.”

    “그래?”

    “으응. 오늘따라 더 품위 있어 보여. 아니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네 위상이 달라져서 그런가?”

    “그래?”

    “그러엄! 평소의 몇 배는 더 카리스마 넘치고 멋있어 보여. 이런 게 백작의 위엄이란 건지. 보네티의 전 원로회들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어떻게 이런 너를 두고─.”

    “그래?”

    “…….”

    이상하다.

    티파티에선 그렇게 잘 통하던 아첨이 하나도 안 먹히네?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뉴엣은 그냥 반듯이 앉아 웃고만 있는데도 그랬다.

    뭘까. 왤까. 이 애의 뭐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걸까.

    철학적인 사색으로 빠져들려던 때.

    “할 말은 그게 다야, 시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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