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9화 (19/162)
  • 19화

    “최근 오컬트 도서를 읽으셨다고 해서 신경 써 봤는데요.”

    “나는 읽고 상상하는 게 좋은 거지, 보는 건 즐겁지 않아.”

    “유감이네요. 적당한 날을 고르느라 힘들었는데.”

    시답잖은 잡담이 몇 마디 오간다.

    멍하니 상황을 관망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던 중.

    “자, 자르망 백작님이 사망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었다.

    “머윈 자작님도 돌아가셨습니다!”

    “포프리 자작부인께서도 숨을 안 쉬세요!”

    “독, 독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 중독 증상이에요!”

    독.

    그 무거운 말에 무도회장의 공기가 단번에 식었다.

    크림슨 공작이 노하여 소리쳤다.

    “독이라니! 화이트데저트 공작, 이게 무슨 일이요.”

    그의 얼굴은 벌게지고 목에는 핏대까지 섰다.

    “이제는 사람까지 해치는 거요?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보시오!”

    “글쎄요.”

    크루엘로는 따분하다는 듯이 분노에 제대로 응해 주지도 않았다.

    그는 의자에 기대선 자세를 고치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이, 이런 극악무도한! 황태자전하, 저자를 정녕 내버려 두실 겁니까!”

    “맞습니다, 황태자전하! 부디 이 가련한 자작부인을 살펴 주십시오. 이분들이 왜 이유도 없이 돌아가셔야 한단 말입니까!”

    알베이 후작이 시체를 품에 안고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그 상황을 구경하다가 돌연 시체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라.”

    방금 손이 움직이지 않았나?

    “화이트데저트 공작을 처벌하셔야 합니다!”

    알베이 후작이 비통하게 절규했다.

    동시에 ‘포프리 자작부인’이 튀어 올랐다.

    주어를 착각한 게 아니라 정말로, 시체는 곧바로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심지어 그녀뿐 아니라 죽었다고 알려진 모두가 움직였다.

    그들의 손끝에서는 새파란 날붙이가 번쩍이고 있었다.

    “막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림슨 공작이 식겁하여 소리쳤으나, 자작부인이 황태자의 발치에 도달하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날붙이를 휘둘러 볼 겨를도 없었다.

    크루엘로가 까딱, 손짓했다.

    그러자 시체인 줄 알았던 모두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모습은 거대한 벌레처럼 기괴했다.

    “암살자들에게 마비 독을 쓰면 안 되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고 들어왔던 걸까.

    그들의 얼굴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 상황에서 태연한 건 크루엘로뿐이었다.

    “그걸 맞고도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아, 아, 암살자라니.”

    “그러면 방금 황태자전하께 깜짝 공연이라도 보여 드리는 줄 아셨나요?”

    크루엘로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의자에 기댄 자세를 바로 하고 그가 황태자의 앞으로 향했다.

    허리를 수그려 인사하는 모습이 흠잡을 데 없이 우아했으나 그래서 더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이래서 제가 안 올 수가 없었습니다. 다치신 곳은 물론 없으시겠지요, 전하.”

    “수고했네, 이번에도 자네 덕에 목숨을 건졌어.”

    “별말씀을. 전하께서는 단 하나뿐인 폐하의 후계시니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침, 태자전하의 친척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불충한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암살자는 그들이 보냈겠군.”

    “이미 짐작하시다시피.”

    그들의 대화 또한 연극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지금 일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황태자가 피곤한 낯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황궁에서 마법을 쓰는 건 금기가 아닙니까? 조금 전의 일은─.”

    “그 금기가 아니면 내 목이 날아갔을 텐데 그게 중요한가, 알베이 후작.”

    “……실언했습니다. 불충한 신하를 용서해 주십시오.”

    알베이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자 더 따지고 들 사람이 없어졌다.

    크루엘로가 말을 이어 갔다.

    “어떤 식으로 해야 다치는 이 없이 암살자들을 잡아낼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폴터가이스트 놀음을 한 거로군.”

    “역도를 잡아낸 일이니 탈리아스 황자전하께서도 용서해 주시겠지요.”

    크루엘로가 샐쭉 웃었다.

    그때, 멈췄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테이블이 흔들리고 와인잔이 엎어졌다.

    황태자가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아직 공연이 남았나, 크루엘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탈리아스 전하께서 즐거워 박수를 보내시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공작.”

    “이런, 탈리아스 전하께서 화가 나셨나 보네요. 보세요.”

    크루엘로가 검지를 들어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엎어진 소스가 날아올라 그가 가리키는 이의 얼굴에 글자를 적었다.

    「불륜.」

    「밀수.」

    「사기.」

    「폭행.」

    죄목이 적힌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제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그리고 크루엘로의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에 알베이 후작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글자는.

    “헉!”

    “세상에!”

    「역모.」

    사람들이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알베이 후작. 탈리아스 전하께서 자네의 얼굴에 재밌는 죄목을 써 주셨네.”

    “무, 무슨…….”

    “뭐가 적혀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크루엘로가 곱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알베이 후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깨진 와인병으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모함입니다! 저, 절대로 아닙니다, 황태자전하! 믿어 주십시오!”

    물론, 얼굴에 역모라는 글자가 적히면 당황하기는 하겠지만, 그의 반응은 좀 남달랐다.

    누명을 써서 식겁한다기보다는 제 죄를 들킨 사람이 보일 법한 기색이다.

    “마침, 태자전하의 사촌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불충한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이게 알베이 후작이었군.

    황제의 자식이 하나뿐이니 욕심을 낸 걸까.

    황태자가 느른한 목소리로 당황한 후작을 달랬다.

    “염려 말게, 후작. 장난처럼 쓰인 글자만으로 자네를 대역죄인이라 판단할 이는 없을 테니.”

    “그, 그렇지요? 황태자전하, 제 충심을 믿어 주시는 거지요?”

    “아무렴. 나는 증좌 없이는 움직이지 않거든.”

    “예?”

    “안타깝게도 그게 나와 버렸지만.”

    크루엘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황실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형 극장에서 본 적 있는 광경이다.

    “저, 전하?”

    “실은 무도회에 나오기 전 화이트데저트 공작에게 재밌는 문서를 받아서 말이야.”

    “아닙니다, 황태자전하! 황태자전하!”

    “혐의가 없다면 금세 풀려나겠지. 부디 양해해 주게나.”

    알베이 후작이 끌려가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황태자가 말을 마쳤다.

    그 모습까지 통틀어 하나의 연극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멍하니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미친 짓이 저렇게 적성에 맞는 사람은 처음 봐.

    크루엘로의 평판이 왜 그 모양인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실소했다.

    그때.

    “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시감이 일었다.

    인형 극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던 것 같은데…….

    나는 배움이 빠른 사람인지라 굳이 그 시선의 주인을 확인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심지어는 인파가 갈라져 내 앞으로 길까지 트였다.

    가보트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야, 도망읍.”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그의 입이 다물렸다.

    가보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침묵 마법의 기운, 명백히 타의였다.

    나는 체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남성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 도피를 포기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 가득, 보석 장미가 피어났다.

    “안녕, 내 사랑. 늦어서 미안해요.”

    크루엘로가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고는.

    “첫 춤을 빼앗겨 아쉽지만, 한 곡 함께해 주실래요?”

    이쯤 되면 자기 재밌자고 날 괴롭히는 건 분명하겠지.

    나는 일단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인형 극장에서는 뒤통수를 후려쳐 주고 싶어도 너무 멀어서 못 했던가?

    하지만 오늘은 가능하다.

    “됐어요.”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얼굴에 꽃다발을 처박았다.

    끅끅거리는 소리.

    떨고 있는 어깨.

    도무지 들리지 못하는 고개.

    나는 사내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그만 웃지 그래요?”

    외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크루엘로는 발코니가 울리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화를 낼 줄은 알았지만, 거기서 꽃다발로 내 얼굴을 후려칠 줄은, 하하!”

    “그게 그렇게 재밌어요?”

    때렸는데 좋아할 줄이야, 내가 이 미치광이를 얕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나는 난간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크루엘로에게 꽃다발을 내리치고 무도회장이 싸해졌을 때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속은 참 시원했었다.

    이 미친놈이 웃어 재끼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랬을 것이다.

    “아, 그래요. 그만 웃어야지. 내 사랑이 싫어하는데 그래야죠.”

    그는 여전히 말투에 웃음기를 매단 채,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았다.

    나는 뚱하니 내뱉었다.

    “안 온다더니 뭐예요? 얘기, 다 되어 있던 것 같은데.”

    “원래는 안 올 생각이 맞았어요. 탈리아스 황자의 기일인 걸 몰랐으면 정말 안 왔겠죠.”

    “유령이 취향이에요?”

    “옛날부터 유령엔 좀 관심이 많았거든요.”

    크루엘로가 픽 웃었다.

    “사실 딱 좋은 서론이라고 생각했어요.”

    “뭔 소린지 좀 알아듣게 말씀해 주실래요.”

    “살아 있는 인형, 유령. 생기가 없고 침실 밖으로 나오는 일도 드물다.”

    그가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씩 나열했다.

    나 또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시오라 벨벳’의 평판이 그랬죠?”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그런데 실제로 본 달링은 정보와 아예 다르더라고요. 지나가던 유령이 그 몸에 빙의라도 한 게 아니라면 바꿔치기 됐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

    “뜬금없이 고대 신이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무리 없는 가설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역시 그거로군.

    한순간 뜨끔했지만, 예상하던 주제라 마음이 차분해졌다.

    대놓고 신성 주문을 쓴 이상 언젠간 나올 이야기였다.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죠,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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