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8화 (18/162)
  • 18화

    나는 돌려서 그를 공격했다.

    해석하자면 ‘네가 들은 거 다 소문이면서 뭘 그렇게 아는 척하냐’가 되겠다.

    하지만 줄리안의 표정에는 실금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냥 순수한 말이었던 척하자.

    “그러게요, 소문만 듣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데. 당연히 전하께서 잘해 주시겠죠?”

    “아니요.”

    “……네?”

    속만 뒤집어 놓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서 미뉴엣이 웃었다.

    착각인가, 입꼬리가 아까보다 올라간 것 같은데.

    자리에 없는 미뉴엣에게 위축돼 나는 말을 정정했다.

    “농담이에요.”

    “그렇…… 군요, 예상 못 한 말이 나와 놀랐어요.”

    “그럼요. 못해 주면 약혼도 안 했겠죠.”

    “그래요. 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제게 연락 주세요.”

    가보트의 누이면 기꺼이 도와드릴 테니.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뒤쪽에서 악단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춤추러 나오면서 이쪽을 흘금거렸다.

    줄리안도 슬슬 돌아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러면 한 곡 어울려 주실래요?”

    그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춤추는 게 어렵진 않지만 음.

    보통 첫 춤은 카발리에랑 춘다고 하던데?

    속내를 눈치채고 줄리안이 선수 쳐 물었다.

    “괜찮지, 가보트?”

    이거 순 건달이네.

    위축된 가보트를 보면 안 된다고 할 리가…….

    “아니, 안 괜찮아.”

    “오?”

    가보트가 내 손을 대신 잡았다.

    그러고는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나를 데려갔다.

    우와! 세상에, 성장 소설 같아!

    나는 감동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잠깐.

    “줄리안.”

    나는 가보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줄리안의 얼굴에 미소는 지워져 있었다.

    “뱀, 조심하세요.”

    가보트는 말처럼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 올려 걸었다.

    마침내 춤을 출 준비까지 마쳤을 때, 나는 내 감상을 가보트에게 전했다.

    “가보트, 너 다리 떨린다.”

    “……아니거든.”

    “아니라면서 왜 방금 아래쪽 쳐다봤어? 너도 네 몸 상태를 확신할 수가 없어서 본 거 아냐?”

    “너 그 말투 어디서 배웠냐?”

    “화나?”

    “네가 들으면 어떨 것 같은데.”

    “엥, 난 다리 안 떨어서.”

    “야!”

    못 참고 가보트가 소리쳤다.

    그 와중에 춤은 또 시작돼서 가보트가 발을 삐끗했다.

    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이 나빴다며, 가보트. 줄리안이 왜 친한 척해? 실은 같이 놀았어?”

    “너 또 첫사랑이니 뭐니 얘기하면 가만 안 둔다.”

    “오라버니는 폭력적이야!”

    “……닭살 돋는 건 둘째 치고 나 열여덟이거든?”

    갑자기?

    “네 동생이라고!”

    “오……. 그럼 누나, 해 봐.”

    “갑자기 그 말이 왜 튀어나와? 나 너 누나라고 인정 안 했어!”

    “그렇구나! 가보트는 법보다 위에 있구나!”

    “야!”

    “이 얘기 싫으면 저번에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줘.”

    “전엔 듣지도 않아 놓고.”

    “아냐, 기억해. 공작 때문에 열등감이 어쩌고 질이 나빠 저쩌고, 그랬잖아.”

    “그걸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냐?”

    당연하지.

    “……나 아카데미 나온 건 알지.”

    “응.”

    “거기 미뉴엣이랑 비교하기 싫어서 들어간 거거든.”

    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간다.

    “적성에 안 맞았는데 잘 지내는 척하려고 사교회에 입회했어. 거기에 줄리안이 있었고.”

    “싸웠어?”

    “싸웠으면 차라리 낫게. 내가 마법학부였단 말이야.”

    “어? 너 마법사야?”

    춤에 턴이 들어가면서 말이 잠깐 끊겼다.

    “정령 쪽은 학생이 드물어서 보통 통합해서 배워. 그런데…… 내가 실기를 아예 못하니까 타깃이 됐지.”

    “그 말은…… 정령을 못 부른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도 가보트에게서 정령의 향기가 나는데?

    혹 재미없는 농담인가 했으나 가보트는 진지했다.

    “야, 그런 표정 짓지 마. 원래 보네티 직계라고 해도 반절도 소환 못 하거든?”

    “아니……. 응, 그래.”

    “……한심하냐?”

    “누나 인성이 그렇게 쓰레기 같아?”

    “뭔 소리야!”

    가보트가 실소했다.

    그러고는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지 살피는 듯, 조금 불안해 보였다.

    조금 달래 줄까.

    성력을 남발하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로는 몸에 타격이 가지도 않으니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한심한 놈들은 따로 있으니까 눈치 보지 마.”

    “어?”

    “너 잘못한 거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

    가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효과가 너무 좋았나, 콧잔등이 쭈글쭈글해졌다.

    마침 춤이 끝났기 때문에 나는 그를 데리고 외곽으로 빠졌다.

    그러고도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니까 후련하긴 한데 너한테 이런 얘길 왜 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네 앞에선 입이 가벼워져.”

    원래 선한 사람들은 성직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어 있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것도 춤을 추면서 말이야.”

    “그러네. 그나마 잔잔한 곡이라 다행이지, 격한 노래였으면─.”

    “가보트는 이미 명을 달리했겠지.”

    “그 정도로 허약하진 않거든!”

    “좋아, 지켜본다.”

    “……아무튼. 다른 놈은 몰라도 줄리안이랑 가까이 있지 마.”

    “걘 왜 아직도 너한테 집착해? 실은 줄리안이야말로 널 좋아하는 거 아냐?”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가보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공작 때문이야. 악의가 있을 게 뻔하니까?”

    “아, 맞다. 그런 말 했었지. 그런데 무슨 접점이 있어서?”

    “몰랐냐? 같은 해에 아카데미 입학했잖아.”

    크루엘로가 아카데미에 다녔다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걔는 4년 새 뭐 그렇게 부지런하게 산 거람.

    “보통 열넷에 입학하는데 공작은 열일곱에 들어왔지. 그러고도 1년 만에 조기 졸업했고.”

    “어쩐지 나이 차가 있는데 어떻게 같이 다녔나 했어.”

    “덕분에 줄리안만 우스워졌어. 천재라고 주위에서 떠받들어 줬는데 공작이 있는 동안은 눈길 한 번 못 받았거든.”

    그 일로 열등감을 품었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게 특기인 원로회가 줄리안을 물었나 보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엑스트라에 대한 이해도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대단하긴 했지. 공작이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처음 배웠다는데 계절별로 학년이 바뀌더라.”

    “그게 돼?”

    “뭐, 처음 배웠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괴물 같은 재능이지만.”

    음, 내가 알기로도 크루엘로는 열일곱까지 마법을 못 썼다.

    〈운명〉에서 워낙 마법을 남발해서,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보고도 놀라진 않았지만.

    원로회에서 수백 년간 공들여 만든 그릇답다고 할지, 조금 씁쓸해졌다.

    “아카데미에선 어떤 사람이었어?”

    “성격 나빴어. 교수가 말을 해도 쳐다도 안 보더라. 졸업하면 바로 작위를 받는다니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음.”

    “안 말려서 다행이었지. 공작위를 받자마자 미친 짓 한 거 보면.”

    “그때부터였구나.”

    “내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너, 아직 약혼식도 안 했는데 다시…….”

    가보트가 같은 잔소리를 반복하려던 때, 순간적으로 무도회장의 불이 깜박였다.

    어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샹들리에 불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 테이블이!”

    테이블이 들썩거리고 핑거푸드가 날아다녔다.

    트레이가 쏟아지고 와인잔이 무더기로 깨졌다.

    당연히 무도회장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됐다.

    가보트가 창백한 낯을 하고 내 앞을 막아섰다.

    지켜 주려는 게 고맙긴 한데.

    “갑자기 왜 이래. 황실에서 뭔 이벤트해?”

    “그럴 리 있겠냐! 뭐야, 대체.”

    “탈리아스 전하께서 노하신 거야, 틀림없어!”

    옆쪽에서 웬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탈리아스? 황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던가.

    설명을 요구하며 가보트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잠깐 새 더 허예진 채였다.

    “잠깐만. 뭐야, 오늘이 그날이야? 그 황자의 생일이라고?”

    “엥, 황자 없잖아.”

    “지금 말고! 수십 년 전. 왜, 한 번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잖아?”

    “아, 황궁 점령당했을 때.”

    “반란군을 몰아내기 전에 잡혀서 살해된 황자가 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생일이었대.”

    “오호.”

    “그 황자가 무도회를 그렇게 좋아해서 생일만 되면 황궁에 유령 목격담이 들린다더라. 분명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흐음.”

    불이 깜박이는 와중에도 가보트의 낯빛은 점점 더 생기가 빠져나가 숫제 죽은 사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0점.”

    “농담 아니거든?”

    뭐야, 복선도 없이 귀신 얘길 하는데 믿으란 건가?

    곳곳에서 탈리아슨지 뭔지를 부르짖긴 했다.

    하지만 유령 목격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요란한걸.

    “무슨 유령이 이렇게 요란을 떨어? 전혀 은밀한 맛이 없잖아.”

    “난들 아냐. 근데 듣기로, 생전에 어지간한 미친놈이 아니었더라고.”

    “나도 그런 놈 하나 아는데.”

    그때, 여태 들은 것 중 가장 커다란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으아악!”

    “커헉, 끅!”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섬뜩한 소리에는 죽음이 묻어났다.

    이건 진짜 같은데?

    나는 비명이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불이 깜박이는 와중에 제대로 보일 턱이 없었다.

    사람들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틀림없어, 이건 탈리아스 황자의 저주─!”

    “그럴 리가 있나.”

    황태자의 목소리가 가설을 단번에 부정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선명히 울렸다.

    마치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황태자는 피곤한 듯 말했다.

    “그만해 주시게, 공작.”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끊임없이 깜박이던 샹들리에의 촛불이 온전히 되돌아왔다.

    사위가 밝아지니 개판이 된 무도회장이 더 선명히 보였다.

    머리칼이며 의복이며 잔뜩 헝클어졌고 그나마 체면을 차린 사람들도 옷에 음식물이 묻어 있었다.

    테이블은 거의 쓰러져 있었고 음식들도 성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개중 가장 가관인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일제히 넋이 나간 이들이 멍하니 한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앉아 있는 상석.

    그리고 그 팔걸이에 기대어 있는, 외모만은 아름다운 사내.

    “재미없으셨습니까?”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너일 줄 알았다.

    생사를 떠나 이런 미치광이가 둘일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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