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후두둑, 빗줄기는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
가을비치고는 기세가 대담하여 창밖의 풍경이 흐리게 보였다.
청년은 가운만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표면에 그려진 뱀 문양, 문득 어제 들은 말이 떠올랐다.
“뱀, 조심하세요.”
뭘 알고 한 말인지.
줄리안이 입매를 뒤틀었다.
절박한 애원이 그의 상념을 흩뜨렸다.
“죄송합니다, 소후작님! 잘못했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그가 옆으로 눈을 돌렸다.
무릎을 꿇은 하인, 그 앞에는 줄리안이 아끼던 술이 있었다.
산산이 조각이 나 더는 마실 수 없게 된 형태다.
집사가 물었다.
“어찌할까요.”
“저택에서 내보내.”
“알겠습니다.”
울부짖던 하인이 그대로 끌려 나갔다.
추천장도 없이 저택 밖으로 내쫓길 신세였으나 줄리안은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적어도 하인이 깨뜨린 술값이 그의 몸값보다 몇 배는 비쌌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겠지.
“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글쎄……. 남은 것 중에 뭐가 있었지.”
“어제 선물 받으신 술이라도 가져올까요?”
집시 부족이 빚었다는 술 말인가.
평소라면 쳐다도 안 봤겠지만, 날씨가 우중충해 그런지 변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테이블에 검은 병이 올라왔다.
대신 열어 주려는 집사를 만류하고 줄리안이 몸소 마개를 땄다.
그때.
샤아악!
“소후작님!”
술병에서 뱀이 튀어나왔다.
다급히 얼굴을 돌려 물리지는 않았으나 뺨을 긁혔다.
“허.”
줄리안은 얼굴에 맺힌 핏방울을 만져 보고 실소했다.
그게 이 말이었던가.
“뱀, 조심하세요.”
“쌍으로 재수 없기는.”
독 기운을 몰아낸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사가 그를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몸을 휘감은 자줏빛 덩굴 때문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줄리안이 뱀을 짓밟아 뭉개며 사납게 말했다.
“선물한 놈 내 앞에 데려와.”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궁정 무도회가 끝났다.
어떻게든 백작저로 돌아왔을 때 나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베티, 사흘 뒤에 공작전하를 만나기로 했거든. 달력에 표시 좀 해 줘.”
“하세요, 이야기.”
“여기선 곤란한데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저한테 얘기하러 오셨다면서요? 얘기가 아니라 예고인데?”
“달링의 스케줄을 존중한 거죠. 사흘 뒤 데리러 갈게요.”
어쩌면 시간을 끌수록 불안해지는 심리를 노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음을 가볍게 하려 애썼다.
베티는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다른 소식을 전했다.
“아, 시오라 아가씨. 궁정 무도회의 일이 신문에 났어요.”
베티가 신문을 한 무더기 가져왔다.
신문사끼리 담합이라도 했는지 1면의 메인에는 죄다 크루엘로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그래서 종잇장에다 시비를 걸고 싶었다.
재밌냐? 그야 넌 재밌겠지.
나는 팍 인상을 쓴 채 신문을 줄줄 읽어 내렸다.
용케도 내 이야기는 언급된 게 없어 신기했는데…….
“음?”
「레카논 교단의 비허가 공연, 이대로 괜찮은가?」
귀퉁이에 실린 구절을 보고 나는 눈을 깜박였다.
레카논?
「레카논 교단 측이 이번에도 수확제에서 비허가 인형극을 공연했다. 마치며 관람객에게 기념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흡입 시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극독임이 드러났다. 아직 사망자는 없으나 관람객의 80%가 7세 이하의 아동이었던 만큼 신전에서는 이를 묵과하지 않고…….」
“맞습니다. 이것은 성녀님께서 수확제를 맞은 이들에게 나눠 주라 지시하신 성수입니다.”
그때 받은 게 독극물이었다는 소리야?
성력이 있긴 했잖아.
크루엘로의 말도 뭉게뭉게 떠올랐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달링. 그 성수 쓰면 안 돼요.”
“오래돼서 상했거든요. 저번에 썼다가 곤란해졌어요.”
신관 하나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두기도 했었지.
이거 말도 못 하게 수상한데.
나는 저번에 받은 성수를 어디에 두었나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5초 만에 포기했다.
남 일이라 귀찮다.
“뭐 찾으세요?”
“음. 수확제 다녀올 때 받아 왔던 병 말이야.”
“아……. 그거, 따로 보관해 뒀는데 어디였더라.”
“급한 거 아니니까 그냥 나중에 보이면 건네줘.”
“네, 그럴게요. 그리고 초대장이 더 왔는─.”
“안 가.”
“그러실 줄 알고 이미 불태웠어요.”
일솜씨가 제법이군.
나는 만족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일정 끝!
……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아프네.”
나는 가보트를 보며 말했다.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말라 있고, 열기를 못 이겨 눈꺼풀도 반만 떠졌다.
베티한테 아프다는 말을 듣고 와봤는데 상상 이상이다.
가보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굳이 침실에서 날 불러내 놓고 그게 할 소리냐?”
“아니, 그건 베티가 가 보래서…… 겸 너 심심할까 봐 온 건데.”
“심심한 건 맞지만, 콜록.”
터져 나온 기침에 그가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음.
선천적으로 병약하거나 얼어붙은 호수에 빠진다거나 무리해서 몸을 움직인다거나?
그런 계기 없이 아프단 게 신기했다.
“뭘 봐. 아픈 사람 처음 보냐?”
“아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궁리 중이었어.”
“그래서 무슨 말을 할 건데.”
나는 성심성의껏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런.”
“속 터지니까 나 나을 때까지 넌 입 닫고 있어.”
“…….”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첩을 찾았다.
거기에 만년필로 글씨를 적어 가보트에게 내밀었다.
「저런.」
“너, 그냥 네 방으로 돌아가 주면 안 되냐?”
「누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건」
가보트가 수첩을 빼앗아 찢어 버렸다.
그러며 두통이 왔는지 이마를 짚고 괴로워했다.
“으윽!”
얌전히 있어야겠다.
“내가 있어서 더 힘든 거면 돌아갈게. 아플 때 무리하면 안 되잖아.”
“……됐어, 심심한 게 더 별로야.”
“그럼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너 방금 풀 죽은 척한 거 연기였지. 그래서 뭔데.”
“정령 말이야. 왜 못 부른다는 거야?”
그는 팍 인상을 찡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천천히 표정을 바꾸었다.
가보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보네티지.”
“응?”
“일어나 봐, 너도 소환 한번 해 보자.”
엥?
그리하여 뜬금없게도 나는 정령 소환을 앞두고 만 것입니다.
있는지도 몰랐던 백작저의 비밀 공간…… 이라기엔 채광이 좋았지만 어쨌든.
특정한 목적으로 만든 방에서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가보트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젖히고 웬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책에 있는 걸 바닥에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프다면서 쓸데없이 열심이다.
“가보트, 가문의 보물은 귀하게 여겨야지. 아무한테나 가르쳐 주면 못써.”
“네네, 시오라 ‘보네티’ 백작 영애.”
“너 입적 반대했잖아.”
“내 반대도 반대당했고. 머리 아프니까 조용히 좀 하고 있어.”
만능 방패로 내 입을 다물리고 가보트는 작업을 이어 갔다.
나는 그가 든 책 안을 흘금 보았다.
정원에 펜타그램, 고대어가 복잡하게 얽힌 진이 그려져 있었다.
“중간중간이 너무 흐리지 않아?”
“이게 몇 년 된 건데 당연하지.”
“보존 마법 안 걸어 두셨나?”
“그거 보편화된 지 200년도 안 됐거든.”
오호통재라.
“근데 나, 어차피 못 부를걸. 보네티랑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시끄러워. 네가 왜 정령을 못 부르냐고 물었으니 그 이유를 알려 주려는 거잖아?”
앙심을 품은 거였군.
속 좁은 가보트.
“너, 속으로 내 욕했지.”
“미안합니다.”
“그럴 땐 사과하지 마라. 속 터지니까.”
“가보트의 속은 푸딩 같구나. 아, 저기 잘못 그렸어.”
“어디?”
“3시 방향 세 번째, 4시 방향 여섯 번째, 11시 방향 첫 번째.”
“허? 잘못 그린 거 아니거든. 내가 이걸 몇 번 그렸는데 틀리겠냐.”
틀려 놓고 틀린 줄도 모르는구나, 가엾게도.
상대가 가보트라 안 믿는 게 아니라, 내가 고대어를 해석할 줄 알았다.
저렇게 그리면 오히려 흐름에 장애가 생긴다.
저러니 정령을 못 부르지.
개집 문을 판자로 막아 놓고 강아지를 불러 봐라.
힘센 개나 판자를 뚫고 나오지, 어지간한 강아지들은 주저앉아서 낑낑거린다.
가보트 바보.
“자, 해 봐.”
내가 무슨 생각 중인지도 모르고 가보트가 허리를 폈다.
“넴.”
“이걸로 중앙에 피를 떨어뜨린 다음 진을 짚고 구절을 읽으면 돼.”
진부터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정령이 그렇게 흔한 재능도 아닌데 나올 리가 없지.
물론 나야 다재다능,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이지만 정령까지 불러내면 너무 인간미가 없잖아?
하지만 일단은 가보트가 시키는 대로 단검으로 손끝을 베어 내고 글자를 읽었다.
“세상을 이루는 지고한 자연께 청하나이다, 생명의 숨결, 영령한 흐름, 4계절을 업어 나르는 위대한 바람께 묻나이다.”
이하 생략.
바람의 정령과 계약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달란 뜻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고 나는 심드렁하게 툭툭 주문을 내뱉었다.
그러나 소환 주문의 중간부터 진으로 마나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던 게 점점 거세졌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들락거릴 때 나는 굉음.
반응이 심상치 않다.
세상에나.
“나, 진짜 인간미 없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에게 크나큰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
물론 가보트도 포함해서.
“뭐, 뭐야, 대체!”
진 너머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세상 무엇보다 자유롭고 거친 혼.
그것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 힘을 과시하듯 진 주위로 둥글게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음…….
“포기!”
나는 깔끔하게 진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럼에도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하마터면 영혼째 빠져나갈 뻔했다.
원래 내 몸이면 괜찮았겠지만 남의 몸살이 중인지라 저런 거력은 감당이 안 된다.
이러다 죽으면 다른 의미로 역사서에 이름이 남겠지.
“실패했어, 가보트.”
바람이 가라앉았을 무렵 나는 가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실패라고? 하지만 방금…….”
“뭐야, 내가 실패한 데 불만 있어?”
“……있겠냐.”
가보트는 미심쩍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으나 착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가 곧 의기양양해져서 가슴을 폈다.
“봐, 쉬운 게 아니라고 했지?”
“알겠으니까 가보트도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