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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8화
35. 이번에야말로(4)
(시간의 흐름을 되돌린 존재여.)
모든 드래곤들의 수장.
‘리시스 라덴쥬’와는 다른 목소리.
몇 중으로 중첩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내용이야말로 더더욱 중요했다.
‘내가 회귀자란 사실을 알고 있다.’
상대는 시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골드 드래곤이다. 그럴 거라 충분히 짐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놀라운 것은 어쩔 방도가 없었다.
(언어의 힘을 말할 수 있는 자여.)
저 골드 드래곤 역시 ‘용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언어의 힘’이라고만 칭했다. 그 부분만큼은 리시스 라덴쥬와 똑같았다.
(많이 당황했으리라 짐작한다.)
“…….”
전혀 이안의 놀란 가슴을 염려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황해주기를 바라는 말투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드래곤의 말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왜 드래곤이 나타난 거지?’
복수의 완성이 목전까지 다가온 상황.
이런 순간에 등장한 골드 드래곤.
전혀 조합을 해볼 수가 없었다.
저 골드 드래곤과 라그나르.
둘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니까.
“정말 드래곤이십니까? 정신체가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다.)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우린 사라지지 않았다. 지켜볼 뿐이지.)
“무슨 뜻입니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그 대답과 함께 기이한 힘이 이안의 정신을 속박했다. 의지 자체가 사라져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더는 드래곤의 행방과 관련된 질문을 물어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용언…… 아니, 언어의 힘인가?’
가히 혀가 내둘릴 정도의 마법이었다.
이안의 마법 저항력은 인중 최고 수준.
그런 자신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든다?
진정한 드래곤의 힘이 느껴졌다.
‘정신체 하나 쓰러뜨렸다고 좋아할 수준이 아니었군.’
이안의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골드 드래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가 언어의 힘으로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대 역시 언어의 힘을 허락받은 존재, 타고난 권능을 행사했을 뿐이니까.)
“그건 다행이군요.”
(단.)
골드 드래곤의 첨언이 이어졌다.
(그대는 한계에 도달했다.)
“한계?”
(수많은 운명이 그대의 손아귀에 바뀌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십시오.”
(그대가 언어의 힘으로 시간을 되돌렸듯, 나 또한 언제든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허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까닭을 알고 있는가?)
“일회용이라서?”
용언서에서 사라진 황금용 일족의 언어.
이안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일회용? 힘을 잃고 소실된 언어를 말하는 건가?)
“아닙니까? 그럼, 글쎄요. 모르겠습니다만.”
(짐작은 되겠지.)
“…….”
드래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안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한계니 운명이니,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까닭이니 떠드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
“무슨 부작용이라도 존재하는 겁니까?”
(바로 그 문제를 경고하고자 왔다.)
이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회귀와 관련된 여러 부작용들.
이따금씩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그저 실존하지 않을 거라 믿었을 뿐.
(우리는 그 부작용을 ‘시간의 수호’라 부른다.)
“시간의 수호……?”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대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또다시 큰 흐름을 멋대로 바꿔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그대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겠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했으나, 이안은 곧잘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라그나르까지 죽인다면 그 ‘시간의 수호’라는 부작용이 발동하기 시작할 거란 얘기였다. 쉽게 말해 앞으로의 삶이 꼬인다는 얘기일 터.
“잠시, 하나만 먼저 여쭙겠습니다. 그 시간의 수호라는 부작용, 저에게만 해당하는 겁니까? 아니면 뭐 주변 사람들이 휘말린다거나, 세상 자체가 뒤집혀 버린다거나, 그런 포괄적인 문제까지 일어나는 겁니까?”
(시간의 수호는 철저히 해당자, 즉 그대의 운명에 한한다.)
골드 드래곤의 단호한 대답.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한 직감할 수 있었다.
‘수상해.’
세상 전체와 직결된 문제도 아닌, 일개 인간 하나의 운명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자 몸소 행차하셨다? 수백 년간 사라졌던 드래곤이 직접?
‘내 삶에 지나칠 정도로 개입하고 있어.’
첫 번째 삶과 확연하게 달라진 두 번째 삶, 특히 저 드래곤이란 존재와 필요 이상으로 엮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경우가 단지 우연은 아닐 터.
‘분명 연관이 있다.’
용언서로부터 시작된 두 번째 삶.
필시 드래곤들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할수록 확신이 생기는 이안이었다.
‘이래서 그런 말을 남긴 건가.’
자꾸만 환술 속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로 드래곤을 믿지 말라던 그 말.
결코 허언은 아닌 것 같았다.
영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해낸 이안.
그가 신중한 어조로 입술을 뗐다.
“시간의 수호, 그 부작용에 당하기 싫으면 지금부터라도 쥐 죽은 듯이 살아라,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마라.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쁠 건 없지 않는가? 그대는 이미 죽은 어미를 살렸고, 한평생 누리며 살 수 있는 기반까지 다졌다. 몇 가지 우연과 필연이 더해져 전생에는 없었던 가족과 친구도 생겼지. 헌데 무엇이 더 필요하지? 만족하고 살아가면 그만일 터.)
골드 드래곤이 달콤한 말을 쏟았다.
또한 꾸밈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이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충분히 그럴싸한 얘기였다.
하지만.
“참 줄줄이 꿰고 있으시군요.”
(…….)
“관음하는 취미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
회귀로부터 얻어낸 이안의 두 번째 삶.
전생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든 행보들.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저 골드 드래곤이라는 작자가 말이다.
“바꿔서 묻죠. 제게 바라는 것이 뭡니까?”
(없다. 경고를 하고자 왔을 뿐이다.)
“그럼 그 경고는 왜 하시는 겁니까?”
(설명하지 않았나? 시간의 수호가 그대의 운명을…….)
“제 걱정을 왜 드래곤께서 하시냐는 얘깁니다.”
이안의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섰다. 상대는 무려 ‘진정한 드래곤’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안을 수십 조각으로 찢어죽일 힘이 있을 거다.
그럼에도 이안은 당당했다.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이처럼 직접 찾아와 부작용을 경고할 정도로 애지중지 다루며, 두 번째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호의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대답할 의무는 없다.)
“또 그 소립니까.”
하나 그 말의 힘은 엄청났다. 행방에 대한 의문을 품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더는 이 문제를 논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드래곤이 사라져 줘야 생각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꽤 편리한 마법을 부리시네요.”
(나는 그대에게 경고를, 상응하는 기회를 주고자 왔을 뿐이다. 이외의 것은 논할 가치가 없다. 시간의 낭비이며, 정신력의 헛된 소모다.)
“기회?”
이안의 되물음과 동시에, 커다란 골드 드래곤의 육신으로부터 뿜어진 황금빛 마나가 회색 세상을 휘감았다. 그 빛이 점차 강해져 눈조차 뜰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잡념은 버려라. 경고를 허투로 듣지 마라. 주어진 기회를 신중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충고이자, 시간의 수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니.)
얼마나 두 눈을 감아야 했을까?
이윽고 강렬했던 황금빛이 사라졌다.
골드 드래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역시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다.
사람들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바마마. 저를 용서하지 마시라고.”
“라그나르…….”
“그럴 필요도, 바라지도 않는다고.”
창밖으로 떨어졌던 라그나르.
놈이 눈앞에 멀쩡히 서있었다.
아까 전과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시간이…… 되돌려졌다?’
이안은 어렵지 않게 파악해 냈다.
아마 골드 드래곤의 권능이겠지.
‘설마 이게 기회인가.’
드래곤이 말했던 ‘마지막 기회’.
그 또한 쉬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죽음을 막으라고?’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라그나르의 죽음을 막고, 시간의 수호란 부작용에서 벗어나 아무런 문제없이, 무탈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라. 아마 그 ‘기회’의 뜻은 이러할 터.
‘무탈한 삶이라…….’
제법 구미가 당기는 선택지였다. 라그나르를 죽이지 않고 얻는 무탈함? 행복? 문제될 건 없다. 죽이지 않고 처리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다만, 진정한 문제는 라그나르 따위가 아니었다.
‘의심스러워.’
그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실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의심스러운 이번 삶의 변화도.
의심스러운 드래곤들의 개입도.
의심스러운 부작용의 사실 여부도.
의심스러운 환술 속 마법사까지.
‘전부 다.’
깊은 고민에 잠긴 이안.
한줌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도대체 무엇을 불신해야 할까?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믿자.’
무엇을?
‘나를 믿자.’
깊으면서도 찰나였던 고민.
이안의 결론은 그러했다.
‘휘둘리지 말자.’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드래곤도, 최초의 마법사도.
더는 허락할 수 없었다.
‘이번 삶은.’
이안이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동시에 라그나르가 창밖으로 투신했다.
현 황제의 간절한 울부짖음도 들려왔다.
‘내가 걷는 길이 정답이다.’
창밖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라그나르.
그와 함께 뛰어내린 또 다른 청년.
이안 페이지가 주문을 읊조렸다.
“페더 폴.”
저속낙하 주문이 라그나르에게 걸렸다. 당장 혀를 깨물고 자진할 수 없도록 턱까지 부여잡았다. 라그나르를 살리기 위해서? 아니, 이안은 놈의 생존을, 나아가 실존 여부조차 불투명한 현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왕 얻어낸 기회니까.”
“읍……! 으읍……!”
“메모리 트랜스퍼.”
이안의 두 눈이 라그나르와 맞춰졌다.
녹색 마나가 눈과 눈으로 연결되었다.
기억의 일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마법.
메모리 트랜스퍼, 기억 전달.
“……!”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 라그나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단순한 놀라움의 표시가 아니었다. 밀려오는 기억, 그 낯선 경험에 대한 생체적인 반응이었다.
“네가 왜 죽는지는 알아야겠지.”
“너…… 네놈……?”
아직 불완전에 가까운 기억일 터.
하나 대략적인 판단은 가능할 거다.
라그나르는 아주 똑똑한 놈이니까.
“그때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이안이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잡았던 라그나르의 턱도 풀어줬다.
대신, 한 가지 마법을 걸었다.
“나를 원망해. 용서하지도 말고.”
저속 낙하 주문과 함께 천천히 추락한 이안과 라그나르. 두 사람이 지상에 착지했을 때, 라그나르의 숨은 이미 끊어진 직후였다.
젊은 상아탑주가 5황자를 구하고자 했지만, 궁지에 몰린 5황자의 선택은 투신으로 그치지 않았고, 결국 혀까지 깨물어 버렸다. 혓바닥 일부가 뜯겨져 나갈 정도로 강하게 물어뜯었으니, 애당초 죽음을 피할 길은 없었으리라.
세상에는 분명, 그렇게 알려졌다.
역사에는 분명, 그렇게 기록되었다.
* * *
황금빛의 가죽과 비늘을 가진 드래곤.
그 거대한 존재가 하늘로 치솟았다.
얼마나 높이, 또 오랫동안 날았을까?
곧 구름 위에 감춰졌던 땅이 나타났다.
이안이 환술 속으로부터 찾아냈던 평야.
구름과 함께 노니는 ‘부유의 땅’이었다.
“생각보다…….”
드래곤이 부유의 땅에 착지하는 순간.
커다란 몸뚱이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뿐일까? 인간의 형태까지 이루어냈다.
“감정적인 녀석이군.”
다소 못난 편에 속하는 얼굴.
밝은 갈색의 머리칼까지.
그는 명백한 인간이었다.