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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8화 (88/162)
  • 88화

    숨소리는 천천히 고르게 변했다.

    그러고야 크루엘로는 손을 떼어 냈다.

    곱게 닫힌 눈꺼풀과 고르게 드나드는 숨결.

    사람이 자는 얼굴이 그리 특별할 이유도 없건만, 그는 잠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열린 창문에서 불어닥친 바람에 시오라의 머리칼 몇 가닥이 흩어졌다.

    크루엘로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흐트러진 것들을 정돈했다.

    손끝에 닿는 살갗은 새삼스럽게도 따뜻했다.

    그의 기분이 좀 좋아졌다.

    머리로는 시오라가 깨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하다 믿었던 것들이 얼굴을 바꾸어 심장에 칼을 꽂은 게 한두 번이던가.

    그러며 남은 흉터에서 이따금 불안이 나오고 이따금 불신이 나왔다.

    그러니 어찌 달갑지 않겠는가.

    다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는데.

    “기억 상실이라…….”

    공교롭기도 하지, 에이미도 기억 상실이었다.

    에이미의 부친인 윌리엄 로열샌드에게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다.

    이것마저 우연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기억 정도는 날아가 줘야 저를 가까이 둘 용기가 나는 걸까.

    물론, 시오라는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믿기지 않았다.

    시오라 보네티.

    크루엘로의 파트너는 생각보다도 더 알기 어려웠다.

    뒷조사를 멈춘 적이 없는데 새로운 정보는 통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페불라와 연이 닿았는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다.

    참으로 수상쩍다.

    그러나 묻기로 했다. 그럼에도 믿기로 했다.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처음으로 꿈에 나온 에이미가 그에게 사람을 믿을 용기를 전해 줬고, 또 그저 믿고 싶기도 했고.

    적어도 시오라에게 저를 향한 악의가 없다는 건 분명했으니까.

    크루엘로가 픽 웃은 순간, 재차 불어온 바람이 시오라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는 다시금 손을 뻗었다가 문득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그의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여 내려갔다.

    동그란 이마, 눈꼬리, 뺨.

    그러다가 그 손끝이 시오라의 입술에 닿기 직전.

    “아…….”

    크루엘로는 손끝을 오므려 당겼다.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성큼성큼 걸었다.

    다소 서두르는 모양새로 창문을 닫은 뒤 커튼까지 치려 했으나, 가보트의 탈출로가 된 탓에 햇빛을 가릴 것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바닥에 떨어진 커튼을 노려보다가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

    숙면은 만병통치약이라더니 정말로 그랬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것과 잠을 자는 건 확연히 달랐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나는 모처럼 개운함을 느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전에는 이렇게 개운해지자마자 나이젤리아에게 불려 갔었는데 하하.

    같은 패턴이 두 번이나 벌어질 일은 없겠지, 생각한 순간.

    “대원로가 함께 식사하자던걸요. 괜찮다면 곧 이 저택으로 오겠다고.”

    원로회란 놈들은 사람을 괴롭힐 줄 아는군.

    대충 씻자마자 닥쳐온 급보에 나는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전채요리는 독연기, 주요리는 몬스터독, 디저트는 식물독, 입가심용 와인은 독액?”

    “글쎄요, 알기로 여기 셰프가 대원로의 사람은 아니에요.”

    “아, 온다고 했죠. 하기야 이름값이 있으니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쓰겠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대단히 차려입고 가야 하는 건 아니죠?”

    “가려고요?”

    “푹 쉬었으니 일해야지. 열쇠 어디 있는지나 봐 두게요.”

    만만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덮쳐도 괜찮고.

    제가 말을 전해 놓고도 크루엘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

    대원로, 헤오림 화이트데저트.

    〈운명〉에서는 그를 풍채 좋은 현자 같다고 묘사한다.

    단정히 기른 수염은 구름처럼 풍성하고 얼굴에 남은 주름은 그가 참 인자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말간 색의 눈동자 아래엔 나이젤리아만큼이나 지독한 악의가 녹아 있었다.

    나는 새삼, 노인이 원로회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앉으시게들.”

    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간단한 인사말도 없이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건 일종의 탐색 시간이었다.

    최근 먹은 거라곤 브로콜리 수프뿐이었던 나는 곧 커트러리를 내려놓았고, 대원로도 식사를 마무리했다.

    “실제로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로군. 생각했던 느낌은 아니오.”

    “좋은 쪽으로요?”

    “글쎄, 이 늙은이에겐 적이니 나쁜 쪽이라는 게 맞겠소.”

    예상보다 노인의 말투는 정중했는데 그래서 더 음침해 보였다.

    대원로는 몸소 가져온 와인을 따서 잔에 나누어 따랐다.

    안 마셔야지.

    나는 하인이 주는 잔을 받으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피차 서론을 늘여 말하는 건 달갑지 않을 테지.”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2원로가 유명을 달리했다더군. 어찌 생각하시는가.”

    노인이 천천히 잔을 돌리며 물었다.

    음.

    “장수하셨더라고요. 듣기로 200살도 넘으셨다는데.”

    “허허, 그렇지. 그만하면 자연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에이, 자연사는 아니죠. 말도 안 되게 인위적이던데.”

    “인위적이라……. 신의 손길을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이오.”

    “베아티투도만큼 인위적인 게 어디 있으려고.”

    크루엘로의 말에 대원로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이번 일에서만큼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오. 어떤 의미로 우리는 한 배를 탔었다고 말할 수 있지.”

    “네?”

    “2원로에 대한 정보를 황실에 제공한 건 나였으니까. 설마 여태 공치던 비밀 조사단의 솜씨가 갑자기 늘었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

    “와. 제 살을 깎아 가며 파벌 싸움을 하시는 분은 처음 봐요.”

    “가치관이 달랐을 뿐이지만, 그렇게 치부해도 상관은 없소.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노인은 말을 끊으며 느긋하게 잔을 기울여,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

    “2원로를 원래의 운명으로 되돌려 드린 건 가주가 아닌, 그대의 공이겠지.”

    “이제 와서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렇다면 사과드려야겠군.”

    도무지 알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크루엘로를 쳐다보았다.

    그 또한 노인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여태 혼인을 반대하고 그대를 귀찮게 한 건, 이번 혼사가 단순히 가주의 반항인 줄 알았기 때문이라오. 일부러 내 속을 긁을 만한 상대를 데려온 줄 알았지.”

    “음, 생각이 바뀌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대의 격을 제대로 알았으니까. 이제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오. 하더라도, 이 늙은이의 의견대로 따라 줄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휴전을 제의하고 싶소.”

    한창 독이 올랐을 줄 알았는데 휴전?

    예상치 못한 패가 기껍기보다는 수상하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2원로를 상대할 정도면 어떤 자객을 보내든 의미가 없겠지. 내가 나서더라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서로 재정비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가 대원로님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하셨겠어요?”

    “허허, 급하게 굴지 마시오. 내겐 지금 열쇠가 없으니까.”

    큐딜이야, 뭐야.

    안 믿을 헛소리를 너무 당당히 내뱉는데.

    “바라시거든 확인해 보시오.”

    사양 않고,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력을 끌어 올리며 대원로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크루엘로도 뒤에 따라붙었다.

    아직도 다 회복이 되지 않았는지 몸 곳곳에서 죽는 소리를 냈지만, 지금이 엄살을 부릴 때는 아니다.

    나는 꼼꼼히 노인의 몸을 살폈으나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단순히 알기 어려운 곳에 숨긴 것 같지도 않았다.

    대원로의 얼굴에서는 뚜렷한 자신감이 묻어났으니까.

    저 몸에는 없다는 건데 그러면.

    “열쇠를 다른 곳에 숨겨 두고 오셨습니까?”

    크루엘로의 질문에 노인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참 우습지, 인간의 믿음이란 어찌 이리 공허한가.”

    “헛소리 마시고 대답이나 하세요.”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소. 그대가 찾아야 할 열쇠는 아직 하나가 더 있거늘. 그걸 찾으면 나머지 길은 자연스럽게 열리리다.”

    “알려 줄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지금 대원로님을 살려 보낼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요?”

    엘린을 상대할 때만큼 몸이 성치는 않았으나, 나는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휴전이라고 말했지, 승복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말이야 어떻게 하든 노인은 언젠가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

    그러나 대원로는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죽은 걸 알게 되면, 마지막 열쇠를 가진 이는 영영 숨어들 텐데 괜찮으시겠소?”

    “그거야─.”

    “참고로 그이는 숨는 데 몹시 능하다오. 작정하면 누구도 찾아낼 수 없지.”

    노인은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을 믿는 이가 아니오? 때가 되면 그대의 신이 알아서 길을 열어 주겠지.”

    “허.”

    “이만 쉬시구려. 아.”

    그는 케인을 짚고 몸을 돌리려다, 돌연 내 눈을 묘하게 쳐다봤다.

    “그 나이에 위대한 믿음을 이룬 성직자에게 인생 선배로서 한 가지 조언을 해 드리고 싶은데.”

    “안 듣고 싶은데요.”

    “마냥 가주를 믿지는 마시오. 나중에 후회하게 될 날이 올 테니.”

    원로회 인간들은 어쩜, 틈만 나면 이간질이람.

    저 소리도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겠다.

    진부한 조언에 나는 짝다리를 짚고 설렁설렁 답했다.

    “충고는 감사, 사실 안 감사한데 어떤 사람을 믿을진 제가 결정할게요. 아무래도 제가 속 시커먼 영감님보다는 현명할 것 같거든요.”

    “그 또한 그대의 뜻이겠지.”

    대원로는 비죽 웃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케인이 바닥을 짚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간다.

    나는 노인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기척이 아예 지워졌을 무렵.

    꼬르륵, 배 속에서부터 또 다른 소리가 존재감을 알려 왔다.

    흠.

    “……배고파요?”

    “네, 당연히, 너무나, 엄청나게.”

    대원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배가 부르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뱁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론 노인이 건네고 간 와인은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식사는 해야지.

    “새로 준비 시킬게요. 다 식었잖아요.”

    “됐어요, 어떻게 기다려.”

    크루엘로는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포크를 쥐고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재개했다.

    웬 할아버지가 하나 사라진 것만으로 미감이 몇 배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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